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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 혜숙
나는 물과 불처럼 서로 다른 부모님 사이에서 맏이로 태어났다. 아버지를 닮아 지극히 내성적이었고, 어머니를 닮아 감성이 넘쳤다. 밴댕이처럼 좁은 속은 아니었으나 하해처럼 넓은 속도 아니었다. 부모님은 농사일로 바빴고 나는 외딴 밭 옥수수처럼 제풀에 자랐다.
내가 부쩍 외로움을 타기 시작한 것은 엉덩이에 뿔이 돋을 무렵이었다. 이른 저녁을 먹고 건초 더미에 누워 있으면 왠지 동산 위에 반쪽자리 달처럼 허기가 졌다. 어둑해지도록 안방에는 불이 켜지지 않았다. 올해도 흉년이 들어 조합 빚을 다 갚지 못할 거라는 아버지의 한숨 섞인 말소리만 간간이 들려왔다.
친구들이 밤톨만 한 젖가슴을 내놓고 멱을 감을 때 나는 나무 그늘에 앉아 책을 읽었다. 그때 일찌감치 알아챘다. 인생은 불공평하다는 것과, 내가 책 속의 주인공처럼 화려한 삶을 살 수 없으리라는 것을. 감수성 예민한 시기에 가난은 부끄러움이었다. 내가 책에 탐닉하게 된 것도 어쩌면 그것만이 자존감을 지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믿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한참 발랄해야 할 나이에 책에 갇혀 외골수가 되었고, 놀 줄도 모르는 민숭민숭한 청소년 시절을 보냈다. 소심하고 신중한 탓에 삶의 거친 급류를 겪진 않았으나 확 트인 전망도 누리지 못한 채 중년을 맞았다.
이십 년 넘게 살던 도시를 떠나 시골 마을로 이사를 했다. 가까이서 보는 농촌의 생활은 고달팠으나 사는 맛이 났다. 촌로들은 새벽이슬을 맞으며 논둑의 물꼬를 트고, 잡초를 제거하고, 약을 치고, 뙤약볕 아래 저물도록 밭을 맸다. 등은 굽고 허리는 휘었으나 표정엔 번뇌가 없었다. 유월이면 촌로의 광엔 황토밭에서 캔 붉은 감자가 쌓이고, 시렁엔 아기 주먹만 한 마늘이 내걸렸다. 주말에는 아들 내외가 내려와 일손을 거들고, 마당에 내걸린 가마솥에선 구수한 삼계탕이 끓었다. 칠순이 훌쩍 넘은 촌로 부부는 종일 말 한 자락 나누지 않으면서도 그림자처럼 붙어 다녔다.
들녘엔 철마다 야생화가 흐드러졌다. 버찌며 오디, 산딸기도 지천에 열렸다. 야생의 맛은 시거나 떫거나 달착지근하거나 분명한 제 맛을 지니고 있었다. 한철 피었다 질망정 피고 짐에 순서가 있었고 영역의 한계가 분명했다. 애초기 톱날에 뎅겅 목이 잘리고 농약이 골수에 스미어 누렇게 말라죽어도 이듬해엔 영락없이 파릇파릇 잎을 밀어 올리는 야생초들. 장마통 비바람에 반쯤 꺾여서도 환하게 웃었다. 그 강인한 생명력으로 개별성은 보존되고 들녘은 해마다 강성한 것이리. 저들이 나고난 본성을 부정하고 시절을 탓하며 처지를 비관했다면 세상의 초록은 모두 사라지고 말았을 터. 야생초처럼 비교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자기를 밀고 나가는 것, 그것이야말로 존재를 세우는 근본적 힘이라는 걸 왜 몰랐을까.
삽자루를 둘러멘 촌로를 따라 돌아오는 저녁, 어둑해져서야 집으로 돌아오는 아버지를 떠올렸다. 부모님은 농투성이였지만 그 토대 위에서 굳건히 삶을 일으켰고, 큰 부자는 아니었지만 나름 떳떳한 삶을 살았다. 몸으로 체득한 진리는 정직하고 단순했다. 책의 이론처럼 추상적이거나 관념적인 것이 아니었다. 땅이 심은 대로 보상하듯 땀 흘린 만큼 풍요로운 건 삶의 진리였다.
행복은 지극히 일상적이고 소박한 것들임을 깨달은 것도 그 무렵이었다. 큰 욕망에 가려져 보이지 않던 소소한 행복들이 눈에 띄었다. 만족한 삶이 행복한 순간들의 합이라면, 얼마나 크게 행복하냐가 아니라 얼마나 자주 행복하냐가 더 중요하단 말은 옳을 터였다. 큰 욕망을 내려놓자 작은 행복들이 일상 속에 꽃처럼 피어났다. 삶은 여전히 궂은 날, 갠 날을 시계추처럼 오갔지만 그 사이의 긴장을 견디게 하는 건 바로 작은 행복들이 주는 내성이었다.
경쟁과 속도를 벗어난 자연의 느린 호흡 속에서 평범한 일상의 행복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깨닫는다. 무성한 욕망과 미혹, 화려한 이정표와 갈림길 앞에서 나는 얼마나 오래 헤매었던가. 이제야 정작 나를 가난하게 한 것이 내 안의 열등감, 패배의식임을 알겠다. 끊임없이 비교하면서 내 것이 아닌 것을 구하려는 욕심, 기쁨만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 결핍과 좌절의 원인이었던 것이다.
살면서 어찌 한 점 그늘이 없으랴. 그만하면 나도 무난하게 살아왔거늘. 진정한 행복이란 촌로처럼 야생초처럼 상처와 결핍마저 끌어안고 묵묵히 제 노래를 부르는 것이리. 만물에 자기 자리가 있듯이 저다운 삶의 방법을 찾는 것은 결국 각자의 몫일 테다. ‘그래, 이만하면 괜찮다.’ 가파르게 오르내리던 욕망을 다독인다. 열세 살 소녀의 왜곡된 자존감이 제자리를 찾기까지 너무 먼 길을 돌아온 셈이었다.
■ 노 혜숙
2006년 ‘수필과 비평’으로 등단 후
<<조르바의 춤>>, <<생생, 기척을 내다>>, <<비밀번호>>를 펴냈다.
2014년 계간 <<에세이 포레>> ‘올해의 작품상’과
2015년 월간 <<수필과 비평>> ‘황의순문학상’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