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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안선에서 발견된 발우
사진제공 및 소장처 :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발우가 있었다
고려 시대, 태안 앞바다에 사나운 풍랑이 몰아치던 어느 날. 강진에서 만든 양질의 청자를 가득 싣고 개경을 향하던 몇 척의 목선들은 끝내 거친 파도를 이기지 못한 채 깊고 푸른 바다에 몸을 묻었다. 그리고 지난 2007년, 대섬 앞바다에 잠들어 있던 천여 년 전 고려의 난파선은 하세월을 지쳐온 듯 2만 5천여 점의 보물을 쏟아냈다.
심해의 푸른 빛을 덧입고 되살아온 고려청자, 그 사이에는 불교의 나라 고려가 만들어 낸 푸른빛 발우가 영속의 시간을 이겨낸 채 자리하고 있었다.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태안해양유물전시관이 2022년 5월 15일까지 개최하는 ‘해저만발(海底萬鉢), 바다에서 만난 발우(Buddhist Alms Bowls Salvaged from the Sea)’ 전시의 엄선된 138개 발우는 그렇게 수면 위로 떠올랐다. 국내외의 큰 관심을 받으며 인양된 태안 해저유물, 그 안에서도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정성껏 합을 맞춰 제작된 대량의 발우들이었다. 비록 정확한 사용처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당시 고려인들의 일상에 불교가 얼마나 큰 영향을 끼치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는 귀한 증거다.
발우가 그저 평범한 그릇이 아니듯, 그 안에 담기는 것 또한 단순한 음식이 아니기에.
불가의 정신을 담는 그릇
승가의 공양법을 뜻하는 발우공양은 단순히 먹는 행위만으로 규정할 수 없는 수많은 의미와 불교의 세계관이 담겨 있다.
발우공양에는 크게 8가지 정신이 전해지는데, 먼저 한 끼의 음식에 담긴 수많은 노고와 과정에 감사와 공경을 담아 그저 식사가 아닌 ‘공양’이라 말한다. 나아가 이 음식이 나에게 오기까지 숱하게 이어진 인연들에 자각하는 연기적 세계관을 담는다. 또 맛이 아닌 수행에 필요한 섭취로써 무욕을, 지위 고하에 상관없이 같은 음식을 통해 평등을 담으며, 뭇 생명을 위해 자신의 음식을 덜어내는 헌식으로 나눔의 정신을 담는다. 식전 게송인 오관게의 구절처럼 도업을 성취하여 중생을 제도하겠다는 수행자의 서원이, 음식물 찌꺼기를 배출하지 않음으로써 자연과 공생하려는 의지가, 끝내는 이 모든 과정을 통틀어 온 우주와 공존하려는 공동체 정신이 담겨 있는 것이다.
사찰의 공양이 일반 채식과 다른 점은 단순히 육식을 제한하는 것을 넘어, 이처럼 모든 생명을 향한 자비심의 발로라는 데 있다. 수확부터 조리과정, 나눔과 섭식까지 불가의 공양은 매 순간이 ‘수행’이다.
▲ 통도사에서 올겨울 김장 채비를 하고 있다
겨울 수행은 울력부터
지난 11월 19일, 전국의 선원과 총림에서 겨울철 석 달간 일체의 외부 출입을 끊고 화두에 매달리는 동안거 정진이 시작됐다. 비단 동안거가 이뤄지지 않는 사찰이라도 겨울을 준비하는 산사의 풍경은 닮아있다. 혹독한 계절, 수행을 이끌어 갈 양식을 함께 준비하는 울력은 겨울 산사의 가장 중요한 의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른 스님들과 일반 신도들까지 며칠씩 힘을 더하는 김장 울력은 가장 고되고, 또 기쁜 일이다. 최근에는 사찰의 김장 울력으로 소외계층을 위한 김치 나눔이 대중화되어 더욱 그렇다.
보통 동안거 결제 이전에 치러지는 김장이 마무리되면, 그해 겨울 먹을거리들도 차곡차곡 제 순서를 찾아 들어서기 마련이다. 김장 때 갈무리한 무청은 후원 처마에 차곡차곡 걸려 구수한 시래기로, 가을볕에 말려둔 무말랭이와 온갖 장아찌들도 겨우내 떨어지지 않는 고마운 양식이 될 것이다. 계절이 깊어지면 산속의 짐승들이 혹한의 고비를 넘길 수 있도록 얼어붙은 계곡에 물구멍을 내주고, 고구마와 곡류 등을 나누는 헌식 또한 이즈음에 자주 볼 수 있다.
가장 혹독하기에 가장 따뜻한 연대가 이루어지는 시간, 바로 산사의 겨울이고, 창창한 빛을 잃지 않은 청자처럼 천 년을 넘어 은은하게 전해오는 우리의 미덕이다.
▲ 고구마를 법당 바닥 위에 말리고 있다. 겨우내 귀한 식량으로 거듭날 고구마를 위해 스님은 법당 마루를 깨끗이 닦고 한 조각 한 조각 고구마를 정성스레 펴놓았다. 부처님께 올리는 공양만큼이나 고귀한 여정이다.
자비로 피어나는 공양
옛 백제와 신라에서는 불교 문화가 피어남과 함께 살생을 국법으로써 금하고, 고려에 이르러서는 채식을 권장하며 채소를 재료로 음식의 맛을 내기 위한 식물성 기름과 향신료가 발달했다. 이처럼 우리 민족의 다양한 채식 요리에는 그 근간에 불교의 자비 사상이 자리한다.
자비는 이른 새벽 수행자들의 속을 부드럽게 달래줄 죽을 쑤는 보살의 손끝에, 얼굴 한 번 보지 못한 누군가를 위해 기꺼이 김치를 담는 봉사자의 발걸음에, 작은 배춧잎 하나도 허투루 버리지 않고 귀히 여기는 마음에 있다.
천 년 전 깊은 바다에 잠시 몸을 뉘었던 푸른 발우 그 안에도 어느 고려인이 꿈꾸었을 영원한 자비의 나라, 불국토의 꿈이 살아 숨 쉰다.
■ 제공: 한국불교문화사업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