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그 때에 왜 행복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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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그 때에 왜 행복했는가?

0 개 1,039 명사칼럼

그제 10살이 된 딸내미와 같이 텔레비전을 보다가 과거 이야기를 좀 나누었습니다. 지금 수십 개의 티비 채널 중에 하나를 골라 볼 수 있는 딸내미는, 아빠가 어렸을 때에 채널이 몇 개 있었냐고 물었습니다. 저는 사실대로 “3개”라고 답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딸이 이해할 수 있는, 가급적 쉬운 언어로 제가 기억하는 1983년, 즉 제가 10살이었을 때의 레닌그라도 현실을 그녀에게 조목조목 설명했습니다. “휴대폰”이라는 단어는 물론 없고, “전자오락”을 아마도 어쩌면 미국산 영화에서 가끔 보고 그 존재를 알게 되는 현실이고, 텔레비전은 아무리 3개 채널이 있다 해도 그 내용은 다 엇비슷하고, 휴식 방법으로는 제 주위에서 가장 흔한 건 독서나 숲 하이킹, 아니면 극장에서의 연극 관람 같은 것이었던, 그러한 삶을 그녀에게 설명한 것입니다. 나아가서는 해외 여행은 평생 한 번 갔다오면 천하 행운아 대접을 받게 되는 폐쇄 사회에다가, 철지난 감자와 저질의 쇠고기를 사기 위해서 상점에서 한 시간 이상 줄서야 하는 물자 부족 사회에다가, 그나마 괜찮아 보이는 이태리산 신발 하나 사자면 노동자 평균 임금의 4분의 1을 주어야 하는 내핍 생활에다가, 볼품 없는 국산 자가용을 사기 위해 10여년이나 줄서서 기더려야 하고 매일 버스나 무궤도전차를 타고 다녀야 했던 사회....라고 이야기를 하니 딸은 “이게 악몽이냐”고 제게 물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녀의 예상과 전혀 달리, “악몽”이긴커녕 나는 거기에서 지금보다 훨씬 더 행복했다고 답했습니다. 


행복이란, 성적순도 아니지만, 재산액 수순도 아니고 정보량의 순도 아닙니다. 물론 행복하자면 일단 “기본적 욕구”들은 어느 정도 충족되어야 합니다. 즉, (줄 서서 사는 한이 있다라도) 식량과 (비좁더라도) 살 집, 다녀야 할 직장, 그리고 기본적 사회 안전과 성욕 충족 등의 가능성 (친밀 관계 가능성) 등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기본 욕구들이 충족되면 그 다음에는 물질적 번영의 증진이 가져다주는 행복 증진 효과는 상대적입니다. 즉, 예컨대 1983년 레닌그라도 36평방미터형 서민 아파트에서 살던 사람이 100미터 넘는 서구 중산층 아파트로 이사가고 나면 처음에야 “편안해졌다”는 느낌이 크겠지만, 그가 살 아파트 평수가 나중에 조금씩 늘어나도 이미 “편안한 아파트”에 익숙해져 뇌에서 행복 호르몬의 분비가 일어날 일은 그다지 없을 겁니다. 기본 욕구들이 어느 정도 커버가 된 시점 이후로는, 1인당 GDP 숫자는 행복 지수에 절대적 영향을 미치지 않습니다. 그러니 2021년 행복 지수로 치면 소득이 중간인 체코 (16위)는 고소득의 영국 (18위)보다, 역시 “소강 사회”인 대만 (19위)이 고소득인 프랑스 (20위)보다 각각 높이 올라간 겁니다. 참고로, 50위인 부자 나라 한국보다는 비교적 가난한 태국 (48위)이나 몰도바 (49위)는 더 높은 행복 점수를 받았습니다. 이유는 뭘까요? 



뇌가 ‘행복’을 느끼자면, 두 가지 요소가 결정적입니다. 안전감과 소속감입니다. 뇌는 불안, 불확실성, 위험 요소 등에 바로 아드레날린 분비로 대응하는 거고, 그럴 경우엔 행복감은 가고 없습니다. 그러니까 한국에서도 현재 “코리안 드림”이 있다면 바로 공무원 시험 통과와 “평생 철밥통”이 거기에 해당되는 것이죠. 그러니 세계 행복 지수 랭킨을 봐도 불확실성이 강한 영미형 사회보다는 “철밥통”의 전통이 더 강한 북구 사회들은 늘 우위를 차지합니다. 1983년 레닌그라드에서는, 비록 상점에 가봐야 철지난 감자나 두 번 다시 보고 싶지 않은 쇠고기 같은 것 밖에 안보였지만, 원칙상 ‘모두’들이 국영 기업이나 국가 기관에 종사하는 공무원들이었습니다. 물론 고급 공무원 (간부)이 결정권을 독점하고 저급 공무원 (노동자나 하급 인테리)에게 명령을 내리고 복종을 요구하는 사회는 “사회주의” 이상과 사이 멀었지만, 좌우간 “공무원 사회” 속에서의 안전감이 주는 행복 효과를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평균 직장 근속 연수는 6년 정도 되는 대한민국에서는 이와 같은 안전감을 느끼면서 살 수 있는 사람들의 비율은 과연 어떻게 될까요? 


도스토에브스키의 <죄와 벌>에서는 한 주인공이 “인간에게는 어려울 때에 가서 마음을 털어놓아도 될 사람이 꼭 필요하다”고 이야기하지 않았습니까? 1983년에 10살인 제가 살았던 사회에서는 적어도 “마음이 아프면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은 충분히 포진돼 있었습니다. 대체로 평생이나 적어도 수십년 동안 매일 서로 얼굴 보고 살아야 할 직장 동료들끼리 서로 경조사를 챙기고 필요하면 서로에게 돈을 꾸어주고 서로 아이들을 맡아 봐주는 것은 당연지사이었습니다. 이혼율은 매우 높았지만, 그래도 혼자 사는 사람들의 숫자는 비교적 적었으며, 이혼하고 나서도 누군가와 또 다시 결합하는 경우들이 더 흔했습니다. 살기가 현실적으로 여러모로 어려웠던 만큼 “우정” 이나 “친구와의 관계”는 또 거의 절대시되어, “친구”란 대체로 필요하면 예고 없이 찾아와서 며칠 같이 묵을 수 있는 정도의, 매우 가까운 관계에 있는 사람을 지칭했습니다. 그리고 직장 동료, 가족, 친구 등과의 소속 관계와 별도로, 그래도 대부분은 “지구를 보다 더 평등하게 만들려는 혁명 이후 사회”에 소속된 것을 다소 뿌듯하게 생각했습니다. 그 사회의 단점들을 다 알면서도 말이죠. 지금 1인 가구 비중이 40%나 되는 대한민국에서는, 만약 사람들에게 “아프면 가서 마음을 털 수 있는 친구”라도 충분히 존재했다면, 즉 원자화와 사회적 관계 단절이 덜 심각했다면 그래도 자살율이라도 좀 더 낮지 않았을까요? 


최신 휴대폰과 넷플릭스, 틱톡, 그리고 스냅차트나 인스타를 10분에 한 번씩 접속할 수 있는 것이 꼭 ‘행복’의 필수/충분 조건이 아님을, 아마도 제 딸내미도 결국 알 겁니다. 그러나 거기까지 알게 되는 그 시점에서는 이 후기 자본주의 세계에서의 개인 고립화의 정도는 과연 어디까지 높아질까요?


* 출처 : 박노자 Vladimir Tikhonov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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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 노자


오슬로대학교수, 한국학자, 칼럼니스트


소련의 레닌그라드(현재의 상트페데르부르크)에서 태어나 자랐고, 본명은 ‘블라디미르 티호노프’다. 2001년 귀화하여 한국인이 되었다. 레닌그라드 대학 극동사학과에서 조선사를 전공했고, 모스크바 대학에서 고대 가야사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노르웨이 오슬로 대학에서 한국학과 동아시아학을 가르치고 있다.


한국 사회에 대한 비판적인 칼럼들을 묶은 『당신들의 대한민국』 으로 주목받았으며, 『주식회사 대한민국』 『비굴의 시대』 『당신을 위한 국가는 없다』 『전환의 시대』 등은 이 연장선상의 저작이다. 『거꾸로 보는 고대사』 『우리가 몰랐던 동아시아』 『우승열패의 신화』 『러시아 혁명사 강의』 등을 통해 역사 연구자로서의 작업도 꾸준히 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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