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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사를 찾는 이유는 저마다 다르다. 하지만 일상의 어느 날, 이런 순간이 온다면 그때는 기어코 산문을 두드려야 한다. 말없이 위로받고 싶은 날, 또 신비로운 이야기와 함께 낯선 세상으로 떠나고 싶은 순간에도. 아니 그저 숲속의 새들과 푸른 바다 깊은 곳에서 자유로이 물길을 타고 오르는 물고기, 그 곁을 함께 차오르는 신성한 용과 또 힘차게 포효하는 사자가 보고 싶다면 바로 그때에 산사를 찾아야 한다. 불법의 수호자이자 당신과 함께할 때 더욱 의미를 지니는 아름다운 존재들, 바로 불교 속 동물들이 그대를 기다리는 순간이다.
불교와 동물
장엄한 모습의 궁궐, 상상 속 반야용선(般若龍船)1) 의 구현, 불교 미술의 거대한 집합체.
산문을 들어서는 순간 만나게 되는 우리의 전통사찰은 보는 이의 시선을 압도하는 강한 아름다움이 있다. 그것은 사찰 안팎으로 불상을 외호(外護)하고, 더불어 조각과 그림, 여러 상징을 통해 다양한 방법으로 불법을 전하고자 한 오랜 노력의 산물이다. 그리고 그 속에는 대중들에게 친숙한 불상이나 석탑, 탱화 속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존재들이 있다. 바로 하늘과 땅, 바다는 물론 설화 속에서 살아 숨 쉬는 동물들이다.
불교에서 동물은 결코 경전이나 숱한 일화들 속에 등장하는 조연에 국한되지 않는다. 어쩌면 동물은 나와 남이 다르지 않다는 자타불이(自他不二)의 불교적 세계관, 특히 끝없이 이어지는 윤회와 인연의 섭리를 가장 잘 대변하는 존재인지도 모른다.
부처님은 제자들에게 “그대들은 오랫동안 양, 염소, 사슴, 닭, 돼지이기도 했다. 이러한 시간 동안 그대들의 어머니, 아버지, 형제, 자매, 아들, 딸이 아니었던 생명을 찾기란 쉽지 않다.”고 전한다, 다만 모든 생에 걸쳐 자신이 행한 선과 악의 결과에 따라 그 모습을 달리할 뿐.
산 생명을 죽이지 않는 불살생(不殺生)의 법, 이를 가능케 하는 자비심의 발현은 우리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관통하는 불변의 지혜다. 한 포기 풀과 나무, 따뜻한 피가 흐르든 차가운 피가 흐르든, 불교에서 소외되는 생명이란 없다.
사찰을 지키는 생명들
부처님의 전생에 대한 기록으로 널리 알려진 ‘자타카(jataka2))’는 부처님조차 여러 동물의 생을 살았다고 전한다. 달콤한 망고나무를 뺏으려는 인간의 욕심 때문에 부족의 생명이 위험해지자 자신을 희생한 원숭이왕 이야기는 가장 유명한 부처님의 전생담 중 하나다. 이밖에도 뱀과 까마귀, 개구리, 물고기, 악어 등 다양한 동물들이 경전 속에서 선행과 악행의 주체적인 행위자로 등장한다.
한국의 사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생명이라면 물고기를 빼놓을 수 없다. 수중생물을 대표하여 목어에서 목탁, 처마 끝에 걸린 풍경까지 그 존재감을 드러낸다. 이는 중국 당나라 승려인 백장선사(百丈, 749~814)가 밤에도 눈을 감지 않고 지내는 물고기처럼 정진할 것을 당부한 ‘백장청규’에서 기원을 찾을 수 있다. 또 사찰 전체를 극락정토로 향하는 반야용선으로 여기고, 동시에 화마를 막기 위한 액막이로 물고기와 거북이, 게, 수달 등을 새겨넣은 것 또한 고찰에서 찾아볼 수 있는 귀한 모습이다.
주로 석탑을 지키는 수호신장으로 조각되는 12지신도 있다. ‘본생경’에 기록된 토끼는 수행자에게 스스로를 공양해 보시와 희생의 상징으로, 재물과 복을 상징하는 돼지와 산신의 다른 모습인 호랑이, 사찰의 창건설화에 등장하는 곰까지. 시대와 문화, 자연까지 여러 측면에서 불교와 융합된 동물들이 우리의 사찰을 지켜오고 있다.
혹 어느 산사에서 나한전을 보게 된다면 잠시 걸음을 멈추고 그 안을 눈여겨보라. 나한들에게 강아지처럼 매달리는 호랑이와 사자, 무릎에 올라 귀엽게 장난치는 동물 여럿을 볼 수 있을 테니. 심지어 그들을 바라보며 인자하게 웃는 나한들의 모습은 따뜻하고, 해학이 넘쳐난다. 어떤 경계 없이 뭇 생명에게 품을 내어주는 자비의 얼굴이 바로 그곳에 있다.
해탈, 하나 될 때 열리는 세상
충남 공주 태화산 자락의 천년고찰 마곡사(麻谷寺). 이곳에 들어서기 위해선 가장 먼저 ‘해탈문(解脫門)’을 지나야 한다. 말 그대로 모든 괴로움과 헛된 생각의 그물을 벗어나 진리의 깨달음을 얻는 문. 이 해탈문의 한편에는 푸른 청사자를 탄 문수보살이, 맞은 편에는 흰 코끼리를 탄 보현보살이 각각 금강역사(金剛力士)3) 사찰의 수문장인 사천왕 중 하나이며, 금강신, 집금강, 금강야차라고도 불린다. 금강저(金剛杵)를 손에 들고 붑법울 수호하는 신이다.
불교에서 가장 상서로운 동물을 상징하는 흰 코끼리는 희생과 인내, 자비를, 보현보살은 강력한 정진의 힘을 상징한다. 목표를 향해 끝없이 정진해야 하는 긴 여정에 코끼리만큼 듬직한 조력자가 또 있을까. 지혜를 관장하는 문수보살에게 용맹함과 뛰어난 영리함을 갖춘 사자야말로 천생연분이 아닐까. 해탈에 들어서기 위해선 지혜와 정진을 모두 갖춰져야 하듯, 위대한 두 보살을 코끼리와 사자가 보필하고 있다.
우리가 고요한 산사에서 막연한 위로를 받을 때, 어쩌면 그 순간 어떤 보이지 않는 신령한 존재가 곁에 머물렀는지도 모를 일이다. 누군가의 지친 발걸음을 살며시 어루만져주고 사라지는, 어느 자비로운 동물 같은 존재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