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칼럼 | 지난칼럼 |
엊저녁에 한국에 사는 언니와 오랫동안 전화 통화를 하다 보니, 자정을 넘겨 새벽녘에야 잠이 들었다. 오직 그림을 그리고 수강생들을 가르치면서 살아왔던 나의 큰 자랑거리인 화가 언니. 우리는 가끔 아주 긴 시간동안 전화 통화를 한다.
20년 전에 내가 뉴질랜드에 왔었을 때만해도 이런 시간을 갖게 되리라곤 상상해 보지도 못했다.
하지만 지금은 얼마나 좋은 시대인 것인가? 스마트 폰 하나만 있으면 거리에 상관없이 채팅과 전화 통화가 자유롭다. 어디 그뿐인가?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즉각적으로 알 수 있게 되고, 다 함께 고민하고 참여할 수 있는 시대가 온 것이다.
현 시대의 혜택을 톡톡히 누리고 있는 우리 자매의 소소한 대화는 서로를 다독여주면서 서로의 꿈을 잃지 않도록 격려를 해준다. 마음의 힘을 알고 있는 우리는 마음의 촛불을 꺼뜨리지 않으면서 당당하게 품위 있는 삶을 살자고 약속한다.
내가 케이블 TV에서 일하고 있었을 때, 무대 장치와 소품을 위한 공부를 위해서 한 노부부 아티스트를 찾아 갔었던 적이 있다. 미국에서의 생활 중에 늦깎이 아티스트가 되어 설치미술을 하고 있는 분들이었다.
서초동 아파트 지하의 한 귀퉁이가 그분들의 작업실이었다. 오랜 기간 아무도 돌보지 않은 폐가에서 쓰레기가 되어버린 나무 의자와 문짝 기둥...들을 주워서 자신의 혼이 담긴 독특한 작품으로 승화시키는 작업을 하고 계셨다.
아파트 주민들의 쓰지 않는 물건들이 즐비하게 놓여 있는 건물지하의 한 공간에 오직 촛불로만 조명을 해 놓은 운치 있는 작업실. 흘러내린 촛물을 머금은 초 위에서 가늘게 떨고 있는 불빛들이 크고 작은 작품들 사이로 일렁이고 있었다.
대선 막바지로부터 한국에 다시 불이 붙은 촛불시위를 보면서 그때 그 작업실에서의 품위 있는 작품들과 촛불들의 춤사위가 떠올랐다.
촛불 시위에 참가한 개딸들과 양아들들. 그들이 오공시대에 화염병으로 투쟁했던 우리를 넘어선 발랄하고 품위 있는 촛불시위에 참여하고 있다.
정치에 전혀 관심이 없었던 20대의 그들이 정치에 관심을 갖게 되자, 스스로 공부를 하여 알아내고 깨달아 가면서 평화시위를 하고 있는 것이다.
스스로 개혁의 딸들과 양심 있는 아들들이 되어 뒤로 돌아가려는 역사를 바로 잡으려 한다. 상식과 공정이 통하는 사회가 되기를 희망한다. 상식과 공정은 빛줄기와도 같다. 촛불과도 같은 것이다.
민주당원들을 달래면서 검찰과 언론의 정상화를 바라는 촛불시위. 위대한 평화시위를 하는 그들. 국민의 반이 그들을 반기고 있으며 그들을 응원하고 있다.
자신과 국민들의 미래를 위해 직접 나선 그들의 용기에 박수를 친다. 그들이야말로 대한민국의 빛과 소금이다. 그들은 거꾸로 가고 있지 않다. 나 또한 그들과 함께 앞으로 뚜벅뚜벅 걸어갈 것이다.
광기가 극을 달하는 현 시대에 발맞춰 바이러스들까지도 극성이었다. 푸틴의 광기 또한 끔찍한 전쟁을 일으켜 전 세계를 경악하게 만들었다. 세계 어느 구석을 가나 안정적으로 생활하기가 힘이 드는 시국이다.
뉴질랜드 또한 경제 위기 속에서 제대로 된 해결점을 찾기 힘이 든다. 치솟아 오른 부동산 가격은 젊은이들과 서민들의 삶을 불안하게 만들고, 빈부의 격차는 점점더 심해지고 있다.
사이비 종교의 광기까지 합세하여 진실을 가리고 있다.
지난 60여년을 살면서 지금처럼 빠른 광기의 전개를 본 적이 없다. 하지만 광기는 그 어떤 시대에도 있었다. 지금 우리에게 닥친 광기를 우리는 어떻게든 현명하게 잘 다스려서 더 좋은 미래를 창출해야만 한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의 촛불시위는 훌륭한 행동으로 보여 진다. 현명한 개딸들과 양아들이 앞서서 나아갈 것이며, 그들과 함께 우리 모두 광기와 어리석음이 만들어 놓은 유산의 빚을 잘 갚아나갈 수 있도록 힘을 내야겠다.
우리는 할 수 있다. 이제껏 해 온 것처럼 그 어떤 문제도 해결해 나갈 수 있다. 인내의 시간에 노력의 시간을 더하여 실패를 성공으로 바꿔 온 것처럼, 그 어떤 실패도 좌절의 원인이 되면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