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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루다가, 미루다가 일을 저질렀다. 용기를 낸 것이다. 마침, 눈 여겨둔 그 집 앞을 지나는데 문이 열린다. 한 아동이 가방을 들고 나섰고 선생님인 듯한 아주머니가 “잘 가!” 하며 또 보잔다. 돌아서는 그녀를 따라 들어갔다. 뜻밖에 들어온 손님을 손주들 레슨을 물어보려는 할배로 생각했던 모양이다. 어찌하여 그 선생님의 가장 나이 많은 문하생이 되었다.
사실, 간소하게 살자고 짐을 다 버려서 집이 썰렁하다. 그런데 피아노 한 대는 있다. 버릴 수가 없어서 두고 있는데 우두커니 입 닫고 있는 그를 보고 미안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가끔은 뚜껑을 열고 앉아 보지만 오른 손가락으로 애국가만 치다 말았다. 재미없다.
중국이 개방을 할 때에 많은 사업가가 중국으로 떠났다. 너른 시장과 값싼 인건비를 보고 간 것이다. 많은 악기회사들이 중국으로 갔다가 빈손으로 돌아오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지만 떠나지 않고 고전했던 한 회사는 버텨내었다. 사실 IMF의 위기에 부도가 난 회사는 은행도 골칫덩어리였던 모양이다. 입에 풀칠도 쉽지 않은데 누가 악기를 사겠는가 말이다. 망한 회사는 상한 생선이나 같다.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기 때문이다.
대학을 나와 겨우 취직해서 장가들고 아이들의 재롱이 한창인데 실직한 청년가장은 배고픔에 결단을 내린다. 재취업을 못해 놀고 있는 기술자들에게 성공하고 보자며 함께 일하자고 설득했고 그들과 함께 은행에서 회사를 인수받는다. 밀린 이자는 탕감 받고 1년 후부터 갚아 나가겠다고. 그로부터 10년이 흘렀다. 재롱둥이 아이들을 생각해서 위해하지 않은 재료로 질 높은 국산 악기를 고집했다. 값싼 중국산에 고전했지만 많아야 둘인 자녀들에게 부모들은 싸구려를 사 주지 않아 재기할 수 있었고 마침내 한, 큰 악기사의 디지털 피아노를 OEM으로 만들게 되었던 것이다. 그는 처음 만든 피아노 10대를 팔지 않고 기증을 하기로 했단다. 수녀님들이 운영하는 유아원을 포함해서 고마웠던 분들에게 전했다는데 어찌해서 내게 그 중의 한 대가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정말로 갖고 싶었던 것 중의 하나였다. 마침내 청소년일 때의 꿈이 이루어졌다.
읍내에서 20리 떨어진 산골에서 자랐던 나는 어쩌다가 짐차의 숨 가쁜 엔진 소리가 산을 울리면 달려 나가서 환영하곤 했었다. 짐차는 가끔 비료를 싣고 오거나 가을이면 농협이 수매한 나락을 실어 날랐다.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산골이어서 겨울이면 땔감을 들고 가 찬 바람 새는 교실에 난로를 피웠다. 음악시간이면 여럿이서 쪼르르 옆 교실에 달려가서 풍금을 들고 왔다. 페달로 풀무질하는 소리보다는 날라리가 크게 울렸지만 목쉰 어미 소의 울음만큼이나 힘들어하는 풍금을 그래도 즐겼다. 읍내의 중학교에는 음악실이 따로 있었다. 멀찍이서 보았지만 말로만 듣던 피아노가 거기 있었다. 그 피아노로 처음 배운 노래를 기억한다. “아득하다 저 산 너~머 흰 구름 머무는 고옷~ 그리운 내 고향으~로 언제나 돌아가아리~.....” 피아노는 잘 못 붙인 이름이었다. 포르테라야 맞다. 여린 것이 아니라 강했고 장엄했던 것이다. 목이 쉰 풍금과는 급이 달랐다. “저걸 내가 가지고, 배워야 하는데......” 사실 이 생각은 곧 거둬들였다. 언감생심이었다. 참으로 가난했던 시절이었기에. 그래도 그 생각의 싹을 자르진 못 했다. 그랬더니 길고긴 기다림 끝에 길이 열렸다.
내가 컴퓨터로 자판을 두드린 지가 40년쯤 된다. 아직도 안 보고 치지를 못한다. 서두르면 오타가 나서 더 오래 걸리니 잘 못 배운 것이다. 운지법을 제대로 배우지 않았던 것이 원인이다. 1986년에 자동차 한 대 값을 주고 286 컴퓨터와 24핀 도트 프린터를 샀다. 아래한글이 처음 나왔을 때 그걸 사서 시작했다. SPSS라는 통계프로그램을 깔아 밤새도록 계산을 시켰다. 컴퓨터가 느려서 한번 시키면 몇 시간씩 계산을 했던 것이다. 사실 피아노 건반은 컴퓨터의 자판보다는 몇 배나 더 어렵다. 높은음자리표는 겨우 익혔는데 그놈의 낮은음자리표는 헷갈린다. 오선을 벗어난 음표는 버벅거리며 센다. 낮은음자리표 대신에 높은음자리표보다 두 옥타브 낮은 것으로 치면 좋을 텐데 말이다.
‘미파’ 와 ‘시도’ 사이가 반음이어서 단조로움을 피하는 것은 좋지만 조 바꿈에는 어지럽다. 왼손과 오른손이 따로 움직여야 하니 악보와 건반과 손가락을 동시에 다 보는 것은 벅차다. 쉬운 곡은 악보를 외어버리면 되기는 하겠지만 말이다. 학원을 다닌 지 몇 달이 지났다. 한 마디를 익히느라 100번은 더 연습을 했을 거다. 9월에 들며 ‘9월의 노래’를 연습한다. 느리고도 더디지만 이제 안 보고 칠 수 있다. 물론 반주는 단순한 6박자지만 지루하지 않다. Am, Dm, E7, G, F의 5개뿐인 코드는 참 잘 어울린다. 그래서 화음(和音)이라 했나보다. 이들 화음은 왜 하나씩 건너야 잘 어울릴까? 이웃하는 두 건반은 대부분 잘 안 어울린다. 가까이에 있으니 잘 어울려야 할 것이 아니던가? 흘깃, 곁에 있는 아내를 쳐다보다 말았다. 피아노 건반처럼 가까이 있어서 잘 못 어울리는 건가? 화음을 양보한다고 될 일이던가 마는.....
‘9월이 오는 소리’에 가사가 또 그렇다. “가로수의 나뭇잎은 무~성해~~도~ 우리들의 마~으멘 나겨~업 이~지~고.....” 라는 대목이 있다. 사실 9월에 낙엽은커녕 단풍도 이르다. 그럼에도 내 마음이 들킨 것 같으니.... 자꾸 따라 부르니“9월이 우는 소리”로 들린다. 풀벌레 소리가 애잔해서 그렇고 밥 한 번 먹자, 술 한 잔 하자 하던 소리가 그립고도 아쉬워서 그렇다. 죽지 못해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이 시련이 빨리 지나가기를 기다리고 있는가? 모질고 독한 바이러스, 누굴 원망하겠는가. 今年看又過(금년간우과); 올해가 또 지나감을 보는데 何日是歸年(하일시귀년); 어느 날에나 돌아갈거나? 천년도 더 전의 시성 두보가 지금의 내 마음 같다. 향수병에 걸린 그의 시에서 한 글자만 고쳤다. 올봄을 올해로. 그러다가 또 울고 말겠다. 오늘도 “어디선가 부르는 듯, 당시인 새앵 가악뿌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