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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략’의 의도들은 시대마다, 나라마다 조금씩 다릅니다. 가장 단순하고, 분석하기 쉬운 것은 ‘자원 확보’나 ‘전략적 요충지’ 확보형 침략들입니다. 예컨대 미국의 2003년 이라크 침략은 전자, 2001-21년 동안의아프간 점령 시도는 후자에 각각 속합니다. 바로 보면 의도가 뻔히 보이는 것이지요.
그런데 예컨대 일제의 1931년 만주 침략은 그것보다 훨씬 복잡한 그림을 보여주는 것이죠. 침략을 군부가 단행한 거고, 상당수 관벌이나 민간 정치인 등은 이 침략에 다소 회의적이었지만, 군부를 만류할 수 없었습니다. 군부나 침략에 적극적인 “혁신 관료”들은 만주를 이용해서 일본 중심의 자급자족형 경제 블록을 만들려고 했으며, 그 자원을 이용해서 일본의 (군사용) 중화학 공업의 발전을 촉진시키려 했습니다. 만주부터 시작해서 군부 중심의, 자본주의형 계획경제를 실험하려 했으며, 나중에 이 경제 모델을 이용해서 세계 전체의 “나누어먹기” 과정에서 일제의 몫을 최대화하려 했습니다.
하필이면 일제의 만주 침략이 지금, 이 순간 기억 속에서 뜨는 이유는 여러 가지입니다. 가장 단순하게는, 그 침략에 동원된 군사력은 현 러시아 군사력과 비교가 가능한 규모이었기 때문이죠. 1931년 9월에 침략에 이용된 일제의 군사력 규모는 약 16만 명의 병사 정도인데, 이는 대체로 현재 우크라이나에서의 “작전”에 참여하는 러시아군의 규모와 엇비슷합니다. 현재 작전의 무대가 된 동부 및 중부 우크라이나의 영토 면적도 대체로 중국 동북 삼성과 비교가 가능합니다. 우크라이나군의 저항은 1931-2년 당시 마점산 (馬占山) 흑룡성 장군의 저항보다 훨씬 고도화돼 있지만, 지금대로 계속 가고 있다면 그 저항을 제압하는 데에 1931-2년 만주와 엇비슷한 기간 (약 4-5개월 정도) 소요될 것 같습니다. 만주 침략은 1933년 일본의 국제연맹 탈퇴로 이어진 것처럼 지금도 러시아는 기존의 국제 질서로부터 본질적으로 ‘이탈’하는 것입니다. 표피적인 ‘유사함’은 이런 부분들부터 시작됩니다.
한데 그것보다 더 깊이 파고들면 더 많은 구조적 흡사성을 발견하게 됩니다. 만주는 석탄 채광, 그리고 요녕성 안산 (鞍山)의 그 유명한 제철소로 대표되는 철강 산업의 지대이었습니다. 일제는 만주의 석탄, 철석, 비철 등 자원을 손에 넣어 자급자족형 일-선-만 경제 블럭을 만들려 했던 것이죠.
우크라이나도 중화학 공업에 필요한 ‘자원’들의 보고이며, 사실 이미 고도로 발달된 중공업을 보유하는 나라입니다. 우크라이나 강철 (pig iron) 생산은 세계의 10위 정도고, 러시아의 생산량의 약 40% 정도 됩니다. 그 산업에 종사하는 전문 인력 (숙련공 등등)만 해도 40만 명 정도 되는 것이죠. 이외에는 우크라이나는 망가니즈, 알류미늄, 심지어 우라늄 등을 생산하는 거고, 그 생산을 러시아의 군수 공업을 포함한 중공업은 상당히 필요로 합니다. 실은 우크라이나 자국 내에서도 예컨대 드니프로시의 유즈마쉬 공장 같은, 미사일 생산까지 가능한 첨단 중공업 시설들이 있습니다. 그 공장들은 거의 다 러시아군의 작전 무대인 동부 및 중부 우크라이나에 위치해 있으며, 그 숙련 인련들은 대부분 구소련(식) 교육을 받아 러어를 (거의) 모어로 구사할 줄 아는 사람들입니다. 푸틴의 속셈이라면, 그 자원과 그 시설, 그 인력을 손에 넣어, 숙련공과 엔지니어들을 다시 러시아인으로 “국민화”, 즉 (강압적) “재교육”을 시킨 뒤에 우크라이나까지 포함한 소련식 중공업 복합체를 복원하는 것일 겁니다.
그런데 ‘침략’을 사실 ‘이윤’ 차원에서만 설명하기가 힘듭니다. 아무리 우크라이나 자원, 공업, 인력 등을 다 손에 넣는다 해도, 러시아 외환 보유고 상당 부분의 구미권 중앙 은행에서의 동결, 외자 기업 철수, 구미권 투자 중단, 그리고 전쟁의 직접적 비용 등을 상쇄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비즈니스 플랜’ 차원에서는 침략은 일단 도박에 가깝기도 하고, 부대 비용이 많아 제 정신이 있는 ‘사업가’라면 피하는 편은 좋습니다.
즉, 여기에는 단순한 단기적 ‘비즈니스’ 이상의 부분들이 있다고 봐야 할 겁니다. 저는, 이번 침략을 - 1931년 일제의 만주 침략과 마찬가지로 - ‘발전 궤도’ 선택의 차원에서 연구해봐야 한다고 봅니다. 대공황 시절의 일본처럼, 오늘날 러시아도 ‘열강’의 축에 들지만, 상대적으로 ‘후진적’ 열강이죠. 러시아는 미국이나 중국과 달리 예컨데 애플이나 구글, 마이크로소프트, 아니면 華爲나 小米같은 최첨단 아이티 기업 하나 키우지 못하고 있는 나라입니다.
세계 최대 은행의 랭킹에서는 러시아의 최대 국유 은행인 스베르방크는 60위밖에 되지 못합니다. 스칸디나비아의 노르데아보다 더 작은 규모인 거죠. 글러벌 경제 속에서는 러시아는 아무리 시도해봐도 미국이나 중국 내지 EU를 상대 못합니다. 그래서 지금 일단 군사력을 이용해 완결된 영토적 제국을 건설한 뒤에 서방과의 경쟁으로부터 차단된, 즉 보호 받는 경제 영토 안에서 은행 자본과 IT 자본 등을 키우려는 게 러시아쪽의 장기적 계획이 아닌가, 싶습니다.
“완전한 국유” 대신에 “국가 주도의 시장 경제”긴 하지만, 이 “블럭 경제” 건설 계획은 스탈린의 “1국 사회주의”와 많은 면에서 비슷하다는 것을 누구나 쉽게 눈치 챌 수 있습니다. 총동원 전쟁 시절의 일본도 그랬고 스탈린 시대의 러시아도 그랬지만, 이런 “자급자족형 블럭 경제” 건설은 보통 엄청난 대민 탄압, 국가적 폭압을 수반했습니다. 과연 푸틴의 새로운 “완결된 제국” 안에서는 힘 없는 피착취 대중과 재야 인사, 정권의 반대자, 비판적 지식인들의 운명이 어떻게 될는지, 정말 걱정됩니다....
■ 박 노자
오슬로대학교수, 한국학자, 칼럼니스트
소련의 레닌그라드(현재의 상트페데르부르크)에서 태어나 자랐고, 본명은 ‘블라디미르 티호노프’다. 2001년 귀화하여 한국인이 되었다. 레닌그라드 대학 극동사학과에서 조선사를 전공했고, 모스크바 대학에서 고대 가야사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노르웨이 오슬로 대학에서 한국학과 동아시아학을 가르치고 있다.
한국 사회에 대한 비판적인 칼럼들을 묶은 『당신들의 대한민국』 으로 주목받았으며, 『주식회사 대한민국』 『비굴의 시대』 『당신을 위한 국가는 없다』 『전환의 시대』등은 이 연장선상의 저작이다. 『거꾸로 보는 고대사』 『우리가 몰랐던 동아시아』 『우승열패의 신화』 『러시아 혁명사 강의』 등을 통해 역사 연구자로서의 작업도 꾸준히 이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