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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과 학문에 대한 막연한 환상을 품으며, 1982년 봄 대학신입생이 되었다. 그러나 그 환상이 사라지는 시간은 입학과 동시에 다가왔다. 졸업정원제로 인한 고등학교의 연장 같은 대학 생활이었다. 우리 신입생들은 학과에 진입하기 전의 계열별 모집단위에 속해 있었다. 학과 소속이 아니다 보니, 속 깊은 대화를 나눌 선배가 드물었고 전공이 대한 공감대를 나눌 친구도 거의 없었다. 어떤 지적 자극도 설렘도 제공하지 않았던 교양수업을 들으며 내가 기대한 대학은 이게 아니라는 생각을 했더랬다. 한마디로 지적·정서적 풍만감과는 거리가 멀었던 대학 신입생 시절이었다.
교양수업을 마치고 캠퍼스를 걸으면, 이른바 ‘짭새’라 불리는 사복경찰이 교내에 그득하던 시절이었다. 시인 기형도의 표현대로, “목련철이 오면 친구들은 감옥과 군대로 흩어졌’(시 <대학시절> 중에서)던 그런 격동기였다. 어떤 채워지지 않는 욕구와 막막함, 쓸쓸함, 미래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이 마음을 부유하던 시기였다.
수업시간에 빠진 채, 혼자 지내는 시간이 많았다. 모든 걸 걸고 시위에 참여하는 선배들의 실천과 희생이 뇌리에 강렬하게 박혔지만, 당시 내게는 그런 용기가 없었다. 정말 좋은 책을 읽고 싶었다. 이를 위해서는 뭔가 새로운 돌파구가 간절히 필요했다.
2학기를 맞으니, 문득 대학 생활에 근본적인 변화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듣게 되었던 수업이 비평가 김윤식 선생의 ‘한국근대문학의 이해’였다. 늘 단색 넥타이와 세련된 양복을 걸친 채, 단호한 인상으로 열강하던 당신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수업시간 내내 당신의 카리스마와 학문적 열정이 인문대 1동 교실을 압도했다. 막스 베버, 헤겔, 루카치, 이광수, 대학의 본질, 학문의 열정, 고독과 자유, 토마스 만의 <토니오 크뢰거>를 위시한 수많은 관념과 철학, 사상, 문학, 예술이 종횡무진으로 등장하던 그 시간을 기억한다. 그토록 충만했던 한 시간이 마치 10분처럼 순식간에 지나갔다고 느꼈다.
비로소 내가 대학에 있다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글쓰기, 책 읽기와 더불어 살아가는 내 인생의 윤곽은 바로 그 순간 거역할 수 없는 운명과도 같이 결정되었던 것 같다. 그 시간 이후 자연스럽게 당신의 저서 <<문학과 미술 사이 - 현장에서 본 예술세계>>(1979)를 읽으며, 나도 이처럼 멋지고 지적이며 아름다운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하이데거의 <들길>을 읽고 나면 몹시 부러워진다”로 시작해 “허무가 앞뒤를 가로막아 나아갈 길은 아직 보이지 않는다. 그렇지만 그 허무의 안개 저편에 솟아오르는 선명한 이미지가 있었다. 포플라의 모습이 그것”이라는 문장을 거쳐, “포플라는 고독의 표상이기보다는 고독 자체였다. 예술이나 문학이란 내게는 이와 같은 표상의 추구일 따름이리라”로 끝나는 <<문학과 미술 사이>>의 ‘머리말’을 통해, 글 쓰는 사람의 고독과 함께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으리라.
당시 <<문학과 미술 사이>>를 몇 번이나 읽고 메모했다. 그 책에 등장하는 반 고흐, 릴케, 발자크, 로댕, 마네, 톨스토이, 졸라, 드가, 피카소, 렘브란트, 앙드레 말로, 안네 프랑크, 루카치, 토론토, 뉴욕, 보스톤, 나이아가라 폭포, 타이페이 등에 언젠가는 꼭 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그때는 여행 자유화가 허용되지 않던 시기였다). 동시에 “한 중년 고비에 접어든 사나이가 ‘떠나기 위해 떠나는’ 그런 방랑자의 자리에 설 수도 있는 것일까”라는 저자의 순수한 열정을 마음에 품고 싶었다. 이런 감정이야말로 당시 겨우 가능했던 내 나름의 지적 호기심이자 예술에 대한 막연한 동경, 먼 곳에 대한 그리움이 아니었을까 싶다. 요컨대 나도 이런 매력적인 글을 쓰고 싶다는 열망이 가슴을 치며 지나갔다.
생각해보면 그 이후 내가 보낸 세월은 <<문학과 미술 사이>>에 적힌 다음과 같은 문장들, 이를테면 “인간의 본질이 혼자 있음 그것이라면 희랍 시대 인간이나 점령하의 파리의 인간이나 다를 바 없다”, 누구나 과거를 회상하는 일은 아름다운 법, 그렇지만 그것이 센티멘털해지지 않기 위해서는 고통이 따르는 법”,의 의미를 온전히 이해하기 위한 시간이었다.
<<문학과 미술 사이>>의 저자는 지난 가을, 2018년 10월 25일 저녁에 저 광활한 우주 속으로 사라졌다. 당신은 이제 평생 함께했던 책과 글의 세계에서 떠나 영원한 휴식을 취하고 있으리라. 그러나 당신의 글, 당신의 책과의 만남으로 인해 글쓰기와 책 읽기를 운명이라 여기게 될 수많은 문인, 학자, 비평가가 존재한다. 당신의 육체는 이 세상에서 사라졌으되, 당신의 정신과 글은 영원히 남으리라. 책과 글을 사랑하게 만들어 준 당신과의 만남 그 귀한 운명을 평생 마음에 새기며 살아가고 싶다.
* 출처
권성우 교수(숙명여자대학교 한국어문학부)
<<비정성서를 만나던 푸르스름한 저녁>>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