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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 민자
까진 무릎에 갈라진 구두를 신고, 털가죽이 벗겨진 엉덩이로 고고하게 걸어가는, ‘머리는 말 같고 눈은 양 같고 꼬리는 소 같고 걸음걸이는 학 같은’ 동물. 낙타는, 사슴이 빌려간 뿔을 기다리는 짐승이라는 시를 어디선가 읽은 기억이 있다. 그럴법하다. 그렇듯 높고 쓸쓸한 면류관은 동물계의 성자인 낙타의 것이어야 마땅할 테니.
다른 동물들이 일제히 초원을 향해 뛸 때, 낙타는 등을 돌려 버려진 땅을 택했다. 약육강식이 생존의 문법인 세상, 힘의 논리로 평정되는 사바나가 싫었다. 사바나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저보다 힘센 포식자가 아닌 저보다 빠른 동료들과 경쟁을 해야 한다. 동료 하나를 희생시켜 가까스로 누리는 위태로운 평화, 풀잎에선 늘 피 냄새가 났다. 싸움이 싫고 싸울 줄 모르는 자들은 타자와의 경쟁보다 자신과의 대결을 택한다. 응원도 함성도 갈채도 없는 전투. 어떤 타자보다 더 큰 강적이 자신임을 알지만 그들은 기꺼이 그 길을 간다.
정착과 안주를 허하지 않는 땅, 산을 움직이고 풍경을 삼키는 모래폭풍 속을 낙타는 무심히 앞만 보며 걷는다. 금수의 왕 호랑이도, 달리기의 명수인 치타도 넘보지 못하는 땅. 사막에서는 낙타가 왕이다. 자신을 이기는 자가 세상을 이길 뿐, 영역다툼도 서열다툼도 없다. 눈을 뜨고 감듯 콧구멍을 여닫고 두 겹의 속눈썹으로 모래먼지를 털어내며 생명의 숨소리를 거부하는 광야를 낙타는 천천히 위엄있게 걷는다. 낙타는 말처럼 뛰지 않는다. 촐싹거리거나 두리번거리지 않고, 왁자하게 대오를 흐트러뜨리며 싸움터를 향해 돌진하지도 않는다. 태양과 맞장을 뜨는 위대한 종족답게 스스로의 한계에 도전하며 목적지이기를 사양하는 영토를 영혼의 속도로 가로질러 갈 뿐.
누구도 짐 지우지 않은 존재론적 고통을 걸머지고 고행을 자초하는 선사처럼, 탁타에게도 스스로 장착하는 등짐이 있다. 짐 없는 낙타는 낙타가 아니다. 사나운 바다를 항해하는 배가 든든한 바닥짐으로 평형을 유지하듯, 광활한 모래바다를 운항하는 낙타에게도 속도에 흔들리지 않고 삶의 보폭을 조절해주는 밸런스 추가 필요했을지 모른다. 등줄기에 실하게 쟁여 실은 참을 인(忍)자 한 됫박으로 타는 목젖과 삐걱거리는 관절과 쓰라린 눈자위를 어르고 달래며, 낙타는 사막에서 삶을 통찰한다. 참아라. 견뎌라. 인내의 끝이 세상의 끝이다.
낙타가 그 많은 동물들 중에 오직 인간만을 태워주기로 한 것은 자기보다 불쌍한 짐승이 인간이라는 사실을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사나운 뿔도 날카로운 이빨도 없이, 힘 센 앞발도 탐스런 갈기도 없이, 약은 잔꾀 하나로 왕 노릇하다가 욕망의 늪에 빠져죽고 마는, 천하의 어리석고 미련스러운 천둥벌거숭이들을 묵언설법으로 제도하기 위해, 겸허하게 무릎을 꿇고 견디는 것. 갈증도 그리움도 시간의 상처도 삭히고 삼키고 견뎌야 하는 것이다. 타자의 죄를 지고 가는 늙은 성자처럼 저보다 더 고단한 중생 하나 잔등 위에 앉히고 낙타는 초연하게 걸어 들어간다. 아득한 비현실의 현실 속으로.
■ 최 민자
서울대학교 가정대학 졸업
에세이문학 등단(1988), 현대수필문학상(2003), 구름카페문학상 수상(2008), 펜 문학상, 윤오영수필문학상 및 ‘에세이 문학사’와 ‘에세이스트’의 ‘올해의 작품상’ 등 다수 수상하였음
수필집 <손바닥 수필> <꼬리를 꿈꾸다> <흰꽃 향기> 수필선집 <낙타 이야기> <열정과 냉정사이> 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