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한글, 아파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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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픈 한글, 아파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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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들은 줄이는 능력이 탁월하다. 그들이 쓰는 문자인 가나문자 부터가 그 이전부터 써오던 중국의 한자를 간소화하여 만든 문자다. 커다란 식탁이나 밥상을 조그맣게 줄여서 휴대용으로 만든 도시락 문화를 만들어 낸 것도 그들이다. 대한민국 초대 문화부 장관을 지낸 이어령씨의 ‘축소 지향의 일본인’이라는 책을 참고로 하여 좀 더 살펴보자.

1955년 2월 ‘소니’의 전신인 ‘동경 통신 공업’이 트랜지스터 라디오 TR.55를 신발매하였다. 그것은 순식간에 세계 시장을 점령하는 일본 제품의 제 1호로 기록되었다. 그 전까지만 해도 이른바 ‘007 가방’ 부피만큼이나 커야만 했던 라디오를 시가 케이스 만한 트랜지스터 라디오로 줄여 놓은 소니는 지금까지도 전세계 가전제품 시장에서 정상을 달리고 있다. 영국 신사들이 들고 다니던 긴 우산을 2단 우산으로, 나아가 여성의 손 가방 속에 쏙 들어갈 수 있는 3단 우산으로 줄여 만든 것도 역시 일본인들이다. 대자연의 모습을 담장안 정원으로, 또 그 정원을 더 줄여서 분재와 수석으로 방안으로까지 끌어들여 감상할 수 있게 한 것도 역시 일본인들이다. 커다란 부채를 손안에 쥐고 다닐 수 있는 쥘부채로 만든 것도 일본인들이다.

이러한 작은 것에서의 탁월한 능력은 일본인들의 유전자 속에 조상 때부터 물려받은 듯하다. 일본인들은 예부터 쌀알에 글자를 써 넣는 경주를 해 왔다. 그들은 심지어 쌀 한톨에 600자, 깨알 한 개에 160자, 콩에 300자를 쓰기도 한다. 나아가 글자를 쓰는 게 아니라 쌀 한 톨에 46자의 글자를 일 분 안에 파 넣기도 한다.

문제는, 작게 만드는 데 전 세계 제일의 능력이 있는 일본인들은 영어까지도 짧게 줄여쓰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들 나름의 법칙을 갖고 줄여썼다고는 하지만, 일본인들은 아는 영어 단어인데, 영어 원어민들은 모르는 영어 단어를 무수히 만들어 쓰고 있다. 테레비, 매스컴, 인플레, 인프라와 같은 당연히 영어 단어인듯한 이 말들은, 영어에는 없는, 일본인들이 영어 단어의 뒷 부분을 뭉텅 짤라 만든 엉터리 영어 단어를 한국의‘매스컴’들이 경쟁적으로 무비판적으로 갖다 쓰며 한국에도 뿌리를 내리고 있는 말들이다. 좋은 것은 일본 문화라해도 수용해야겠지만 엉터리 영어까지 그대로 베껴쓰고 있다.

일본에 대한 조건 반사적인 적대감을 뿌리깊게 갖고 있으면서도, 아직도 한국의 ‘식자층’들과 ‘매스컴’들은 일본 TV 프로그램 베끼기와, 일본식 꼬리잘린 영어 단어를 일본에서 직수입해오기 바쁘다. ‘ready-mix concrete’를 ‘레미콘’으로 ‘iced coffee’를 ‘아이스 커피’로, ‘amateur’를 ‘아마’로 ‘일본 영어’ 베껴 한국에 토착화 시키기에 바쁘다.

나아가 이제는 한국 자체에서도 엉터리로 줄여쓰고, 엉터리 영어를 토착화시키고 있다. ‘interchange’를 영어에는 없는 엉터리 약자인 ‘I.C’로 만들어 쓰기까지 한다. ‘외환 위기를 초래했다’는 ‘IMF를 초래했다’고 나의 혀에까지 달라 붙어 버렸다. ‘국제 통화 기금 (International Monetary Fund)’을 초래했다’는 말도 되지 않는 말들을 오늘도 한국의 ‘매스컴’들이 쏟아내고 있다. (안정효의 ‘가짜영어 사전’ 참고)

아이들은 어른들을 보고 배우고, 배운 것을 발전시켜 나간다. ‘푼돈을 벌기 위해 여가에 임시로 일하는 일자리(part-time job)’를 뜻하는 우리가 즐겨 쓰는 말 ‘아르바이트’는 영어가 아니라 ‘part-time job’과는 상관 없는 ‘arbeit(일하다)’라는 독일어이다. 그런데 우리의 아이들은 ‘아르바이트’를 ‘알바’로까지 ‘발전’시켰다. 그리고는 묻는다. “왜 아파트가 영어가 아니예요?”

‘아파트(apart)’라는 영어 단어는 ‘떨어져서, 따로따로’를 뜻하는 부사나 ‘다른, 독특한’이라는 뜻의 형용사로 쓰이는 단어이지 우리가 의미하는 공동주택을 뜻하는 명사가 아니다. ‘대치동 아파트 값이’라고 할 때의 ‘아파트’는 ‘apartment (house)’를 일본인들이 허리를 잘라 만든 단어를, 1960년대 말 서울 마포에 ‘아파트먼트’가 처음 선을 보였을 때 ‘아파트’로 일본에서 직수입해 쓰기 시작하여 지금은 한국 문화에 더 이상 뽑아버릴 수 없을 정도로 뿌리깊게 내려버린 단어다. 참으로 슬픈 한글(?)단어다.

일본 제국주의의 전체주의적 사상이 배어었던 단어 ‘국민학교’라는 말을 광복 이후에도 무심코 그냥 쓰다가 ‘초등학교’라고 바로 잡는 데도 몇 십년이 걸렸다. 말과 글은 그처럼 한 번 잘못 쓰이면 고치기 힘든 것이다. 이제 한국의 국력이 강해지며, 한국어에 대한 다른 나라 사람들의 관심도 점점 커가고 있다. 전 세계에서 1700만명의 사람들이 한국어를 배우고 있다고도 한다. 제대로 세계인들에게 우리말과 글을 내놓아야만 할 때다.

우리말과 한글의 아름다움과 독창성과 우수성은 이미 전세계 사람들도 인정하고 있는 엄연한 사실인데도, 정작 한국 사람들은 엉터리 영어 단어까지 동원해가며 한 문장 당 영어 단어 한 두 개 정도는 섞어 쓰지 않으면 안될 듯이 경쟁적으로 우리 말을 오염시키고 있다. 그 틈을 비집고 중국에서 한글을 자신들의 문화 상품으로 만들어 세계에 내놓으려 하고 있다.

벌써 여러 번 노벨 문학상의 유력한 수상 후보로 거론되었던 고은 시인은 ‘겨레말 큰 사전’ 편찬 작업이 정부의 무관심으로 중단될 위기에 처했다고 정부의 관심을 요구했지만 그에 대한 응답은 들리지 않는 모양이다. 멀리 내다보는 거산의 호령도 산 속에 메아리로만 그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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