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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임은 뭍같이 까닥 않는데,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날 어쩌란 말이냐”
청마(靑馬) 유치환 시인은 「그리움」이란 시에서 이렇게 읊었다. 바다를 바라보며 애잔하고 사무친 그리움은 누구에게나 있기 마련이다. 바다에 나가면 우리는 영혼의 소리를 듣는 것 같고 우리가 지향해야할 이상향으로 바다가 표상되고 있기도 하다. 한자로 바다 해(海) 자는 물(水)과 어머니(母)로 구성되어 있는데서 알 수 있듯이 바다는 어머니이고 우리는 어머니 뱃속에서 살다가 나왔고 다시 바다로 돌아 갈 인류의 원초적인 고향이라는 생각이 든다. 바다에 가본 경험이 없는 사람도 꿈속에서 바다와 접하곤 한다. 이는 생명의 원천으로서의 바다를 상징적으로 증명하는 것이요, 달과 맺어진 조수(潮水)의 들고 남, 파도의 일어남 등으로 나타나는 바다의 역동성은 생명력을 말해주고 있다.
청마 유치환과 정운(丁芸) 이영도와의 20년에 걸친 플라토닉 러브 이야기는 가히 20 세기의 대표적인 러브스토리로 자리매김할만하다. 해방이 되어 통영여중 교사로 재직하고 있던 37세의 청마는 당시 29세의 재색과 미모를 갖춘 정운 이영도가 부임하자 영혼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매일 같이 흠모하는 마음을 편지로 써서 보냈고 이영도는 그 편지를 모았다. 청마는 결혼하여 가정을 이루고 있었고 정운은 남편과 사별하고 딸 하나와 함께 살고 있는 입장이었다. 당시 유교적인 전통이 지배하던 사회에서 함부로 처신할 수 없는 두 사람이었고 정운은 매사에 조신하며 지내고 있었으며 함부로 마음을 열어줄 상태가 아니었다.
“임은 뭍같이 까닥 않는데, 파도야 날 어쩌란 말이냐” 구절은 청마의 정운을 향한 애틋한 마음을 표현한 것 같다. 결국 3년 만에 정운이 마음을 열기 시작했지만 그 후로도 청마는 편지로 마음을 전했으며 만날 약속이 되어 있던 1967년 어느 날 청마가 교통사고로 갑자기 세상을 떠날 때까지 5000여 통의 편지가 전달되었다. 애가 타는 마음으로 시인이 외쳤을 그 소리 “파도야 날 어쩌란 말이냐”를 나는 이해를 못하고 지내왔다. 바다를 만나기 전 까지는……
그대는 카레카레(Karekare) 비치를 가보셨나요? 설마 영화 「피아노」는 감상하셨을 테지요. 우리는 이곳에 이민 오기 전부터 이미 이 비치를 영혼 속에 간직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영화「피아노」는 1993년도 칸느 영화제 그랑프리 수상 작품인 뉴질랜드 영화이다. 그 영화의 촬영 배경이 된 비치라고 해서 더욱 유명해진 카레캬레…… 한 사람의 영혼을 불사른 창작 혼이 얼마나 많은 세계인들의 영혼을 밝게 해줄 수 있는가? 이 영화는 바로 이에 대한 대답을 말해주고 있다. 1994년 이후 이민 온 자들은 대개 한국에서 이 영화를 감상했고 뉴질랜드에 대한 꿈을 형상화 해나갔다.
“바다가 좋아 질 땐 누군가 사랑하는 거래요. 가을밤에 달이 보고 싶을 땐 첫 사랑을 시작하는 거래요. 가을밤에 달을 보면서 바다가 좋아질 댄 누군가와 첫 사랑을 재현하는 거래요.” 작년에 코로나 경보 단계에서 집콕하라는 정부 방침에다가 아무데도 갈 수 없고 아무도 만날 수 없는 형편에서 산책은 가능하다고 해서 밀포드 바닷가를 매일 찾게 되었다. 와이프와 함께 지구의 남 쪽 끝 뉴질랜드에 까지 와서 이런 시간을 갖게 되리라고는 꿈에서조차 상상할 수가 없었다. 집에서 왕복 2시간이 소요되는데 그러면 하루 10,000 보를 걷게 된다. 바다와 가을밤이 어우러져 바다에 비친 달, 하늘에 떠 있는 달, 마음속에 잠겨있는 달을 보며 걷고 있을 땐 첫 사랑을 재현해보는 감흥을 맛보는 게 아닐까? 생각해보았다. 코로나가 베푸는 선물로 알고……
코로나 펜데믹(Pandemic)이 금년 들어서는 백신 접종으로 완전히 끝날 것이라고 예상했었다. 실제로 뉴질랜드에서는 신규 환자 발생이 전무한 상태에서 8월까지 잘 버텨왔다. 그러나 8월 중순부터 다시 유행하기 시작해 오클랜드를 중심으로 비상이 걸렸다. 환경이 바뀌면 내 처신도 바뀌어야한다. 환경만 탓하며 넋 놓고 있을 수만은 없다. 걸으면서 기왕이면 맨 발로 걷기를 시도해 보았다. 맨 발 걷기의 효능에 대해서는 여러 연구 결과에서 실증적으로 검증이 되고 있다. 평소에 맨발 걷기를 실현해보려고 하나 맨 땅이 없는 상태이고 잔디밭이 좋으나 잘 보이지 않는 장애물이 있어 함부로 시도해 볼 수도 없다. 역시 제일 좋은 곳은 바닷가에 나가 백사장을 걷는 것이다. 우리가 흙에서 나와 흙으로 다시 돌아갈 처지인데 일 년에 단 몇 분이라도 땅과 접촉하면서 살아가고 있는지 자문해본다. 방문을 나서면 신발을 신고 콘크리트 바닥을 걷다가 차량으로 이동하고 돌아오는데 땅 바닥에 발바닥을 접촉하는 일이 있기나 하는지?
우리에게는 매일 찾아 갈 비치가 가까이에 있다. 비치에 가면 파도와 마주할 수가 있다. 록 다운(Lock down) 기간에 양말을 신어 본 적이 없다. 매일 비치 산책을 하면서 맨발로 바다 위를 걷는다. 철썩거리며 바위에 부딪치는 파도를 보면서 걷는 발목에 전해오는 쏴한 느낌이 상쾌하다. 땅의 기운을 흡수하고 몸의 온갖 노폐물은 바다에 흘려보내는 거 같다. 그리움은 파도처럼 밀려오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