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칼럼 | 지난칼럼 |
2022년 임인년 새해가 되었습니다. 올 한해 독자님들의 가정에 화평함의 복과 성장의 복이 넘치시기를 기원합니다. 매번 뒤통수를 긁을 수밖에 없는 졸필을 컬럼이랍시고 올리는데도 미운눈으로 바라보지 않고 응원해주시는 분들이 계셔서 지난 6년의 시간에 또 한 해를 더할수 있게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항상 감사드립니다.
지난 12월의 어느 날, 한 학생의 어머님께서 상담을 요청하셨습니다. 이제 막 Y10을 끝내는 학생이었으니 제가 가르치는 학년중 가장 낮은 학년이었던 셈 입니다. 워낙에 조용한 성품이신 어머님은 그래서인지 이곳 저곳 발 품을 팔고 다니며 진학정보나 교육정보를 수집하는 스타일이 아니셨습니다. 그저 학교에서 보내주는 성적표와 생활기록을 통해 아이의 상태를 파악하고 그때 그때 필요한 조치를 취하는, 어찌보면 저의 부모님세대와 같은 ‘고전미’를 갖추신 분이셨습니다.
그런데 그런 분께서 상담을 요청하시다니.. 조금 의아하기도 했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이제 ‘때’가 되었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주니어과정을 끝내고 시니어 과정으로 들어간다는 심리적인 부담감은 비단 아이들만의 것이 아니기에 부모님 입장에서도 조금은 혼란스럽고 당황스러울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어느새 우리 아이가 이렇게 컷을까 하는 대견한 마음이 들면서도 동시에 본격적인 진학준비에 들어가는 중요한 시기를 잘 헤쳐나갈수 있을까 하는 우려가 혼재되어서 ‘머리속이 온통 벌집을 쑤셔놓은 듯 왕왕댄다’고 말씀하시곤 하니까요.
아니나 다를까요. 학생의 어머님은 이미 수백번을 들어온 질문으로 대화를 시작하셨습니다.
“시니어에 올라가면 공부가 많이 어려워질텐데.. 어떻게 가르쳐보시니까 저희 애는 잘 할것 같으신가요?”
제 입장에선 세상에서 가장 쉬운 질문이면서 동시에 가장 어려운 질문입니다. 지금까지 학생의 학습태도나 학습능력을 바탕으로 이 후의 발전가능성을 점치는 것이야 이제 거의 ‘여반장(如反掌 : 손바닥을 뒤집듯이 쉬움)’의 수준에 올라왔지만 곧 다가올 질풍노도의 시기를 관통하며 본인의 재능을 오롯이 공부에만 투자할수 있을는지는 아직 미지수이기 때문입니다. 전적으로 학생의 기본적 성향에 달려 있겠지요. 그래서 이 뻔한 질문에 대해 저를 포함한 대부분의 선생님들 또한 뻔한 대답을 합니다. 대동소이 하지요.
“지금까지는 잘 해왔지만 앞으로의 노력여부에 달려 있을것 같습니다.”
많이들 들어보신 문장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만약 같은 질문에 대해 다른 대답을 들어본 적이 있으시다면.. 자녀가 클라스에서 몇 손가락안에 드는 우등생이거나 아니면 더 많은 관심이 필요한 ‘못다 핀 꽃 한송이’라고 생각하셔도 무방할 듯 합니다.
학생 어머님의 질문에 대해 저도 위와 똑같은 대답을 할 수 밖에는 없었습니다. 네.. 지금까지는 매우 훌륭하게 잘 해 왔습니다만 내년부터 어떤 자세로 공부하는가에 따라 결과가 달라질 가능성도 있겠습니다... 참으로 무책임한 대답이 아닐수 없습니다. 지금까지 잘 해 온것이야 학교에서 받아온 성적표가 증명하고 있으니 온 천하가 다 아는 사실이고, 재기발랄한 십대 아이가 어느정도 근신하며 공부하는가에 따라 성적이 천차만별이 될 수 있다는 것 또한 세상 누구나 다 아는 당연한 사실이니... 이런 말을 ‘예상’이랍시고 주고 받는 것은 말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이나 참 하릴없기 매 한가지입니다. 역술가를 찾은 손님이 자신의 지나온 삶보다는 앞으로 다가올 삶에 대해 더 궁금해 하는 것처럼 저를 찾은 학생 어머님 또한 잘 해온 지난 시간들 보다는 잘 해나가야 할 앞으로의 시간에 더 관심이 많으실 것은 자명한 일일텐데.. 그 애타는 궁금증에 속 시원한 대답을 할 수가 없으니 말하는 사람도 답답할 뿐입니다. 하지만 어쩌겠습니까. 저는 역술가가 아닌것을요.
하지만 역술가가 아닌 교육자로서 학생과 학부모님께 도움을 드릴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무슨 무슨 보살님이나 도사님처럼 ‘올해는 삼재의 마지막이니 큰 기대를 하지마시고 내년 중반 이후에 공부 운이 트이니 그 시점을 노려서 학생에게 왕창 투자를 하시라’라고 조언을 할 수는 없지만 그 동안의 경험이나 각각의 학제가 가지고 있는 특징, 최근의 과정운영 동향과 COVID와 연관된 정책 등등을 적용해 ‘학습플랜’을 제공할 수는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 만사에는 진행‘과정’이라는 것이 존재 합니다. 세상의 그 어떤일도 시작하자마자 그 종말이 도래하거나 첫 페이지를 넘기자마자 마지막 페이지가 나타나지는 않습니다. 일단 밥 숟가락을 들고난 후엔 맛있게 먹어야만 빈 그릇을 볼 수 있는 법이고, 출발신호에 맞춰 달리기를 시작했다면 땀나게 팔다리를 움직인 연후에야 결승선을 통과할수 있는 법 입니다. 과정이 없는 결과는 존재할 수 없고 따라서 결과의 가치는 과정의 가치과 상이할 수 없습니다. 학생들의 공부도 마찬가지 입니다. 학부모님들이나 심지어는 학생 당사자까지도 한 해를 마무리 할 시점에 얻게 될 ‘결과’에만 관심을 가지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하지만 그 결과라는 것이 일년의 학습시간을 통해 빚어지고 조각된 ‘과정’의 끝단일 뿐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되겠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의 중요성 때문에 저를 비롯한 여러 선생님들이 제공하는 학습플랜이 가치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플랜, 계획이라는 것은 ‘상황’과 ‘시점’과 ‘행동’이 융합된 삼각 함수와도 같습니다.
‘어느 시점에서 어떠한 상황이 발생한다면 이러이러한 행동을 취해야 하겠다’는 것이 플랜의 기본 구도입니다. 이러한 기본적인 형식은 사업에도 적용되고 운동에도 적용되고 전투에도 적용되고 공부에도 당연히 적용됩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공부에 관련된 학습플랜만이 유독 특이하게도 ‘시점’에 대해 상당히 민감하다는 사실입니다. 다른 활동에 대한 플랜은 ‘상황’에 대해 민감한 경우가 대부분인데 말이지요.
이러한 특성은 학교교육이라는 것이 매년 거의 동일한 과정을 되풀이하기에 뭔가 특별한 상황이 튀어나올 가능성이 적고 (Covid같은 경우도 있었습니다만..) 학생에게 요구되는 행동 또한 주식을 매수할 지 매도할지 결정한다거나 적의 공항을 폭파할 경우의 득과 실을 비교한다거나 하는 선택이 아니라 그저 주어진 공부를 열심히 한다는 ‘답정너 (답은 정해져 있으니 너는 공부만 해)’ 이기에 발현되는듯 합니다. 그래서 상대적으로 ‘시점’이 플랜을 세우는데 민감한 요소로 작용하게되는 것이 아닐까 싶군요.
간혹 공부에 있어서 시점의 중요성을 간과하는 분들을 만날때가 있습니다. 제가 만나봤자 다 학부모님들이시니까 뭐 그 분들 중의 몇몇분들이시겠습니다만... 그분들의 말씀은 이렇습니다. 때가되면 학년이 올라가고 때가되면 시험을 치르고 때가되면 졸업을 하는건데 그 일관적이고 정확하게 정해진 학창시절을 살면서 별도의 시간계획이 필요할 이유가 무엇이냐 하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야기해야 하고 또 세워야 할 플랜은 학생 개인의 공부에 관계된 플랜입니다. 교육과정의 운영원칙에 따라 흘러가는 학교생활을 통해 최선이자 최고의 결과를 도출하기 위해서 학생 개인이 실천해야 하는 플랜을 이야기하는 것이지요. 자신의 목표와 능력에 맞추어 디자인 된 학습플랜을 가진 학생은 그렇지 않은 학생에 비해 훨씬 안정된 성적을 유지할 수 있고 학습의 효율성과 능률 또한 크게 향상시킬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앞서 말씀드렸던 적절한 시점에서 찾을수 있는데요. 학습과정에 따라 약간의 차이는 있습니다만 대부분 어느정도의 선행학습이 유효적절한 학습시점과 일맥 상통하기 마련입니다.
선행학습.. 선행학습.. 참 많이도 들어보셨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만큼 크게 혼쭐이 난 분들도 계실겁니다. 선행학습에 대해 부정적인 의견을 가지신 분들은 대부분 한국식의 선행학습, 그러니까 초등학생이 미적분을 배우는 그런 과정을 전제로 말씀하시곤 합니다. 하지만 제가 말씀드리는 선행학습은 조금 장기화된 예습과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제가 비록 사교육에 종사하고는 있습니다만 학부모의 한사람으로서 과도한 선행학습은 절대적으로 반대하는 입장이니 그 점은 믿어주셔도 좋을듯 합니다. 학습에 있어서 예습의 중요성은 이미 주지의 사실입니다.
지금까지 학습법에 관련된 글을 통해, 또 훌륭한 결과를 이루어 낸 학생들의 사례들을 통해 누누히 말씀드렸던 것이 예습의 중요성이니 동의는 안하신다 하더라도 익히 들어보시기는 하셨을 겁니다. 이 예습을 조금 더 이른시간에 시작하는 것이 바로 선행학습 입니다. 최고 1년정도 앞서서 공부할 수 있는데 제 경험상 가장 적절한 선행기간은 2term에서 1년정도 인듯 합니다. 2term보다 짧은 시간을 앞서 나가는 것은 실효성이 극히 적고.. 그러니까 하나마나라는 것이구요. 1년보다 긴 시간을 앞서서 선행으로 수업하는 것은 학생이 자신의 지식을 활용할 시점이 되었을 때 많은 부분을 망각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저 언젠가 들어보았다.. 정도만 기억하고 있을 뿐이지요. 그래서 학생의 학습과정에 따라, 가슴에 품은 목표에 따라, 현재의 지식량에 따라 적절한 시점에 적절한 학습과제를 결합시킨 학습플랜이 중요해 지는 겁니다.
한 가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처음에 말씀드렸던 Y10 (2021년 기준) 학생의 사례입니다.
이 학생은 아직까지 특별한 학습과정을 선택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리고 3년의 시니어 공부를 마친 뒤 호주의 대학교에서 생물학과 공학이 혼합된 전공을 공부하고자 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유럽권의 다른 대학교들도 고려대상에 포함되어 있지요. 현재 성적은 매우 좋은 편이어서 이대로만 간다면 상당히 높은 졸업점수를 받을수 있을듯 합니다. 하지만 폭풍같은 사춘기를 지나갈 가능성이 농후해서 장담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성품이 진중한 면이 있고 지기 싫어하는 성향이 강해서 딴짓할 시간을 안 주는 것이 스트레스를 더하기보다는 오히려 순기능으로 작용할 수 있을듯 합니다.
이 학생의 학습플랜으로 제가 어머님께 제시했던 것은 우선 교육과정으로 IB를 선택하시라는 것이었습니다. NCEA과정의 수준이 매년 상향조정되고 있고 세계적인 인지도도 점점 올라가고 있습니다만 세계 3대 공인과정 중의 하나인 IB의 그것에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만약 호주만을 목표로 한다면 한결 손쉬운 NCEA를 공부하며 여분의 시간을 다른 방면으로 활용하는 것도 가능하겠지만 유럽 대학들까지 고려하는 입장이라면 IB가 해법일 수 밖에는 없습니다.
이렇게 진학 목표에 따라 과정이 정해지면 이제부터 무엇을 언제 공부해야 하는가 하는 ‘시점’과 ‘때’에 대한 부분을 정해주어야 합니다. 우선 IB과정의 Syllabus가 예전에 비해 살짝 쉬워진 경향이 있으니 영혼을 갈아넣는 수준의 스케쥴은 필요치 않을듯 합니다. 다만 IB 6개 수강과목을 미리 결정해야 합니다. Y11 을 공부하며 변동이 생길 가능성도 있겠지만 절대로 변화시킬 수 없는 과목들이 영어, 수학, 물리, 생물 입니다. 희망 전공에 따라 선택을 해 주어야 하니까요. 짧은 지면에 모든 것을 세세히 말씀드릴수는 없지만 각 과목마다 Standard level과 Higher level이 있으니 지원하고자 하는 전공의 특성에 맞추어 배분해야 하고 Extended Essay 를 쓸 과목은 Higher level로 수강해야 합니다. 더구나 언어영역은 교과내용에 따라 A와 B로 나뉘어져 선택지가 4개나 되므로 많은 고민이 필요할 수 있습니다.
이제 개인 공부의 스케쥴을 잡을 차례입니다. Y12에서부터 IB를 시작하지만 Y11말까지는 상대적으로 낮은 수준의 NCEA를 공부해야 하기 때문에 Y11과 Y12사이의 수준차이가 큽니다. 내용면으로 거의 2년에 해당하는 격차가 생기니까요. 당연히 이 격차를 줄이기 위한 선행학습이 진행되어야 합니다. 학교에 따라서는 Y11의 수준을 많이 높여서 뒤 이어 다가 올 IB과정을 대비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 학생의 사례에서는 그런 학교측의 배려가 없으므로 상당히 긴 시간을 선행수업에 할애해야 할듯 합니다.
학생이 IB를 시작하는 시점까지 IB 1년차의 3terms 에 해당하는 분량을 마치는 것이 상례이기 때문에 그 정도의 수준향상을 위해서는 좀 긴 시간이 필요한 것이지요. 굳이 3 terms에 해당하는 분량을 선행학습의 범위로 주장하는 것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습니다. IB 스케쥴상 1년차 Term 4부터 Internal assessment 에 들어간다는 것이 그 이유입니다. 매우 심란하고 정신없는 시기가 도래하는 것이지요. 그 시기를 무리없이 넘기기 위해서는 그 이전부터 각 과목의 IA에 대해 세심한 준비를 해야 하고 학기중에 IA에 대한 준비를 천천히 진행하면서 동시에 성적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미리 공부를 해 놓을 필요가 있는 것 입니다. 하지만 플랜은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IB선행을 시작하기 위해서는 또 그에 걸맞는 바탕지식이 필요합니다. NCEA기준으로 Y12수준 정도 되는데요. 결국 이 학생은 이제 겨우 Y10을 마친 시점에서 약 1년여의 시간동안 NCEA Y11, NCEA Y12, IB 1년차의 분량을 공부해내야만 하는 입장이 되었습니다.
그것도 납득할만한 성적으로 말이지요. 아이는 이제 자신의 청소년기 중 가장 힘들만한 ‘때’에 다다라 있는 겁니다. 다행히 제가 가르치는 과학과목에서는 Y10과 Y11의 내용이 크게 차이나지 않기 때문에 Y11 학교수업은 학생 스스로 헤쳐나기기로 하고 2022년 1월부터 6월까지 NCEA Y12과정을 공부하고, 7월부터 IB선행을 시작해 연말 시험기간을 제외한 6개월동안 IB 1년차 2terms에 해당하는 분량을 공부하기로 했습니다. 시간상 도저히 3terms의 분량을 마칠수는 없었지만 이 정도의 플랜만 잘 완수된다해도 학생의 IB고득점은 가능하리라 생각이 되었습니다.
공부에는 다 ‘때’가 있다.. 라고 흔히들 말씀하십니다.
주로 머리 팽팽 잘 돌아가는 젊은시절에 허랑방탕하게 살지말고 시간을 아껴가며 공부에 매진해라 하는 어르신들의 충고로 접하곤 합니다. 그렇습니다. 모든것에 때가 있듯이 공부에도 당연히 때가 있습니다. 다만 제가 생각하는 그 ‘때’의 의미는 젊은 시절을 통칭하는 길고 긴 시간이 아니라 어떠한 학습을 시작해야만 하는 시점적 한계를 뜻합니다. ‘연말시험을 준비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3개월전부터는 목 매달고 달려야한다’ 라고 말할때의 ‘3개월전’이 제가 생각하고 경험하고 주장하는 ‘때’입니다.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2021년이 지나고 이제 2022년을 맞이하며 이제 책상앞에 돌아와 앉아야 할 우리의 아이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지금은 우리가 계획해야 할 때이고, 지금은 우리가 고민해야 할 때이고, 지금은 우리가 노력해야 할 때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지금 이 순간의 정확한 플랜을 따라 공부해 나간다면 어느 한 때, 그 때가 이르렀을때 반드시 그에 걸맞는 결실을 거두게 될 것입니다.
때가 이르매 거둘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