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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통 요새 속, 피안(彼岸)의 역사·문화기지
단군의 세 아들이 쌓았다는 삼랑성(三郞城)에 둘러싸인 신화(神話)의 절. 세계문화유산인 조선왕조실록을 지켜낸 역사의 절. 병인양요 때 프랑스 함대의 침략을 막아낸 호국의 절. 돈을 떼먹고 다른 남자와 야반도주한 정인(情人)의 참회를 바라는 마음에 도편수1) 가 대웅보전 지붕 밑에 벌거벗은 여인을 조각해 넣었다는 해학의 절.
역사에 ‘만약’이란 가당찮지만 전등사가 유산으로 남지 않았다면 우리는 얼마나 많은 것을 잃어야 했을까? 고구려 소수림왕(381년)에 창건된 이래 전등사는 한국 최고(最古)의 사찰답게 1,600년 이상의 세월을 품어온 역사와 문화의 기지로 남았다. “다행이다!”
전등사에 찾아갈 때엔 성의 남문을 통하는 것이 좋다. 템플스테이 사무실까지 정비된 산책로가 가경(佳景)이고, 영조 15년(1739)에 건립된 남문의 문루(門樓)- ‘종해루(宗海樓)’를 통과할 때면 역사의 한 자락에 휩쓸리는 기분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일주문과 불이문 없이 지어진 삼랑성 전등사의 정체성을 단번에 체득하는 순간이자, 몽골의 침략을 받아 이곳으로 도읍과 궁궐을 옮겼던 고려의 역사와 조우하는 순간이다.
궁궐도, 성벽과 망루를 지키던 병사도 자취를 감춘지 오래지만, 전등사를 외호(外護)한 삼랑성은 묵묵히 동서남북에 트인 문을 열어 예나 다를 바 없이 차안2)(此岸)의 사람들을 맞이하고 있다.
4곳의 전각, 4색의 개성
전등사 템플스테이는 공식 홈페이지와 네이버를 통해 예약할 수 있다. 뭐든 찾아가는 방법과 사찰의 소개, 템플스테이 프로그램과 주의사항 등을 자상하게 안내하고 있다. 다만 화장실이 방 안에 마련되어 있는지의 여부에 따라 참가비의 차이가 발생하니, 공동 화장실과 공동 세면장 이용에 불편함이 없다면 갈등 없이 예약 버튼을 눌러도 좋겠다.
전등사는 월송요(月松寮), 적묵당(寂黙堂), 강설당(講設堂), 전등각(傳燈閣), 4곳의 전각에 숙소를 마련하고 있다. 매 전각들의 침소가 청결하게 정돈되어 있고, 전등각을 제외하곤 3곳 모두 대웅보전과 공양간 부근에 위치해 접근성이 탁월하다. 동문 밖에 위치한 전등각도 산보하며 오가기에 무리가 없어 어디에 머물든 전등사를 체험하기에 더할 나위 없다.
더욱이 창호(窓戶)를 열어젖혀 선선한 가을을 방내로 들이면, 창호(蒼昊)3)가 그려낸 풍경화를 감상할 수 있다. 항아리, 느티나무, 코스모스, 들풀들……. 방마다 제각각 오브제(objet)를 두었으니, 이토록 다채로운 전시회가 또 어디 있을까? 계절 따라 변하는 작고 느린 차이마저도 감상하게 만드는 것, 전등사 템플스테이의 매력이다.
전등사가 전등사를 전시하는 방법
일말의 눈썰미가 있다면 전등사 곳곳에 허투루 놓은 게 없다는 걸 알게 된다. 큐레이터가 장고(長考) 끝에 작품을 화랑에 걸듯 구석구석 고심의 흔적이 느껴진다.
선불장 지하에 마련된 공양간만 하더라도 곳곳에 걸출한 화가들의 작품들이 손님을 맞이하고 있고, 발우공양을 진행하는 입식 탁자 위 유리창으로 너른 하늘이 내비친다(종루의 목어는 공양간으로 이사해 하늘을 바다 삼아 헤엄치고 있다!). 창가 벤치형 테이블에는 카페처럼 노트북이나 스마트폰을 충전할 수 있게 전원이 마련되어 있다. 들창 너머 상록수 군락을 바라보며 공양이라도 할 때면 테이블 옆에 놓인 판화가 이철수씨의 ‘공양송’ 처럼 ‘온몸 온 마음으로 온 생명을 섬기겠다’는 마음이 절로 동한다
전등사의 세심한 전시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전통과 현대를 절묘하게 접목한 무설전(無說殿)은 가히 역대급이다. 통일신라시대의 건축 문법을 답습하지 않고 시대정신을 담으려 노력했다는 법당 내부에 유럽의 성당에서나 볼법한 프레스코(fresco) 기법의 후불벽화가 모셔져 있고, 흰색으로 통일된 본존불(本尊佛)과 협시불(脇侍佛)4)의 풍모는 새롭다 못해 충격적이다. 지금껏 겪어보지 못했던 광경에 넋을 놓고 있을 때, 이웃집 아저씨와 아줌마, 아이돌의 얼굴을 차용해 협시불을 조성했다는 설명을 듣고 나면 모든 존재에 불성이 가득하다는 부처의 가르침을 형상화한 점에 또 한 번 놀라게 된다.
신발을 벗지 않고 입당할 수 있는 법당의 구조나, 천정을 장식한 999개의 연등, 입출구의 동선에 배치한 갤러리 서운(瑞雲)까지, 무설전은 ‘오늘의 사람들’을 위해 정교하게 설계된 ‘오늘의 법당’이었다.
문화로 물든 전등사의 가을
“전등사가 보유한 중견 화가의 작품이 200점이 넘어요.”
목을 축이기 위해 들른 다실 죽림다원에서 김태영 팀장이 설명을 덧붙였다. 2005년부터 전등사 템플스테이를 일궈온 그는 베테랑이다. 아마도 절에 스민 정갈함, 세련됨이란 정서는 그의 손끝을 거쳤으리라.
전등사는 가을마다 인천광역시와 협력해 삼랑성역사문화축제를 연다. 축제 기간에 가을음악회와 영산대제 등의 공연도 있고, 조선왕조실록을 지켜낸 정곡산사고(鼎足山史庫)에서 중견작가들의 미술 전시회도 연다. 전등사에 전시된 그림들의 출처다.
감성충전소, 전등사 템플스테이
가을이 아니더라도 전등사는 충분히 매력적이지만, 가을에 이르러 전등사는 깊은 감성에 젖는다. 성곽을 따라 산책하는 것, 툇마루에 앉아 소일하는 것, 성수동 카페보다 힙한 죽림다원에서 차 한잔 하는 것, 공양하고 예불하는 것 모두 감성여행으로 종결된다. 그저 전등사라는 화폭에 나 하나 던져 놓으면 완성되는 그림이랄까!
전등사는 그런 곳이다. 오래됐지만 좋은 것(Oldies but Goodies)을 넘어 오래됐지만 새로운 것(Oldies butNewness), 전통과 현대와 조우하며 잊고었던 감성을 불러일으키는 곳! 전등사는 1,600년의 전통을 간직한 오늘의 문화전초기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