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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명한 열정
꿈으로 가는 길에 산재한 불확실성을 걷어내는 것은 열정이 아닐까. 적어도 로르에겐 그랬다. 아프리카 카메룬에서 나고 자란 로르는 10살 때 프랑스에 살던 이모에게 입양됐다. 대학에서 경제학, 대학원에서 회계학을 전공한 뒤 삼성전자 파리 지사에 취업했다. 직장 생활은 즐거웠다. 동료들과 마음이 잘 맞아 종종 자정이 되도록 함께 일하고도 퇴근할 땐 헤어지기 아쉬운 마음이었고 집에서 빵을 구워 회사에 갖고 가서 나눠 먹는 소소한 기쁨이 있었다. 2015년, 그 기쁨을 뛰어넘는 ‘경이로운 기쁨’을 만났다. 마치 환한 봄 하늘만을 봐오던 어느 날 만개한 벚꽃세상의 찬란함을 본 것 같았다. 파리의 한국문화원에서 열린 민혜성 명창(국가무형문화재 5호 판소리 흥보가 이수자)의 판소리였다.
처음 판소리를 들었을 때의 느낌을 묻자 “말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새로운 아름다움이었어요.”라는 답이 돌아왔다. 2주 동안 빠짐없이 판소리 공연을 본 로르는 소리를 듣는 사람이 아니라‘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판소리를 연습해볼 공간이 마땅치 않아 차가 많이 다니는 길가에서 차들이 지나갈 때마다 목청껏 한 대목씩 부르다가 본격적으로 소리를 배우기 위해 2017년 2월 한국에 왔다. 이듬해 10월에는 프랑스 엘리제궁에서 열린 한·불 대통령 만찬에서 흥보가 중‘돈타령’을 불렀다. 2019년에는 전국판소리경연대회에서 다문화 부문 최우수상을 받았고 2020년부터 한·아프리카재단 홍보대사로 활동하고 있으며 올해는 한국예술 종합학교 전통예술원에 입학했다. 해마다 성장하는 소리꾼 로르의 곁에는 파리에서 그에게 판소리를 접하게 해주었고 함께 배운 친구 빅토린이 있다. 파리3대학에서 문화매체를 전공한 빅토린은 번역가가 되기 위해 한국에 왔으며 춘향가 중‘사랑가’를 불어로 번역하기도 했다. 하루하루 이어지는 빼곡한 배움의 과정, 어렵사리 시간을 내어 두 친구는 처음으로 쌍계사를 찾아 처음으로 템플스테이를 경험했다.
"이 순간을 마음 밭에 고이 간직했다가 마음 꽃을 피우세요!"
쌍계사 템플스테이 지도법사이자 전통문화예술관 관장을 맡고 계신 혜문(慧門) 스님의 눈높이 설명은 두 외국인의 얼굴에 웃음 꽃을 피웠다. 스님은 절을 ‘수행자의 학교’, 사천왕을 절을 지키는‘보디가드’라고 이야기했다.
“수행처는 자연스럽고 정결하고 조용한 곳입니다. 사천왕이 수행처를 지켜주지요. 자, 어떤가요? 보기만 해도 든든하지요! 살다보면 마음을 힘들게 하는 이런저런 나쁜 생각이 들기도 하지요? 그것을 극복케 하는 내 마음의 힘도 있지요. 희망, 배려, 연민, 용기-. 그런 것들을 마음의 사천왕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스님과 함께 두 사람은 일주문과 금강문, 천왕문을 거쳐 팔영루 옆 옥천교에 이르렀다. 옥천교를 이루는 108계단의 바탕이 되는 상징은 108번뇌이다. 우리의 여섯 가지 감각과 그 감각이 자아내는 여섯 가지 상황이 36가지 번뇌가 되고 그것이 과거, 현재, 미래의 삼세에 걸쳐 모두 108가지의 번뇌를 일으킨다는 설명을 들으니 딛고 서는 계단 하나가 예사롭지 않다. 경사가 높은 옥천교 앞에서 아연실색하던 로르와 빅토린은 스님께 108번뇌에 대한 설명을 들은 뒤 계단을 헤아리며 올랐고 뜻밖에 쉽게 오를 수 있었다고 했다.
108계단의 끝에 이르러 단박에(頓) 깨닫게 된다(悟)는 희망의 문, 돈오문(頓悟門)을 지나 금당에 이르렀다. 로르와 빅토린은 운이 좋았다. 육조혜능 대사의 정상(頂相, 두상)을 봉안하고 있는 전각인 금당영역은 수행자의 공간으로 일반인의 출입이 제한되어 있으나 하안거, 동안거 해제 후 3개월은 개방하는데 마침 그 때에 온 것이다. 더욱이 혜문 스님께서 스님들이 수행하고 계신 금당 옆 서방장에서 차담을 나눌 수 있도록 허락을 구해주셨다. 여백으로 가득한 서방장 안의 문을 열자 봄 햇살의 온기와 깃털 같은 봄바람이 일렁였다.
“저처럼 앉아보세요. 마음을 편히 하고 눈을 감고 생각해보는 겁니다. ‘나는 누구인가?’”
3분여 참선을 마친 로린이 연신 감탄사를 쏟아냈다. “와, 와우! 신기해요! 이 느낌!”빅토린이 환한 웃음으로 공감을 표했다. 서방장 툇마루에서 스님이 차 한 잔을 권하셨다. 천년의 역사를 간직한 쌍계사의 차이다.
“자, 차 한 잔 드세요.”
“스님, 차 맛이 참 좋습니다.”
“차는 몸과 마음을 모두 맑게 해줍니다. 지금 이 순간, 참 좋지요? 이 순간을 마음 밭에 고이 간직했다가 살아가면서 어려울 때에 기억에서 꺼내어 마음 꽃을 피우세요!”
스님의 눈길을 따라가니 문득 금당 처마 아래 현판‘세계일화(世界一花)’에 이른다. “세상은 한 송이 꽃” 이라는 가르침이 가슴에 사무친다. 꽃은 드러나는 아름다움 너머‘사이’에 있어서 아름답다. 봉오리와 열매 사이, 피어남과 짐의 사이. 눈부신 꽃의 아름다움은 지속되지 않고 지듯이 세상만물은 변한다는 무상(無常)의 가르침은 어깨를 다독이며 속삭여준다. ‘이 또한 지나가리니. 집착하지 말라. 상처받지 말라.’
쌍계사에서 만난 소리들
“스님, 어떻게 나무에서 이런 소리가 나지요? 처음 들어봐요. 와우, 와우!”
“자, 이렇게 쳐봐요. 우리 불교 수행자들 사이에서 목탁소리는 약속이기도 해요. 이렇게 한 번 치면 공양하러 오세요, 두번 치면 울력하러 오세요, 세 번 치면 참선하러 오세요~하고 전하는 것이지요. 긴 말이 필요 없지요.”
로르가 서방장 나무 기둥에 걸려있던 목탁을 신기해하자 혜문 스님이 스스럼없이 목탁 치는 법을 알려주셨다. 역시 소리꾼이라서인지 처음 치는 솜씨 같지 않다고 칭찬하셨다.
목탁을 치는 로르의 얼굴이 동자승처럼 천진난만했다.
쌍계사 경내 어디든 발길 머무는 곳에서 잠시라도 눈을 감고 귀를 열어본다. 천년고찰을 휘감고 흐르는 계곡 물소리, 산새 소리, 대숲을 흔드는 바람소리, 그윽한 범종소리, 맑은 찻물 내리는 소리-. 쌍계사표 소리의 종합선물세트를 받은 로르는 신기하다고 말했다. “서울에서 좀 오래 걷거나 하면 무릎이 아팠어요. 가파른 계단은 진짜 힘들었는데 여기서 108계단을 오르는데 힘들지 않았어요. 가벼운 느낌이었어요.”
빅토린도 덧붙인다. “문득문득 뭔가 충만한 느낌이 들었어요. 친구와 함께 있어서 좋은 느낌인데 함께 있으면서도 저 혼자 온전히 존재하는 느낌! 쌍계사의 자연, 소리가 자아내는 평온함이 제 마음을 채워줬어요. 이 느낌도 잊지 않고 간직할 거예요.”
희망을 품고 피우는 소리 꽃
보슬비 내리는 봄날 아침, 대숲 인근 샘물가에서 송이째 떨어진 동백꽃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떨어져도 아름다운 꽃이라고 감탄하는 두 친구에게 다가갔다. 현답을 기대하며 판소리가 왜 좋은지 우문을 건넸다.
“한마디로 말하긴 어려워요. 음악적으로도 아름답고 어렵지만 배우는 재미도 각별하고-. 그래도 제게 가장 큰 매력은 가슴 뭉클한 ‘치유의 힘’이에요. 판소리에는 ‘좋은 일을 하면 좋은 일이 온다.’는 가르침이 담겨있어요. 그 가르침이 제 마음에 큰 힘을 주었어요. 전 어릴 적부터 아이들을 좋아했어요. 열심히 소리를 배워서 고아, 장애아 등 어려움을 겪고 있는 아이들에게 판소리를 가르쳐주고 싶어요. 그 치유의 힘을 나눠주고 싶어요.”
상기된 로르의 볼이 동백꽃빛으로 물들었다. 선명한 열정으로 희망을 만들어가고 있는 소리꾼. 그가 피워갈 소리 꽃은 우리 사는 세상에 빛을 더할 것이다. 끊임없이 흐르며 스스로 맑아지는 쌍계사 계곡에서 소리꾼의 사철가 한 대목을 들었다. 한 구석에 어둠이 쌓여 있던 마음의 방에 봄빛 조명이 일제히 켜졌다.
■ 하동 쌍계사
꽃과 인연이 많은 곳, 쌍계사는 육조 혜능스님의 정상(두상)을 모시고 귀국한 두 화상이 “눈 쌓인 계곡 칡꽃이 피어 있는 곳에 봉안하라”는 계시를 받고 세운 절이다. 게다가 봄마다 상춘객이 붐비는 하동십리 벚꽃길의 종점이 이곳 아닌가.(쌍계사의 벚꽃이 가장 마지막에 진다.)
템플스테이 공식 홈페이지에서 템플스테이를 예약한 후 쌍계사 템플스테이 공간인 전통문화예술관에 도착하면, 창문 너머로 훤히 쌍계사를 조망할 수 있는 광경에 놀라고 새로 지어 깔끔한 숙소에 또 한 번 놀라게 된다. 전통문화예술관은 관광객의 통행이 적어‘쉼’이라는 템플스테이의 테마에 집중할 수 있다.
예술관 앞 돌다리를 따라 도랑을 건너면 쌍계사의 경내에 진입할 수 있고, 첫 번째 만나는 전각인 해행료 1층에서 공양을 할 수 있다. 식사는 제때에 맞춰야 하니 담당자의 안내에 귀기울여야 한다.
사찰 곳곳이 모두 절경이지만 경내에서 2.5㎞ 떨어진 불일폭포는 꼭 한 번 들러야 할 명소다. 동행자와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며 1시간 30분 정도 포행하면 폭포에 다다를 수 있으니 힘에 부치더라도 시간과 체력에 여유가 있다면 도전해 보기를 권한다. 덧붙여 코로나19 시국이라 휴식형 프로그램으로 진행되나 동반객이 4명 이하면 스님과의 차담이 가능하니 미리 담당자에게 요청해야 한다.
경상남도 하동군 화개면 쌍계사길 59│010-6399-1901
ssanggyesa.templestay.com
■ 제공: 한국불교문화사업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