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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07/2009. 10:55 코리아포스트 (222.♡.128.78)
재미있는 영어칼럼
아직도 식민지 근성이 많이 남아 있어서인지 '우리 한국 사람들'은 스스로의 것들을 너무 많이 깎아 내린다.
간단한 예로 'a place where meals are sold and eaten(음식을 팔고 먹는 장소)'를 뜻하는 'restaurant'이라는 영어 단어를 '우리말'로 무엇이라고 해야 할까 생각해 보자. 내가 10대 일 때는 '양식집'이나 '경양식집'이라고 부르더니 요새는 사전에도 '음식점, 식당, 요리점'이라고 '우리말'로 설명해 놓고 있다. 나아가 아예 '레스토랑'이라고 '외국어'의 우리말 표기를 그냥 쓰고 있다. 어느 사전을 뒤져 봐도 거의 똑같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음식점, 식당, 요리점, 레스토랑' 어느 단어도 순수한 우리말은 아니다. 생각해 본다. 'restaurant'의 순수한 우리말은 '밥집'이 아닐까?
물론 영어에서 'a restaurant that serves simple food and drinks(간단한 음식이나 음료를 파는 식당)'를 가리키는 'café' 나 'cafeteria' 와 'restaurant'은 구분지어 쓰지만, restaurant에 대한 필자의 머리속에 떠오르는 순수한 우리말은 '밥집'이다. 그런데 나에게도 밥집이라고 하면 무엇인가 허름하고 지저분하고 조그만 장소의 '밥 먹는 곳'이 떠오르고 식당이나 음식점, 레스토랑이라고 하면 좀 더 좋고 고급스러운 장소가 떠오르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일제시대나 더 거슬러 올라가 조선시대부터 상류층들은 '요리점'에서 식사를 하셨고, 허름한 백성들은 '밥집'에서 밥을 먹었던데서부터 유래하게 된 것인가? '요리점'에서 상류층이 했던 '식사'는 '밥'과 본질적으로 무엇이 다를까? 순수한 우리말 지키기 '프로그램'이라고 자부했던 '프로그램' 이름도 꽤 오랜 시간 동안 '상상 플러스'였다. 일제 식민지 시대를 지나 이제는 영어 식민지 시대인가?
많은 나라 사람들이 한국을 부러워하고 박수를 보낼 때도 있지만 정작 한국사람들은 시큰둥하다. 미국의 오 바마 대통령도 얼마 전에 자신의 부모의 조국인 아프 리카의 한 나라를 한국과 비교하며 통탄했다. 그러면서 6.25 전쟁 직후 그 나라 보다도 못살았던 한국이 오늘날의 대한민국으로 발전한 원동력을 엄청난 교육열이라고 평했다.
그런데 많은 한국 사람들은 대한민국의 교육열을 병 이라고 평한다. 서울 강남 대치동에서 뿐만 아니라, 분당 에서도 대전에서도 거제도에서도 주문진에서도, 심지어 뉴질랜드에까지 와서도 열심히 공부하고 있는 한국의 10대들을 바라보며, 많은 사람들은 대한민국 교육이 중병에 걸렸다고 단언한다. 한창 재미있게 뛰어 놀 나이에 '공부에 찌들어 사는' 아이들을 안쓰럽게 여긴다.
오바마 대통령의 시각과 꽤 많은 한국 사람들은 어떤 관점의 차이를 갖고 있는 것일까? 저마다 인생관과 교육관이 다를 수 있지만 뒤집어 생각해보자.
만일 오바마가 미국 빈민가에서 다른 흑인 아이들처럼 재미있게 뛰어 노는 10대 시절과 젊은 날을 보냈다면 지금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만일 우리 부모와 우리 세대가 재미있게 뛰어 노는 위주의 10대 시절과 젊은 날들을 보냈다면 과연 대한민국은 지금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All pleasure must be bought at the price of pain. (모든 즐거움은 고통의 대가로 얻어져야 한다.) The difference between false pleasure and true is just this: for the true, the price is paid before you enjoy it; for the false, after you have enjoyed it. (거짓된 즐거움과 참된 즐거움의 차이는 바로 이것이다. 참된 즐거움을 위해서는, 즐거움을 즐기기 전에 대가가 지불 되어지지만, 거짓된 즐거움의 경우에는 후에 대가가 지불된다는 점이다.)
밤 늦게 까지도 공부하는 아이들을 너무 불쌍하다고만 여기지 말자. 아이들은 참된 즐거움을 누리기 위해 인생 에서 '마땅히 치러야 할 대가를 미리' 지불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열심히 대가를 지불할 대상이 꼭 공부일 필요는 없다. 어떤 경우는 수영일 수도 있고 춤일 수도 있고 요리일 수도 있다. 그러나 적어도 인생의 어느 한 시기에 미래의 어떤 목표를 위해 치열할 정도의 열정을 기울인 경험 없이 여유로운 중년 이후의 삶이 주어지는 경우는 없다.
지금 그 대가를 지불하지 않으면 10년 후 20년 후에 그들이 치러야 할 대가는 20배 100배로 더 뼈저리게 그들을 짓누를 수도 있다. 인생의 고지서는 반드시, 늦게라도 날아오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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