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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일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잠시 한국에 체류중인 학생으로부터 연락을 받았습니다. 원래의 진학계획을 조금 변경해 영국의 옥스포드에 지원을 하게되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물론 학생의 능력이나 성적으로 비추어 봤을때 나름 이해가 되는 진학 결정이기는 했지만 평생 뉴질랜드에서 떠나지 않을것만 같던 아이가 스무살도 되기전에 영국행을 고려한다니 저로서는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진학과 인터뷰, 영국 생활에 관련하여 몇 가지 우려섞인 조언을 하면서도 속으로는 ‘제발 붙어라. 그래서 나도 오랫만에 ‘옥스브리지’ 합격생 배출했다고 목에 힘 좀 줘보자.’ 라며 엉큼한 소원을 빌고 있었으니.. 이 정도면 시대를 앞서가는 ‘속물’의 경지에 다다랐다 할 수 있겠습니다. ㅎㅎ
학교 지원에 대해 간략히 대화를 나눈 후 인터뷰에 관련한 수업을 하는 동안 자꾸만 머리속을 맴도는 예전 학생이 한 명 있었습니다. 옥스포드와 쌍벽을 이루는 캠브리지에 지원했던 학생이었는데요. 워낙에 언어실력이 출중해 (참고로 문과가 아닌 이과였습니다만..) 제가 여지껏 입에 달고 다니는 신조어를 개발해 준 학생이었습니다. 한 번 트인 생각의 물꼬는 끝없이 흘러가기 마련이지요. 수업을 마친 이후에도 당시의 기억들이 되살아나 마치 몇 년을 되 돌아간듯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영국에 위치한 세계 최고수준의 대학교들인 캠브리지와 옥스포드 대학교엔 신입생이라면 대부분 지원하고 싶어하는 유명 컬리지들이 있습니다. 이 두 대학교의 시스템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분들껜 조금 생소할 수도 있겠는데요.. 컬리지 개념은 요즘 뉴질랜드 각급 학교에서 시행하고 있는 ‘하우스’ 개념과 약간 비슷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강의를 제외한 대부분의 학교생활이 각 컬리지 별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자신이 3년을 보낼 컬리지를 선택, 지원 하는 것은 신입생들에겐 매우 중요하고도 신중한 판단을 요하는 일입니다.
한 컬리지의 일원이 된다는 것은, 기숙사에서의 거주, 식사, 공용공간 이용, 도서관, 스포츠 행사, 시설 이용등을 함께 한다는 뜻입니다. 특히 옥스포드의 경우 전통이자 강점으로 꼽히는 ‘학부 튜터링 시스템’이 중앙 대학 본부와 개별 컬리지의 협의에 의해 조정되기 때문에 우수한 컬리지에서 공부하는 것은 학생의 실력향상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또한 개별 컬리지들은 독립적인 재정운영과 자체 규율을 적용할 권리를 보장받고, 컬리지 일원이 이용하는 건물이 따로 있으며 자체적으로 기부금을 받고 장학금을 운용합니다. 따라서 컬리지별로 재정규모가 상이하며, 운영이 어려운 컬리지는 중앙 대학 본부에서 재정지원을 하기도 합니다.
이와 반대로 어떤 컬리지는 중앙 대학 본부보다 훨씬 더 나은 재정상황을 보여주기도 해서 더 많은 학생들이 장학금의 혜택을 받습니다. 상황이 이러하니 누구나 최상위 컬리지를 지원하고 싶은것은 인지상정일 겁니다. 하지만 누구나 자기가 지원하는 컬리지에 배정 될 수는 없는 일이고 학생들이 선호하는 컬리지가 대동소이해서 결국은 성적순으로 컬리지 배정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예를들어 캠브리지 대학교의 컬리지중 최고의 선호도를 보이는 킹스컬리지나 트리니티 컬리지는 신입생들 중 최고권의 성적을 가진 학생들만 진학하게 된다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럼 일단 우수 컬리지에 진학을 했다고 하면 그 이후의 생활을 여타의 컬리지에 비해 어떤 차이점을 보여줄까요? 일단 기본적으로 자~알 나가고 있는 졸업생들과 친밀한 인맥관계를 쌓게 됩니다. 졸업생들은 가끔 자신의 출신 컬리지를 방문해 후배들과 대화도 하고 인재를 선발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기숙사를 배정받는 일에도 우수 컬리지의 파워는 막강해서 가장 좋은 기숙사에 우선적으로 배정받는 혜택을 누릴수 있습니다. 별것 아닌것 같지만 창문밖으로 시원한 광장뷰가 펼쳐진 햇빛 잘 드는 방과, 창문을 열어봤자 옆 건물의 또 다른 창문밖에 보이지 않는 눅눅한 방과의 차이는 극명합니다.
또한 대학원 장학금 신청시에도 타 컬리지보다 더 많은 혜택을 받을수 있고 심지어는 박사 과정 신청시에도 특별 생활비 지원 및 성적이 우수할 경우 전액 장학금을 받을 수 있다고하니... 이쯤 되면 공부만 잘 하면 목에 힘 좀 주고 살 수 있다는 이야기를 넘어서서 공부를 잘하면 돈 벌면서 학교 다닌다는 이야기가 나오는 것도 무리가 아니겠다 싶습니다.
당시 트리니티컬리지를 지원했던 그 학생과 핑크빛 환상과 같은 찬란한 미래에 대해 이야기 하던 도중 학생이 불쑥 새로운 단어, 신조어를 하나 만들어 냈습니다.
‘Academic capitalism (학습자본주의)’이 그것인데요. 만약 자신이 원하고 바라는 대학 진학 관련 프로세스가 모두 무리 없이 잘 이루어지게 된다면 박사과정 까지 사실상 매우 큰 금액의 학습비용을 절약할 수 있을것이고, 그 뿐 아니라 더 나은 인맥형성과 학습지원 때문에 상대적으로 다른 학생들보다 더 유리한 위치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하게 될 것이며, 이러한 상대적 우위에서 시작된 사회생활은 분명히 더 나은 금전적 보상을 가져올 것이란 이야기 였습니다. 쉽게 말해 ‘공부 잘하면 돈 번다’는 이야기를 현실적이고도 자세하게 풀어 보았다 할 수 있겠습니다.
그 학생이 경제관념이 투철해서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돈을 벌려면 공부해야지’ 하는 생각을 했다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오히려 대학에 진학하려고 여기 저기 정보를 찾아 헤메다 보니 지금까지 모르고 있었던 ‘높은 성적’에 대한 금전적 보상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는 이에 놀라워하며 만든 신조용어일 뿐 입니다.
학습자본주의.. 높은 성적에 대한 실질적 혜택..
이러한 ‘보상’ 시스템은 당연히 학생들에게 학습을 향한 강력한 동기를 제공합니다. 물론 이미 높은 성적과는 거리가 멀어진 학생들에 의해 ‘차별적인 처우’라며 비판받을수도 있겠습니다만, 애초에 모든 학생들이 동일한 시간과 조건을 부여받았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성적이라는 것은 철저히 개인의 선택에서 기인한다고 말 할수 있습니다. 또한 이 보상시스템이 인간의 역사와 문화를 발전시켜 온 원동력중 하나라는 사실도 절대로 간과해서는 안되겠지요.
실제로 이렇게 ‘잠재적 차세대 리더’들에게 금전적 보상과 아울러, 더 나아가, 시간적 보상을 약속하는 사회적 시스템은 어제 오늘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나라의 사례만 보아도 조선시대 초기에 소고기를 합법적으로 먹을 수 있는 계층은 성균관 학사들 뿐이었고, 그 이외의 양민은 국가가 허락한 시기와 상황에서만 소고기를 맛 볼수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당연히 공부에 매진하는 학사들에게 양질의 영양을 공급하기 위해서였는데요. 당시 그들이 공부했던 학습내용의 실효성 여부는 가치관과 시대상에 관련된 문제이니 차치하고, 이미 사회적인 분위기가 공부 잘하면 대우를 해주고 인재로 잘 키워서 활용하는 방향으로 정착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비단 대한민국뿐만이 아니지요. 우수한 성적과 실력을 가진 누군가에게 중요한 결정을 의뢰하는 문화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동일하며 그 누군가에게 실질적인 보상을 하는 문화 또한 동일합니다. 그러니 작금의 ‘학습자본주의’는 사실 인류의 역사와 함께 지속되어 왔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학생들을 가르친다는, 다소 비판적으로 사람을 바라봐야 하는 직업을 가지고 살다 보니 요즘 우리의 아이들이 가지고 있는 정신자세가 맘에 들지 않을 때가 종종 있습니다. 필자와 아이들간의 나이 차이가 많아서 가지고 있는 가치관이 고루하기 때문인 것도 당연한 한가지 이유가 될 수 있겠지만, 상대적으로 학생과 학부모님보다는 교육계의 현실이나 위에서 말한 학습에 대한 보상 등등의 사례를 많이 접한다는 것 또한 중요한 이유가 될 수 있을듯 합니다. 저의 입장에서 볼 때 우리의 아이들이 약간은 비정상적인 학습관을 가지고 있지는 않은가 하는 우려가 들때가 많습니다. 그리고 이런 우려의 단초가 되는 아이들과 갈등도 항상 명확합니다.
아이들은 기본적으로 공부하기 싫어하고, 참견듣기 싫어하며, 근시안적인 관점에서 공부에 접근합니다. 이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입니다. 아직 살아보지 못한 미래의 삶을 위한 준비과정이 공부인데, 세상 누구나 그렇듯이 경험치 못한것을 대비한다는 것은 그리 쉬운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에 반해 선생은 공부를 시켜야 하고, 시시콜콜 참견 해야 하며, 멀리 보고 미리 준비를 시켜야 합니다. 이미 살아 본 과거의 학창시절에서 가장 중요했던 부분이 공부인데, 세상 누구나 그렇듯이 하니 이미 뻔히 결과가 보이는 게으름을 좌시하는 것은 그리 쉬운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상황이 이러하니 어찌 갈등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 아이들은 사사건건 트집이라며 볼 맨소리를 하고 저는 언제나 정신 차릴거냐며 가슴을 칠 밖에요. 그런데 이렇게 신경전을 펼치는 그 예민한 순간에 부아를 확 돋게 만드는 아이들의 한마디가 있으니.. 바로
‘나는 이런 거 하고 안 맞는 사람 이예요’
‘이 공부 방법은 내 스타일이 아니예요’
등등, ‘나는 나이고 좋고 싫은 것은 내가 결정한다’는 지나치게 주체적인 자세입니다. 아마도 초등학교 때부터 열심히 고개 주억거리면서 들어온 선생님의 ‘Be yourself!’ 를 왜곡되게 이해한 결과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내 인생의 좋고 싫음은 내가 결정할 일이니 내가 하고 싶고 좋아하는 방향으로 가르쳐 달라는, 피고용인에 대한 고용주의 당연한 요구에 진배 없는 언사들은 순간적인 언짢음을 넘어서서 그 학생에 대한 진지한 걱정으로 번져가곤 합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의지에 따라 모든 것을 결정할 수 있으니 공부에 관해서도 좋고 싫음과 할 일과 안 할 일을 결정할 수 있을것이라 믿는 ‘자기 판단 지상주의’는 대학에 입학한 순간부터, 아니 지원하려 고등학교 점수를 정리하는 순간부터 여지없이 무너져 내리고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하고 싶은 일과 하기 싫은 일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내 성적으로 할 수 있는 일’ 중에서 무언가를 선택하던지 아니면 그나마도 포기하던지를 결정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사람에 따라 반 강압적인 사회적 제약이 될수도 있고 동시에 지난 시간의 노력을 보상해주는 사회적 응원이 될 수도 있습니다.
학생들 중 고등학교 과정을 성실히 수행하며 시간을 쪼개어 공부에 매진한 학생들은 더 넓은 범위의 선택권을 인정받음과 동시에 특별한 경우 장학금이라는 경제적인 혜택을 받을 수도 있을 것이고, 반대로 공부를 게을리 한 학생들은 자신이 꿈꾸던 미래의 다양한 모습 중 상당수가 사라져버린 좁아진 인생 청사진에 상실감을 느껴야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야말로 공부를 열심히 하면 더 잘하게 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고, 게을리 하면 잘 할래야 할 수가 없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는 ‘빈익빈 부익부’의 양태를 보여주니.. 이 또한 ‘학습 자본주의’의 한 모습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제 연말이 다가오고 대학을 지원 해야 하는 시기가 되었습니다. 또한 코 앞에 닥친 시험들 때문에 심리적으로 불안한 external 시험기간의 막바지이기도 합니다. 앞서 말했던 보상과 제한의 실제성을 한 층 진지하게 경험할 수 있는 시기가 된 것이지요. 만약 누군가 땀흘려 공부한 보람을 느끼고 있다면, 그리고 만약 누군가 나태했던 지난 몇 해를 후회하고 있다면 그 느낌과 강도를 꼭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 왜냐하면 내년에는 그 보람과 후회가 몇 곱절 큰 덩치로 불어나 되 돌아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치 좋은 투자는 큰 이익으로 돌아오고 잘못된 투자는 큰 실패로 돌아오듯 말입니다.
‘인생’에 있어서 공부가 전부일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 그것만이 유일하게 나아갈 방향이라고 주장할수도 없습니다. 세상에는 수많은 직업들이 있고 저마다 나름의 성공한 사례들이 존재하기에 누구나 자신의 직업에 소명의식을 가지고 성실히 매진한다면 자신만의 성공을 이루어 낼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학생’에게 있어서는 공부가 전부입니다. 타고난 지능, 성격, 취향, 경험이 다양하기에 누구나 좋은 성적을 받을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타고난 지능, 성격, 취향, 경험이 다름에도 불구하고 누구나 성실히 노력할 수는 있습니다.
현재의 자산이 얼마인가 하는 문제와 그 자산의 변화가 증가세인지 아니면 감소세인지 하는 문제가 별개이듯, 현재의 성적이 얼마인지 하는 문제와 그 성적이 상승세인지 하락세인지 하는 문제는 별개입니다. 경제나 공부나 아직은 불투명한 미래에 대한 투자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고 그래서 지금의 상황보다는 미래의 가능성에 더 큰 비중을 두기 마련입니다. 그러니 현재의 실력이 어느정도인지 보다는 상승세인지 하락세인지가 더 중요하다고 보아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이 상승과 하락의 변곡점을 좌지우지하는 모든 요소들 가운데 무엇보다도 학생의 노력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은 우리 모두가 알고있는 주지의 사실입니다.
2021년을 마무리하는 12월의 초입, 우리 모두가 힘들었고 괴로웠던, 별로 기억하고 싶지 않은 한 해의 끄트머리에 서서 우리의 아이들을 향한 한가지 소망을 이야기합니다.
학생에게는 공부가 전부입니다. 무엇을 배울것인가 하는 문제보다는 어떤 자세로 공부할것인가 라는 측면에서 바라볼때에 이 명제의 의미는 더욱 정확하게 다가옵니다. 부디 바라기는 우리의 아이들이 이 진부하고 고루한 진리를 진지하고 당연하게 받아들여 ‘학습 자본주의’의 세계 속에서 빈자가 아닌 부자로 살아가는 첫 걸음을 뗄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