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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모로 보나 깜도 안되는 여자가 배우가 되겠다며 미용실을 제 집처럼 드나들던 친구가 있었다.
생머리를 고집하던 내가 허파에 바람든 그 친구덕(?)에 처음으로 미용실 구경을 하게 되었다.
그 미장원(미용실)은 충무로 입구쪽에 자리잡고 있었다. 햇볕 잘 드는 남향으로 아담한 규모에 분위기가 밝고 깔끔했다. 차분하고 조용한 젊은 여인은 주인 인듯 했다. 전쟁때 남편을 잃고 실의에 빠져있는 딸을 살리려고 친정 아버지가 차려준 미용실이란다. 미망인의 속사정을 알고나니 마음이 짠했다.
그래서였을까? 설치듯 지나치게 명랑하고 밝은 미용사 아가씨가 이 집 분위기를 이끌어 나가는 것 같았다. 그녀는 일손도 빠르고 부지런 했다. 바쁘게 손놀림 중에도 끊임없이 조잘대고 깔깔거리며 손님들을 즐겁게 해 주었다.
벌겋게 잘 피운 숯불담은 집게로 약 바른 머리를 말려 퍼머를 했던 때이다. 시간을 조금만 놓치면 지지직 금방 머리를 태우게 된다. 저리도 태평하다가 실수하면 어쩌지? 보는 사람쪽이 긴장이 되었다.
그녀는 평범한 얼굴에 입매가 약간 나온듯한 인상이어서 선뜻 호감이 가지 않았다. 그러나 두드러진 입 덕분에 말 이 그리 술술 잘 나오는지, 붕어 입이 다물새가 없다. 그런 그녀가 편해서 단골손님들이 생기는 것 같았다.
특별한 손질법이 있는지 피부 하나만은 유리알처럼 투명해서 돋보였다. 남의 머리는 잘도 만지면서 그의 머리는 언제나 가볍게 묶어 새꽁지 같았다. 옆으로 보면 삐죽 나온 입매와 영낙없는 새였다.
그녀의 가식없는 따뜻한 인간성이 처음의 낯설음을 달래주었다. 아무나 되지않는 그녀만의 재주였다.
수입에 보탬이 되는 머리손님도 아닌 나를 한결같이 반겨주었다. 자주 놀러오라는 말도 잊지 않았다. 의례적인 인사 치례로만 알았는데 은연 중 말 속에 진심이 숨어있음을 깨달았다. 늘상 밝아보이는 그녀에게도 외로움이 있을까?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면서 왠지 측은한 맘이 생겼다.
그 미용실 근처를 지날 때면 그냥 올 수가 없어 참새 방앗간처럼 들렀다. 바쁘게 일 하다가도 나를 보면 서둘러 쉬는 틈을 만들어 냈다. 반가워 해 주는 사람이 있다는 건 얼마나 괜찮은 일인가. 배맛처럼 감칠맛나는 마음 따뜻한 여인이었다. 사람 사귀는데 서툰 내가 이끌리듯 그렇게 그녀와 가까워져 가고 있었다.
나는 항상 그녀의 티없이 맑은 웃음을 보는게 즐거웠다. 열심히 일하는 모습에서 생동감 넘치는 에너지를 얻어오는 것도 좋았다. 아이처럼 순진한 너스레도 배우고 싶었다. 이뤄낼 수없는 좌절의 꿈도 그녀 앞에선 가능성으로 바뀌는 듯 힘이 생기는 것 같았다.
그녀가 처녀가장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얼마나 큰 충격을 받았는지 모른다. 두 동생들 공부시키는 무거운 책임을 맡은 누나라는 사실에 아연했다. 각박한 삶에 찌든법도 한데 전혀 느낄 수가 없으니 천성을 그렇게 타고난 여자라고 생각했다. 그녀가 존경스럽기까지 했다.
어느 날 문득 비밀 이야기를 해 주겠다고 내 귀에 대고 속삭였다. 한참이나 뜸을 들이더니 얼굴을 붉히며 멋진 애인이 있다고 아주 작은 소리로 말 했다. 목소리가 약간 떨리는 듯 했다. 그녀답잖은 조심성에 눈만 동그랗게 뜨고 바라봤다.
생각지도 못한 의외의 말에 정말 많이 놀랐다. 나다닐 시간이 없어 친구 하나도 없다는 말은 엄살이었던가. 애인이라니?..
그냥 애인도 아니고 멋진이란 서두를 붙이니 궁금증에 앞서 슬며시 부러운 생각이 먼저 들었다. 너무 미남이여서 누구에게 뺏길까봐 마음이 안 놓인다고 첫 말은 엄살이었다. 불안을 드러내는 척 하지만 사실은 자랑이란걸 알수 있었다.
인물도 없는 자기가 분에 넘치는 미남을 만났다고 했다. 사실 더 대단한 행운은 그 남자의 착한 마음씨라고 마냥 추켜세우며 자랑을 늘어 놓았다. 해군 사병인 남자는 현재 진해에 복무중이란다. 입밖에 냈다간 유리처럼 깨질것같아 맘속에 깊이 숨겨놓고 조심스럽게 혼자서만 즐기며 행복하고 싶단다.
어떻게 만났는지는 물어보지 못했다. 비밀 지켜달라는 당부가 먼저여서 나중에 물어보기로 했다.
현실의 어려움을 버텨내고 늘 밝게 웃을 수 있는 에너지가 바로 그거였구나.
20대 청춘의 연애감정에서 솟아나온 샘물같은 맑은 영혼,남녀간의 사랑이란 그렇게 대단한 힘이 있다는걸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그녀의 비밀을 공유한 우리는 한 편이 될 수 밖에 없었다. 그 날 이후 가슴가득 벅찬 감동을 드러내고 싶어 나를 기다렸다. 안달스럽게 내 눈치를 보지만 번번히 솔직한 속내를 들켰다. 자랑하면 행복이 2배로 커지느냐고 비아냥거리면 그렇다고 웃었다.
애인에게서 어떤 내용의 편지가 왔다는 둥, 언제가 휴가인데 상경할꺼라는 둥, 얘기거리가 항상 많았다.
때로는 얄밉기까지 했지만 연애의 단맛을 전수받듯 나도 따라 기분좋아지는게 나쁘지 않았다. 그를 따라 내게도 어떤 행운이 찾아들 것만 같은 야릇한 감정이 생기기도 했다.
이번 쉬는 날엔 자기가 진해로 내려갈 것이라고 날짜를 꼽았다. 벌써부터 흥분으로 들떠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준비할게 많은데 손님이 끊이질 않아 시간이 안 난다고 안타까워 했다. 마음이 들떠서 남의 머리 태우는건 아니냐며 걱정을 해 주었다. 그런 일 없다는듯 나온 입을 삐죽 내밀었다.
그녀가 까운 포켓에서 꺼내 내민 메모장에는 준비할 것들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치약, 칫솔, 양말, 편지지, 봉투, 간식, 속옷 등. 마치 남편을 챙기는 아내의 모습 같았다. 그렇게까지 해야만 하는건지.. 분수 못 차리는 여자같아 기분이 묘해졌다.
사랑이 도대체 무엇이길래... 한살 위인 나도 아직 모르는 다른 세상에서 사는 그녀가 얄밉지만 대단해 보였다.
풋과일처럼 풋풋하고 싱그러운 첫사랑은 그런건가?. 현실적인 미래의 계획같은 건 아직 말 해 본적 없다고 했다. 헤어지면 서로가 보고싶고 그리워지는 게 사랑인지, 만나면 즐겁고 행복하단다. 서로 뜻이 맞아 점점 뜨거운 열정으로 달아오르는게 사랑이란다. 달콤하고 아름다운 꿈을 서로 나누며 상큼한 청춘을 누리는 것이리라.
그녀가 한달음에 달려 ‘진해’에 다녀오면 얼마나 많은 이야깃꺼리가 생겨날지? 가슴 두근거리며 기대를 했다.
그러나 그들의 행복은 거기까지가 전부였다. 행운의 여신은 더 이상의 행복을 그들에게 주지 않았다. 하늘도 무심하시지...
갑작스러운 사고 소식이 날아들었다. 미쳐 숨돌릴 사이도없이 숨졌다는 남자의 비보를 듣고야 말았다.
어찌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 신이 있다면 무슨 연유로 그들을 버리려 하시는지 따져 묻고 싶었다. 그녀는 진해가 아닌 하늘나라로 애인을 만나러 떠나야만 했다.
며칠 후 순임의 소식을 신문 사회면에서 보게 되었다. 한귀퉁이 20대 여성의 자살소식이 실려 있었다. 원인은 생활고로 이름은 가명이었지만 그녀라는 걸 금방 알아차렸다.
반드시 그렇게 해야만 하는게 아닐지언정 그녀는 그렇게 하고야 말았다. 그녀의 부모님들은 딸이 힘든 생활고에 못견딘 것이라고 생각했기에 그렇게 말했던 것이었다.
날씨 화창한 어느 날. 딸이 극장표 두 장을 내밀어 어머니 손에 쥐어주었다. 부모님께 효도한번 못했다는 딸의 마음이 기특해서 눈물이 났다는 어머니었다.
그 마지막 순간, 빈 집에 혼자남아 그녀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독한 여자. 순임이.
아껴입던 고운한복 말끔히 차려입고 반듯하게 누워 그는 그의 곁으로 떠나갔다. 그들은 하늘 나라에서 만났을까? 지금 어느 별에서 살고 있을지...
하얗게 백지같은 가슴에 사랑하나 심어놓고 행복했던 여인. 짧고 간결하게 살고 간 순임이.
오랜세월 저 편, 순정시대를 살았던 친구와의 빛바랜 추억 한자락이다.
옛 친구의 상냥한 미소가 흐릿한 노안으로 떠오르는 오늘이 참으로 별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