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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종일 정신없이 일을 해 냈으니 몸이 젖은 솜뭉치처럼 무거웠다. 오랫동안 쓰지않던 근육들이 놀랐는지 뻐근하고 아팠다.
여름날 긴 긴 하루가 번개처럼 지나갔다.
긴장이 풀렸는지 지친몸이 맥없이 침대로 쓸어졌다. 금방 잠들것처럼 눈꺼풀이 내려 앉았는데 어쩐 일인지 잠이 오지 않았다. 마무리 되지않은 일들이 머리속에서 어지러웠다. 법석을 떨었지만 사실은 새롭게 벌어진 일부 급한 불만 끈 셈이었다. 원점으로 돌아가려면 뒷처리에 얼마나 시간이 걸릴지 의문이었다. 내가 나서서 될 일이 아니고 남의 손을 빌려야하니 대책없이 걱정만 하는 것이다.
헝크러진 생각들로 잠들기는 영 틀려버린 것 같다. 어차피 잠못드는 밤. 뒤척이다보면 여기저기 아픈데만 생겨서 괴로워진다.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신문지들을 있는대로 모아다가 침대밑 바닥에 고루 펼쳐놓았다. 흥건하게 고인 물을 밤새 조금이라도 흡수해 줄 것이라는 바램이었다.
내친김에 깊이 두었던 노트와 필기구를 챙겨들고 침대위로 다시 올랐다. 오늘의 특별한 일들을 적어보기로 작정하고 웅크려 앉았다.
오랫만에 글씨를 써 보려니 손이 떨려서 글씨가 엉망이었다. 컴퓨터 쓴 지가 얼마나 되었다고 이 지경이 됐는지, 긴 세월 써 온 손글씨를 잊어가는 것 같아 안타까웠다. 나이 들어가는 탓도 분명할텐데 인정하고 싶지 않은 건 무슨 배짱인지... 편리함에 길들여진 컴퓨터 탓을 하는건 잘못된 판단임을 잘 안다. 당장 그걸 쓰지 못하는 아쉬움 때문에 투정을 하는 것이 뻔했다.
불편한 심기가 스스로도 느껴지고 한없이 속이 좁아지는 순간이었다.
아침을 먹고 설거지를 하기도 전에 그 사람은 왔다.
보일러에 무슨 문제가 생겼는지 이 삼일 전 부터 더운물이 나오지 않았다. 바로 어제 신고를 해 둔터라 고치러 나온 사람이었다. 불편해 갈급했던 맘이 누그러져 왔다. 그 사람 수고가 끝나면 당연히 엄지 손가락을 들어올리며“굿”하고 당당하게 돌아갈 것 이었다.
그런데 무슨 일일까? 핸드폰에 찍은 사진 한 컷을 내게 내밀었다. 방금 점검하고 찍은 것으로 보였지만 문외한인 내가 뭘 알겠는가. 씽 하고 돌아가면서 했던 풀룸방 어쩌고 하는 말을 설핏 들은것 같았다. 누군가가 다시 오겠다니 서둘러 설거지를 마쳤다. 수돗물을 잠그고 손을 닦는데 계속해서 물소리가 났다.
이상한 생각이 들어 여기저기를 둘러봤지만 아무렇지 않았다. 그런데도 멈추지 않는 소리에 갑자기 불안 해졌다.
방으로 가려고 몸을 돌리는 순간. 세상에! 이게 대체 무슨일인가?....
스멀스멀 무언가가 방 안에서 거실쪽으로 기어나오고 있었다. 마치 바닷물이 모래톱을 핥으며 올라오는 형상이었다. 천정에서 굵은 물줄기가 폭포처럼 쏟아져 흘러 나오는 것이었다. 지붕위에 물폭탄이라도 맞은것 같았다. 앞뒤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욕실로 뛰어들어가 급한대로 대야를 갖다가 바쳐 놓았다. 그건 어림도 없는 일에 불과했다. 순식간에 차고 넘치는 대야의 물을 화장실 변기에 쏟아부었다. 머리를 한대 쎄게 맞은 것처럼 생각이 정지 되었는지, 갑자기 큰 그릇이 생각나지 않았다. 마음은 바쁘고 허둥대기만 했다. 한참 후에 쓸일없어 처박아 두었던 바케츠가 생각나 그걸 정신없이 끄집어 냈다. 그런게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숨돌릴 틈도 없이 대야와 바케츠를 교대로 물을 받아 날랐다. 누구 도와달라고 부를 수도 없었다. 그야말로 개미 쳇바퀴 돌듯 정신없이 뱅뱅이를 쳤다. 방바닥은 이미 물바다로 흥건하고 젖은 발은 미끄러웠다. 질펀해진 화장실에서 몇번이나 넘어질 뻔도 했다. 급할수록 침착하라는 말이 떠올랐다. 바로 이런 때 쓰는거라고 자신을 타이르며 조심을 했다.
그렇다고 속도를 늦출 수는 없었다. 넘쳐 흘러버리면 집 안이 온통 물천지가 될텐데... 그냥 바라만 보고 있을 수가 없었다. 옷이 다 젖어서 몸에 감겨왔다. 항상 바지를 입던 내가 오늘따라 긴 치마를 입고 있었으니 다리에 치덕어려 걸음걸이를 방해했다. 그러나 어쩌리...
기운없이 늘 빌빌대던 늙은이가 어디서 그런 힘이 생겼는지 지치지도 않는게 이상했다.
끝날줄 모르고 하염없이 쏟아지는 물줄기. 보일러 통이 다 비워질 때까지일까? 드디어 머리가 띵하고 어지러워졌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건장하게 시커먼 남자가 방 문 앞까지 와서 우뚝 서 있는걸 알았다. 눈이 마주치자.
“오 마이 갓!”
나보다 더 많이 놀랐는지 첫 마디가 그랬다. 그는 하얗게 ‘풀룸방 월드’라고 찍힌 검은 티셧츠를 입고 있었다. 고치러 온 사람이었다. 물줄기가 약간 가늘어진 것 같아 한숨 돌리는 즈음이었다.
어차피 현재로선 손댈 형편이 아닌 모양이었다. 물이 그치기만을 그도 같이 기다렸다.
보일러 통에 채워졌던 물이 다 비워지고 나중엔 수돗물이 나오는 모양이었다. 수도꼭지 물처럼 졸졸졸 끊김이 없었다. 그는 그제서야 손을 쓰려는지 슬며시 사라졌다. 잠시후 드디어 물줄기는 멎었다. 초가지붕에 낙숫물같은 물방울들이 가늘게 굴러 떨어지기를 반복했다.
허리를 펴고 시간을 보니 한시간 반 동안의 난리였다. 친구들과 어울려 수다 떨 때는 순식간 지나가는 시간이었다. 고행의 시간은 수시간처럼 아득하게 길고 지루했다. 그리고 힘들었다.
다 끝난 것은 물론 아니었다. 개울 바닥처럼 흥건해진 방바닥 카펫위에 마른 타월들을 깔았다. 흠씬 물먹은 타월을 짜내느라 또 분주했다. 개울물을 숟가락으로 퍼올리는 꼴 처럼 아둔한 작업이었지만 방법이 없었다. 벌써 돌아간 줄 알았던 남자가 안쓰러웠는지 그냥 두라고 한마디 했다. 카펫청소를 부탁해 주겠다고 하며 돌아갔다. 고마운 말에 잠시 쉬는척 했지만 그가 돌아간 다음 더 열심히 짜냈다. 손바닥이 얼얼하고 아팠다. 세상에 쉬운 일이란 없었다.
미친듯 서둘러 막아내려 애썼는데도 침대 밑으로 가구들 밑으로 점점 젖은 범위가 넓어져갔다.
카펫 클리너가 오긴 했지만 손도 못쓰고 돌아갔다. 물길이 갈라져 유리창밖 지붕으로도 흘러 쏟아졌다. 그러다보니 방 천정도 무사하지 않았다. 볼록볼록한 물주머니들이 생겨나 있었다. 그는 그것을 보며 아직도 물이 새고 있는것 같다고 말했다. 그걸 먼저 고칠 사람을 보내겠다고 하며 돌아갔다.
워낙 일이 급한지라 연신 사람들이 오기는 와 줬다. 그러나 결국 그 사람도 천정 사진만 찍더니 대책없이 돌아가고 말았다. 일이 의외로 커지는 것 같아 겁이나기 시작했다. 갈수록 태산이라더니 이게 무슨 일인지 궁금증만 더 해 갔다.
쉬지않고 해 낸 일의 성과가 그래도 조금씩 드러나는 것 같았다. 물기가 적어지는 것에 재미같은게 느껴지기도 했다. 참으로 웃음 나오는 사람의 심리였다.
그제서야 젖은 옷의 불쾌감이 느껴졌다. 살에 찰싹붙은 옷을 벗어 세탁기에 집어넣고 마른 것으로 갈아 입었다. 맨발은 퉁퉁 불어 있었다.
어느덧 긴 하루 해가 서산으로 기울어 가고 있었다. 이제 누구도 돌봐줄 사람이 와 줄리 없다. 푹 젖은 카펫의 신세처럼 내 마음도 그냥 젖은채 밤을 맞아야 했다.
오늘은 금요일. 주말 이틀간을 이대로 방치하고 살아야 했다. 기분이 가볍지 않았다.
문득 주변을 둘러보았다. 물폭탄을 맞은 방 안에서 편하게 누울수 있는 침대가 무사하니 얼마나 다행인가. 소스라쳐 놀랐다. 가구들이며 방 안의 모든 것들이 다 멀쩡하게 변한게 없었다. 감사합니다. 가벼운 전율이 느껴졌다.
마치 빈 자리를 골라서 물이 쏟아진 것처럼 그랬다. 불행중에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감사하다는 말이 연신 나오고 있었다.
만약에 침대위나 가구들 위로 물이 쏟아져 내렸다면 어찌 했을까? 생각만 해도 아찔했다.
생각을 거듭하니 또 있었다. 집이 비워져 있을 때, 혹은 밤 에 잠 자다가 이런 변을 당했다면?... 아수라장 그림이 그려져 몸서리가 쳐졌다.
진심으로 감사하고 또 감사했다. 불안하던 심기가 차분히 갈아앉기 시작했다. 모든 생각이 긍정하는 쪽으로 기울어가니 편안해 졌다.
밭에 야채 심은 사람들은 요즘 너무 가물다고 비를 기다린다. 당분간 이글거리는 불볕과 더운 바람을 나는 더 기쁘게 받아들일 것이다. 빠른 속도로 오늘 일을 마무리 해 줄 것이기 때문이다. 해 짧고 축축한 겨울이 아니어서 또 고마웠다.
수영장에 나타나면 늘 말이 많던 오스트리안 프레드가 생각났다. 보일러가 터져서 카펫 말리고 집안 말리느라 열흘이나 꼼짝 못하고 고생 했다며 이맛살을 찌프렸다.
얼마나 힘들었는지 아느냐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던 오십대 젊은이었다. 그 때는 남의 일이라 고충을 알아주기보다는 그의 엄살이 우습기만 했었다. 심각했던 고생에 위로의 말 한마디도 못 해준게 많이 미안했다. 이제서야 그걸 깨닫는다.
앞으로 얼마나 시간이 지나야 원상으로 회복 될지는 모르겠다. 프레드 말처럼 열흘만 꾹 참고 기다리자.
우리 어렵게 살았던 지나간 시절, 장마철마다 비가 새는 집들이 꽤나 있었다. 물통에 양동이같은 그릇들을 좁은 방안에 그득히 늘어놓고 빗물을 받아냈다. 철마다 행사처럼 그 짓을 하며 살았던 사람들은 어떻게 그 고충을 견디며 살았을까? 별 생각이 다 들었다.
안양천변에 흘러넘치던 시뻘건 진흙탕 물, 홍수에 집이 떠내려 가고 침수에 가재도구를 버리고 쫄딱 망하는 사람들도 보았다.
불보다 물이 더 무서운 위력을 가졌다는 걸 우리는 영상으로 자주 보기도 한다.
바로 며칠전 남태평양 통가(Tonga)의 해저 지진으로 쓰나미가 우려된다는 보도가 있었던 것도 기억에서 되살아났다.
음력으로 보름께인지 커텐 사이로 달빛이 환하게 비쳐들고 있다.
단 하루, 반복되던 평범한 날을 잃고 지냈다. 벌써부터 아쉽고 그리워지려 하는 혼자만의 밤이다. 심심하다고 투덜댔던 일상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새삼스럽다.
새해 벽두부터 물 세례를 받고나니 깨달음이 참 많기도 하다.
그동안 너무 안일하고 편하게만 지냈으니 혼 좀 나보라고 벌이 내린 것 같아 씁쓸한 웃음이 나왔다.
아마도 게으른 영혼을 흔들어 깨워주는 메시지가 아닐는지.... 정신 차리고 더 열심히 살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