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칼럼 | 지난칼럼 |
■ 정 성화
박수근의 그림 ‘아이 보는 소녀’를 보고 있다. 이마를 일직선으로 가로지른 상고머리에다 까맣게 그을린 얼굴의 소녀는 동생을 업은 채 해맑게 웃고 있다. 앞코가 둥그스름한 까만 고무신이 소녀가 입고 있는 무명치마와 어우러져 더욱 소박한 모습이다. 소녀는 어린 시절의 내 모습이기도 하다.
어머니는 내가 학교에 들어가기 전부터 동생을 연이어 낳아주셨다. 내가 초등학교를 졸업할 즈음, 나의 동생은 넷으로 불어났다. 동생이 자꾸 생긴다는 것은 한창 놀고 싶어 하는 내 또래의 아이들에게 그리 신나는 일이 아니다. 나가 놀 수 있는 자유가 이분의 일에서 사분의 일로, 다시 팔분의 일로 줄어든다는 의미다.
우리 집은 아기를 길러내는 협동조합이었다. 언니는 어머니와 함께 기저귀 빨래를 했으며, 나는 아기가 목을 가눌 수 있을 때부터 아기를 업어 재우는 일을, 내 아랫동생은 기저귀를 개는 일이나 방청소를 도왔다. 아기도 어른처럼 가만히 누워서 이 생각 저 생각에 잠겨 있다가 조용히 잠이 든다면 얼마나 좋을까 싶었다. 꼭 등에 업혀서 바깥나들이를 저하고 싶은 만큼 한 다음에야 동생은 잠이 들었다.
업힌 자세를 투시도로 그리면 거의 앉은 자세에 가깝다. 그런데도 방바닥에 눕기보다 굳이 등에 업히기를 좋아하는 이유는 뭘까. 어른이 되면 아무리 잠이 온다 해도 눕지 못하고 앉은 채로 선잠을 자야할 때가 많다는 사실을, 아기가 미리 알고서 일찌감치 연습을 해 두려는 것은 아닐 텐데 말이다. 등에는 방바닥과는 다른 무언가가 있음을 아기도 본능적으로 느끼는 모양이다. 등 너머로 전해져오는 숨결과 체온에서, 어머니의 뱃속에 있을 때의 편안함을 다시 느껴보려는 것은 아닐까.
동생을 업고 집을 나서면 갈 데가 별로 없었다. 동생의 잠을 탁발(托鉢)하러 나서는 그 일이 나에게는 꽤 힘들게 느껴졌다. 집 주위를 빙빙 돌다가 골목에 피어있는 분꽃의 개수를 헤아려보기도 하고, 옆집 옥상에 널린 빨래가 몇 개인지 세어볼 때도 있었다. 이따금 들려오는 엿장수의 가위 소리가 우리 집 골목의 정적을 더욱 깊게 하고 있었다.
좀 너른 공터로 나오면 친구들이 모여서 놀고 있었다.
“이 강산 침노하는 왜적의 무리를, 거북선 앞세우고 무찌르시니… ”
노래를 부르며 나풀나풀 고무줄을 넘거나, 바닥에 석필로 하얀 금을 그어놓고 사방차기(돌차기)를 하고 있었으며, 때로는 시원한 그늘에 모여 앉아 공기놀이나 소꿉놀이를 하기도 했다. 그럴 때는 동생을 재우는 것보다, 뛰어 놀고 싶은 내 마음을 재우는 것이 더 힘들었다. 내게 있어 ‘자유’란 등에 아무것도 업지 않은 홀가분함을 의미했고, 그 때 만큼 자유가 부럽고 빛나 보인 적도 없었다.
친구들이 어울려 노는 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으면, 등에 업힌 동생이 이내 포대기 속에서 몸을 뒤틀었다. 한 자리에 오래 서 있다는 것을 눈치 챈 것이다. 언젠가 고무줄놀이를 너무 하고 싶어서, 옆에 있던 빈 사과상자에다 어린 동생을 담아놓고 아이들이랑 고무줄놀이를 했다가, 누군가 어머니에게 일러주는 바람에 단단히 혼이 난 적도 있다.
동생을 업어 재우는 것 못지않게 잠든 동생을 내려놓는 것도 힘들었다. 잠이 깊게 들었다 싶어서 집에 돌아와 동생을 방바닥에 살포시 내려놓는 순간, “으앙” 하고 울음을 터뜨리며 다시 팔팔하게 되살아나는 수가 많았기 때문이다. A/S(After service)는 전자 제품에만 있는 게 아니다. 나는 다시 동생을 업고 밖으로 나와야 했다. 그 때, 지나가던 이웃집 아주머니가 “아이고, 덩치도 작은 게 제 동생을 잘도 업어주네” 라고 했을 때, 공연히 서러움이 북받쳐와 나도 모르게 눈물이 핑 돌았던 기억도 있다.
먼 데 산을 보면, 산이 산을 업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산의 등 뒤에 납작이 엎드린 산은 살풋 잠이 들었는지 아슴해 보인다. 산등성이가 아름다워 보이는 것도 그 때문이 아닌가 싶다. 그림 속 아기 보는 소녀의 어깨선 또한 부드러운 산의 능선을 닮은 듯하다. 그래서인지 소녀는 모든 생명체를 넉넉히 품어내는 산의 마음을 가지고 있을 것 같은 느낌을 준다.
동생을 업고 있으면 동생의 살 냄새, 새근거리는 숨소리, 동생의 꼼지락거림, 그리고 통통한 두 다리의 감촉 등, 그 모든 것이 나의 등에 그대로 전해져 왔다. 등에 느껴지는 체온이 여느 날 같지 않다거나 심하게 보챈다 싶으면, 대개 그 뒷날 병원에 데려갈 일이 생겼다. 바로 밑의 동생을 빼고는 다들 내 등 뒤에서 옹알이를 연습했고, 내 등에 오줌을 싸기도 했으며, 잠투정을 하느라고 내 뒷머리 가락을 쥐어뜯으면서 손아귀의 힘이 세어져 갔다. 막냇동생이 저 혼자 잘 걷게 되어 더 이상 업히지 않으려고 내 등을 밀쳐내었을 때, 나는 웬일인지 해방의 기쁨보다는 서운한 마음이 먼저 들었다.
동생을 업었을 때의 느낌은 나의 등에 그대로 내장(內藏)되어 있었던 모양이다. 내 아이를 낳아 처음으로 등에 업었을 때, 그 느낌은 한결 증폭되어서 내게 되돌아왔다. 아이의 숨과 나의 숨이 포개지면서 살과 살이 함께 호흡하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어딜 가든지 내 아이를 업고 다녔었다.
서양에는 우리와는 달리 업고 업히는 문화가 없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외국의 전쟁영화를 보면, 부상자라 해도 업어 나르는 게 아니라 들것에 싣던가 아니면 겨드랑이를 부축하여 질질 끌고 가는 수가 많다. 업는다는 것은 한 생명체의 무게를 고스란히 내가 감당하겠다는 의미이며, 한 사람의 걸음으로 둘이 나아가겠다는 뜻이다. 부모가 아이를 업어주고, 형이 아우를 업어주고, 다 큰 자식이 노모를 업는 풍습은 우리 문화에 있어 하나의 아름다운 결을 이루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어미 독수리는 새끼를 그냥 업어주는 게 아니라고 한다. 독수리는 새끼를 등에 업고서 높은 곳으로 올라간 뒤 사정없이 아래로 떨어뜨린다고 한다. 그러면 새끼는 살기 위해 날개를 너풀거리게 되고, 어미 독수리는 새끼가 땅에 닿기 전 아래로 내려와서는 다시 업고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기를 반복한다는 것이다. 어미의 등줄기에 엎드려 어미의 가뿐 숨결을 느낄 때, 새끼 독수리는 더 힘찬 날갯짓을 다짐하게 될 것이다.
아이들의 날개에 이젠 제법 힘이 올라 나의 등을 찾지 않게 되면서, 나는 자꾸만 등 언저리가 허전해져 왔다. 등이 먼저 ‘빈 둥지 증후군’을 앓는 듯 했다. 그 때 누군가 내게 문학을 공부해보라고 권했다. 봄바람처럼 부드럽게 감겨오는 지금의 자유를 굳이 마다할 이유가 있겠느냐고 가슴이 속삭였을 때, 뒤쪽의 등은 애써 담담한 표정을 짓고 있는 듯 했다. 문학이란 등짐을 질 때는 스스로 그만한 무게를 감당할 수 있어야 한다고 등은 내게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나는 오늘도 글 한 편을 업고 대열에 끼여서 가고 있다. 지금 업고 있는 이 글을 푹 재울 수 있을지, 그리고 방바닥에 제대로 내려놓을 수 있을지 잔뜩 걱정을 하면서.
■ 정 성화
2003년 부산일보 신춘문예(‘풍로초’)로 당선,
2013년 서정시학 선정 ‘2013년 한국의좋은수필’에 선정, 수필 ‘동생을 업고’와 ‘크레파스가 있었다’가 중학교 교과서에 실렸다. ‘현대수필문학상’, ‘정과정문학상’, ‘윤오영수필문학상’ 등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