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칼럼 | 지난칼럼 |
■ 백 승종
백석은 자신이 태어난 마을의 자연과 인간을 소재로 시를 썼습니다. 마을에 전하는 민속 또는 민간신앙 등을 고향의 구수한 사투리 즉, 토착어(土着語)를 사용해 시로 표현했죠. 식민지 조선 사람들의 소박한 생활과 철학을 시로 형상화한 것입니다.
왜 그는 하필 사투리를 사용한 것일까요? 백석은 1930년대의 특수상황을 시단의 입장에서든, 자신의 개인적인 사정에서든 또는 당대의 정치적 현실로 보든, 문화적 정체성이 위기에 처한 것으로 보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 그는 새로운 영역을 개척해야 될 의무감을 느꼈다고 생각됩니다. 그의 모더니즘 선배들보다는 상황이 훨씬 절박했던 것입니다.
백석이 들고 나온 무기는 사투리였어요. 표준적이고 세련된 한국어가 아니라 자기에게 아주 밀착되어 있는 평안도 정주의 방언이었어요. 평안도 정주의 방언이라는 것이 정주 사람이 아닌 대다수의 한국 사람들에게는 어떤 것이었겠습니까. 매우 낯설고 기괴하고 거칠고, 그런 것들이죠.
그 사투리를 그는 한국 전통문화의 원초적 모습을 묘사했습니다. 백석의 평안도 사투리 사랑은, 한국문화의 원초 나아가 한국인의 원초적 생명에 대한 탐구였습니다. 제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백석이라고 하는 탁월한 지식인의 내적 불안감이 그렇게 표출되었다는 점입니다. 식민지가 그에게 선사한 불안이 문제였다는 것입니다.
‘전시총동원체제’라는 말도 있듯, 조선의 문화라는 것이 만약 하나의 등불이라면, 그 등불이 하루하루 꺼져가는 것을 체험하면서 백석은 불안에 빠져 들었지요. 일본유학을 마치고 온 백석이라서, 서양말도 한 가지가 아니라 여러 가지를 이해할 수 있는 백석이라서, 사라져 가고 있는 한국의 문화적 전통과 정체성의 말살을 더욱 심각하게 고민했을 것입니다.
백석의 문화적 위기감은 1930년대 문단의 공통된 현안이기도 했습니다. 그러했기에 백석의 사슴이라는 시집이 나왔을 적에 많은 시단의 선배들이 한마디씩 평가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소설가 이효석은 “잃었던 고향을 다시 찾았다”, 이 시집을 통해 조선의 목가적인 아름다움이 되살아났다고 칭찬했습니다. (이효석,「영서의 기억」, 조광, 1936. 11; 조영복, 1920년대 초기 시의 이념과 미학, 소명출판, 2004, 333쪽.)
또 박용철이라는 탁월한 시인은, “야생적이고 초생적인” “모어의 위대한 힘을 느끼게” 하는 시집이라고 찬사를 바쳤어요. (박용철,「시집 사슴평」, 조광, 1936. 4; 조영복 같은 책, 334쪽.) 마찬가지로 모더니스트 김기림도 백석의 시집을 매우 칭찬했습니다.
그러나 아주 혹독하게 백석을 비판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오장환이었습니다. 그는 백석의 시는 단순한 기교 혹은 변형된 모더니티의 하나로서 삶의 진실을 드러내지 못한다고 비판하였습니다.(오장환,「백석론」,『풍림』, 1937년 4월; 조용복, 같은 책, 333쪽.)
카프 계열의 시인 임화도 강도 높게 비판했어요. 그 이유는 정주의 말인 “야릇한 방언” (임화,「문학상의 지방주의」, 조광, 1936, 10; 조영복, 같은 책, 334쪽.)의 사용은 지방주의로 흐른 것이고, 백석의 이러한 지방주의는 결국 조선 문화의 식민지성을 드러냄으로써 예술적 보편성을 포기했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요, 임화는 칭찬도 빠뜨리지 않았어요. 백석이 방언을 통해 민족적 과거에 대한 강한 애착을 보인 것은 평가할 만하다고 하였습니다.
백석의 시에 관해서는 훗날에도 여러 가지 평가들이 나왔어요. 유종호는 백석의 시가 한국적 정감을 표현한 점에서는 좋지만 비관주의에 휩싸였다고 봤고요.
또 김현은 백석이 너무 식생활에만 관심을 쏟은 것 같다고 애기했어요. 과연 백석의 시에는 냉면도 등장하고 돼지고기도 등장하고 아무튼 먹을 것이 많이 나오니까요.
김종철은 백석의 눈높이가 어린아이의 것이며 그것은 결국 존재의 근원을 탐구해 가는 과정이라고 평했죠.(지금까지 소개한 이러한 평가는 1960-70년대 평론가들의 논저에서 발췌한 것이지요. 이러한 연구결과는 이숭원의『백석시의 심층적 탐구』, 태학사, 2006, 90쪽에 소개되어 있습니다.)
그밖에 조영복은 백석 등이 보여준 지방어, 토속어는 소재의 차원이 아니라 “조선적인 것을 제거하고자 하는 ‘현실’이라는 씨니피앙에 끈질기게 달라붙어서 ‘현실’이라는 권력적 속성들을 탈주해 버리는 정치적인 행위라고 주장합니다. (조영복, 같은 책, 337쪽.)
여기서 일일이 다 이야기할 수는 없지만 백석의 시에 대해서는 참 여러 가지 평가가 있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요약하면, 두 가지로 정리됩니다. 한편으로는 그것이 민족적 정서를 되살리는 아름다운 시라고 하는 칭찬이 있었는가 하면, 다른 한편에서는 조금 기괴하다, 또는 너무 지방주의로 흘러서 한국적 정체성을 분해해 버리는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 아니냐는 비판이었지요.
역사가로서 저는 백석의 시가 식민지적 불안을 표현했다는 점을 높이 평가하고 싶습니다. 그것은 문화적 정체성의 위기를 철저히 인식하고 그것을 어떻게든 지키려한 시인의 애절한 노력이었거든요. 안타깝게도, 문학평론 하시는 분들은 저와 의견이 많이 다른 듯합니다. 그들은 대체로 백석의 문화의식 또는 역사의식이 생각보다는 별로 투철하지 않다는 지적을 많이 합니다. 그 시기는 한국문화 전반이 위기에 휩싸였던 시기고 총독부의 탄압이 매우 심했던 시기라서 시인이 설사 민족의 비극을 노래했다 하더라도, 그렇게까지 자신의 역사의식, 또는 문화의식을 철저하게 심화, 발전시킬 수 있는 기회는 없었던 것 아니냐, 하는 주장입니다.
그러나 저는 그렇게 단정하기 어렵다고 봅니다. 제 부족한 생각입니다만, 문학연구자들이 시대상황을 제대로 읽지 못한 것 같아요.
백석이 설사 민족의 문제, 한국문화의 문제를 심층적, 체계적으로 묘사할 수는 없었다 하더라도, 한글 자체가 탄압의 대상이 되고, 징용이 일상의 풍경이던 참담했던 시기였거든요. 그때 백석만큼 진한 토속적 표현을 시도했다는 것은 실로 대단한 용기였다고 평가해야 마땅합니다.
그가 입 냄새 나는 토속어를 통해 자랑스럽고 훈훈한 과거를 읊었다는 사실은 뭐겠습니까. 이것을 두고 시인의 무력감이라고 비난할 일이 아니죠. 그가 시로 문자화한 것은 그의 의식에 비하면 그야말로 빙산의 일각이었을 텐데요.
실은 백석이 문화적, 역사적 의식이 매우 강한 사람이었다는 점을 입증하는 글귀들이 많습니다. 「목구(木具)」라는 시 한편을 예로 들어 보죠. 그 일부를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내 손자의 손자와 손자와 나의 할아버지와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와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와(....) 수원백씨(水原白氏) 정주백촌(定州白村) 의 힘세고 꿋꿋하나 어질고 정 많은 호랑이 같은 곰 같은 소 같은 피의 비 같은 밤 같은 달 같은 슬픔을 담는 것 아 슬픔을 담는 것(....)” (「목구(木具)」에서)
이 시의 후반부에 보면 그 모든 것들이 결국 마지막에는 ‘아 슬픔을 담는 것’이라고 말한 점에서, 말하자면 극단적인 위기감을 보여준 것 아니겠어요. 소멸의 위기에 빠진 유구한 전통을 목구는 담고 있죠.
그런데 그가 의식하고 있는 전통이라는 것은 정말 대단하지 않았던가 싶어요. “힘세고 꿋꿋하고 어질고 정 많고 곰 같고 소 같고 피의 비 같고 밤 같고 달 같고” 여기에 또 무슨 말을 보태겠습니까. 이 시는 그런 총체적인 전통을 상실하는 슬픔을 노래한 시입니다.
그러면 그 전통의 주체는 누구일까요. 유구한 역사를 이어욘 백석의 가문이겠습니까. 시인은 인용한 시에서 자신들의 정체성을 ‘수원 백씨’, ‘정주 백촌’이라고 말했어요. 그러나 이것은 하나의 인위적인 표현이고, 사실상은 정주 사람 모두가 다 포함되는 것입니다.
그렇잖습니까. 시에서 열거하고 있는 사람들의 범위를 보세요. “내 손자의 손자와 손자와 또 나의 할아버지와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와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와” 이렇게 멀리 나가고 있거든요. 피의 범위를 확대하고 보면 그것은 정주 사람만이 아니라 이 시를 만나게 될 모든 한국 사람들을 다 일컫는 것이죠. 시인은 깊은 슬픔 속에서 우리민족 전체의 위대한 전통을 뚜렷하게 기억하고, 그 회복을 바라는 마음에서 이 시를 썼던 것입니다.
백석에게는 이런 종류의 시가 많은 편입니다. 그런 이유로, 저는 백석의 역사인식, 즉 한국의 역사적 전통과 문화적 정체성에 대한 인식이 대단히 강렬했다고 보고 싶습니다. 일부 문학평론가들이 말하는 것보다는 백석의 시에 실제로 드러난 역사의식이 몇 배나 투철했다고 생각합니다. 1939년경 백석의 시에서 “민족시인으로 부를 수 있는 가능성이 발견된”고 하면서도 강압적 시대의 탓으로 더 이상 발전하지 못하였다는 주장이 있습니다.(이승원의 백석 시의 심층적 탐구, 태학사, 2006, 142쪽을 참조할 것) 하지만 이것은 너무 현상을 피상적으로만 관찰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왜, 백석은 과거로, 고향으로, 지방적인 것으로, 한국적인 것으로 자꾸 되돌아갔던가요. 그의 시는 왜, 근대적인 것, 현대적인 것, 미래적인 것, 과학적인 것, 합리적인 것을 향해서 나아가지 않는가요. 이 부분도 좀 깊이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오랫동안 백석의 시를 연구한 어느 분은 시「목구(木具)」 에 “식민지 시대의 경성의 사이비 근대성에 대한 거부감이 포함” 되어 있다고 추론합니다. (이승원, 백석 시의 심층적 탐구. 태학사, 2006, 84쪽.)
그런 판단에 동의하면서도 저는 한 발짝 더 나아가고 싶어요. 즉, 백석은 자신이 처한 식민지 근대라는 것을 뭉뚱그려 한 마디로, ‘사이비 근대’로 인식했다는 생각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자력으로 개척한 근대의 길이었으면 백석의 판단이 아마 달라졌을 지도 모르겠지만, 식민지의 근대성은 강요된 근대는요, 남에 의해서 이끌린 근대였다는 점에서 백석은 거부감을 가졌어요. 우리의 공감을 살만한 주장입니다.
*출처: 백승종, <<금서, 시대를 읽다. 문화투쟁으로 보는 한국 근현대사>>(산처럼, 2012; 한국출판평론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