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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질랜드$5 지폐앞면에 등장하는 인물이 에드먼드 힐러리경이다.
대개 지폐의 앞면은 그 나라의 존경받는 인물들이 장식한다.
한국은 세종대왕, 퇴계이황, 율곡이이 등이 지폐위에 나타난다.
키위들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을 들자면 아마 힐러리경과
양자물리학의 선구자 러더퍼드경이 아닐까 !
1953년 세계최초로 에베레스트산 등정에 성공한 힐러리는 어느 인터뷰에서
왜 목숨을 걸고 산에 올라 가는가? 라는 기자의 질문에
“산이 거기 있으니 올라간다” 답을 한다.
그리고 그는 산을 정복했고 정상에 깃발을 꽂으면서 자연을 지배하는
상징적인 모습을 전세계에 자랑했다.
이후 그의 모험에 관한 미담은 지금도 회자되고
그의 도전정신/ 강인한투지를 재현하려는 시도는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
히말라야 14좌를 모두 올랐던 한국의 등반가 “엄홍길”은 힐러리경과 같은 질문을 받는다.
왜! 산을 오르는가?
엄홍길: 산이 허락을 하니 올라간다.
만약 허락치 않으면 멈추어야 한다.
산은 정복하는 것이 아니다.
발걸음을 내딛는 순간부터 산과 나는 하나가 된다.
내 몸만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도 함께 들어가야 한다.
사람마다 그 생각의 방향과 가치기준은 다르지만
두사람의 대비는 동서양사람들의 근본적인 문화적차이와 삶의 흐름이 다름을
여실하게 보여주는 좋은 example 이다.
修行(수행)을 둘둘 말아서 한 마디속에 집어넣어 보면 入(들입) 이라는
경계안으로 쏙 들어간다.
이전에 팔만대장경을 한 마디로 일러 心(심) 이라 했으나
오히려 入 이라 불러도 무방하다 생각한다.( 나의견해)
조금 과장해서 말하자면 교학전체가 추구하고 지향하는 도달점이 入!
이 한마디로 귀결된다해도 별 허물이 없어 보인다.
예를 들어 반야심경의 마하반야 바라밀에서 바라밀을 入 이라 바꾸어본다.
차안(이언덕) 에서 피안(저언덕) 으로
건너가는 것이 바라밀이며 방편을 의미한다.
진리의 입장에서 不去不來(불거불래) 즉 오는바도 없고 가는바도 없다는
부동심을 바라밀의 종착역으로 삼지만
이 경우는 이미 한 소식하시는 분들의 입장이다.
入 (들입) 은 들어간다는 뜻이다.
어떻게 /어디로 들어갈것인가?
예를 들어 밖으로 다니다가 집으로 들어갈때
우리는 대부분 玄關 (현관)을 지난다.
玄( 가믈현) 을 천자문에서 검다고 현토를 달지만
본래 玄 은 색깔로 표현할수없다.
가물가물하다고 본다.
“현”자는 누에가 고치를 짓고 나비가 되는 가물가물하게 나오는 과정을 말한다.
妙(묘함) 한 상태 즉 말로 나타내기 어려운 “카오스” 상태이다.
흑과 백이 드러나기이전의
태극상태 또는 공존상태라 볼 수 있다.
關( 관계할관) 은 관계하다는 의미인데 안과밖 양쪽에 중첩된 상황을 말한다.
옛날집들의 문지방도 마찬가지의 뜻을 담고있다.
현관은 집안과 바깥이 묘하게 겹쳐져 있는 장소라는 것이다.
현관을 거쳐서 마음을 한번 돌아보고 밖에서 일어났던 온갖 일들을 현관에서
신발을 벗어면서 한번 걷어내는 것이다.
마음을 씻어내고 어느 정도 비우고 가족들과 만날 준비를 하는 공간이 현관이다.
여러분들이 조금만 살펴보시면 우리 현명한 선조들께서 생활 곳곳에
지혜의 보금자리를 시설해 놓으셨다.
세심하고 오묘한 배려가 우리생활 군데군데 무수히 장치되어 있었지만
현대문명을 수용하는 과정에서 너무도 어이없이 맥없이
전통의 지혜가 무너져버리고 잊혀져 버린다.
좀 심하게 말하자면 물질문명의 편리하고 화려함에 취해서
근본적인 문화의 바탕을 놓쳐버린 모습이다.
과거에 비해 경제적으로 풍족해졌지만
문제는 더 많아지고 사람들 인심은 더 야박하고
서로가 서로에게 더 두꺼운 벽을 만들어 가면서 살고 있다.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선조의 지혜를 빌려야 할 때가 온것 같다.
물론 실용적인면에서 재 해석이 되어야 하지만 그 뿌리만큼은 복원 시켜야 하지않을까?
전통의 우리집구조는 신발을 벗지도 않고
곧 바로 집안으로 들어가는 서양의 구조와는 차원이 다르다.
반드시 현관을 거쳐서 집안으로 들어간다.
서양사람들의 인식속에서는 죽었다 깨어나도 현관이라는 공간은 만들어 낼 수가 없다.
현관은 단순히 기능적인 구분을 위해 설정한것이 아니라
집안으로 들어가기전 마음을 한번 추스리고
정화하는 곳이다.
밖에서 수많은 경계와 오욕에 시달린 마음을 좀더 청정하게 하고
신발을 벗고 벗은 신을
정성스럽게 가지런히 놓으면서 집안으로 들어간다.
그런 마음으로 나를 기다리는 가족들을 대하고 이것이 기본적 ”예” 라고 보았다.
이런 공간이 점점 사라지고 가끔 신발을 신을 채로 집안을 돌아다니는 서양문화를
아무생각없이 받아들이는 무심한 한국인들을 멍하니 바라보기도 한다.
옛말에 어느집을 가든 현관에 “신발이 가지런하지 않은집은 멀리하라” 는 속언이 있다.
현관과 신을 벗는 의미를 모르니 정돈이 안되는것이다.
入(들입) 에 관해 언급한다는것이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가 버린것 같다.
자!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보자!
산을 오르는것을 등산이라하고 산에 들어가는것을 入山( 입산 ) 이라 한다.
처음에는 몸이 산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내 마음도 함께 들어간다.
산이 내가 되고 내가 산이되고 둘의 경계는 사라지고
마침내 산과 내가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無心 (무심)의 상태를 入山 이라 말한다.
入學 (입학)도 마찬가지이다.
배우는 내용과 배우는 내가 처음에는 따로 존재하지만
깊어지면 둘사이의 분별은 사라지고
내가 學이 되고 學이 내가 되어 둘사이의 장애가
사라지는것을 무애(無碍) 라 일컫는다.
入 이 무심이며 열반이며 해탈이다.
다르지 않다.
대부분의 법상(法相) 이 入出 (입출)의 테두리에서 왔다갔다 할 것이다.
出(날출)은 入을 위한 휴식이며 여유이다.
悟入(오입) 도 마찬가지이다.
제대로 들어가면 悟(깨달을오) 할수밖에 없다.
세상사 성공하려면 入과 出을 제대로 할때 어떤일이든 완성될 수 있다.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入出은 그 사람과 하나가 되어 먼저 들어주는 것이다.
내가 그사람 마음속으로 먼저 들어가서 하나가 되려하고 경계가 사라지면
비로소 공감을 하고 소통을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