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찝차를 타고 타조 뒤꽁무니를 계속 쫓아가다 보면 타조는 제 풀에 지쳐서
땅바닥에 코를 박고 쓰러진다고 한다.
한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고 앞으로만 내달리는데
어쩌다 한놈이 에이!
“기왕에 잡힐건데 뭔지 알고나 달려가자” 하고 뒤돌아 보고 깜짝 놀라
어! 별거 아니구나! 괜히 도망쳤네
다시 정신차리고 다른 방향으로 되돌아 간다.
우리 주변에 넘볼수 없는 권위로 둘러진 숭고함을 정면으로 한번 바라보자.
수행중 만나는 선문답 /화두가 그 중 하나가 아닐까한다.
논리학에서 파라독스 (PARADOX) 즉 역설이라는 용어는 쉽게 볼수 있다.
이렇게 말해도 틀리고 저렇게 말해도 답이 아닌 경우다.
흔히 자가당착이라 하기도 하고
뭐 묻은놈이 뭐 나무랜다, 적반하장 등이 유사한 말들이다.
이것은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가 얼마나 엉터리인지 지적한다.
예를 들어 “낙서금지” 라는 말은 스스로 낙서를 할 수 밖에 없다.
자가 당착이다.
집 담벼락에 내가 낙서금지 하고 크게 써놓으면
그것 역시 낙서가 아닌가?
떠들지마! 하고 소리치면 Paradox 에 빠진 것이다.
스스로 떠들고 있다.
할 수도 없고 안 할수도 없는 상황이다.
“비가 내린다” 할 때 비가 따로 있고
내리는 작용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니다.
비와 내린다는 서로 얽혀있다 .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사건이다.
이 하나의 사건을 언어로 표현할 길이 없다.
그래서 옛 선사들이 언어도단 /불립문자라 소리치는 것이다.
(언어가 끊어진 자리/ 문자를 세울수 없다)
그런데 선사들이 말하는 여기도 자세히 들여다 보면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
이 역시도 자가당착이다.
그래서 옛 선문답을 보면 갑자기 고함을 “할”하고 지르거나
항아리를 발로 차거나
말없이 차를 한잔 마시거나..
행동으로 대답을 보여준다.
처음 대하면 신비스럽고 생각의 길이 턱 막혀버린다.
본래 선문답을 풀면 안되지만
지금 시대가 이미 무엇이든 감출수 없는 시대에 살고 있다.
인터넷을 들어가보면 벽암록이나 공안 풀이는 널려있다.
공안도 칠,팔백년 사용했으면 이제 손볼때도 되지 않을까! 자문해 본다.
아니면 시대에 맞추어 새로운 해석을 해봄직도 하다.
비가 내린다 / 바람이 분다.
의미가 중첩되어 있다. “비” “바람” 한 단어면 충분히 뜻이 전달된다.
이렇듯 분리할 수 없는 사태를 우리는 언어로 끊어버리고
주어와 서술어로 떼어놓는다.
그리고 그것이 당연한듯 사용하고 있다.
선문답은 여기서 출발한다.
이미 서양의 논리학에서도 이러한 문제를 발견하고
해결책을 무수히 내놓았다.
중국 선불교 1700개 공안 역시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도 아니고 이미 오래전부터 전해져 오던 것을
중국 선사들이 손을 좀보고 상황에 맞게 1700개의 선문답을 정리한 것이다.
그 중심담론은 중도(中道) 사상이다.
중도는 가운데로 가라는 것이 아니다.
유교의 중용이나 시중과도 다르다.
간단히 말하자면 한 쪽으로 기울면 반대쪽으로 확 끌어당긴다.
극단적으로 당겨버린다.
그렇게 양단에 기울지 않도록 극단의 칼날을 들이댄다.
선문답의 예를 하나 들어보자!
지금 한국불교의 주류인 간화선 (화두선) 에서 유명한 무(無)자 화두를 보자.
조주선사에게 수행자가 물었다.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
조주왈: 無 (무) 없다!
수행자: 스님 전에 모든 중생에 불성이 있다 하셨는데
오늘은 왜 없다 하십니까?
조주: ......
이 화두가 지금도 하안거 동안거에서 많이 거량하는 결구다.
이 화두를 들고 왜 무! 무!라 했는고 하고 참구한다.
내가 그런 경험을 못해서 전부 이해는 할수가 없지만
그 동안 여러번 답에 대해 질문도 해보고
기웃거려봐도 누구도 일러주는 바가 없었다.
관례나 전통은 어느정도 알고 있으나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참으로 답답했다.
스스로 길을 찾는 수 밖에 다른 도리는 없다.
위의 무자 화두의 답은 이미 언급했다.
중도! 가 답이다
있습니까? 하고 물으니 없다고 대답하고
없습니까? 하고 물으면 있다 하고 대답할 것이 뻔 하다.
한쪽으로 치우쳐서 집착하는 망상을 끊어버리려는 의도가 숨어있다.
수행자가 묻는다
부처가 뭡니까?
답: 마른 똥막대기!
이 선문답도 마찬가지이다.
부처라는 상(相)을 가지고 질문을 하니 반대쪽으로 확 끌어 당겨버린다.
똥막대기 라고 말하니 수행자는 말문이 콱 막힌다.
곰곰히 생각하니 여기도 중도다. 중도가 “공” 이다.
이외에도 내가 접한 선문답 (공안)들이 대부분 역설(PARADOX)과 중도의 경계를
벗어나는 것은 없었다.
만약 알음알이라도 이렇게 화두를 풀어 버린다면
어떤방향의 수행을 해야하는가?
지금도 소위 큰 스님이라 하시는 분들이 높은 단상에 올라
주장자를 들고 한바퀴 쓰억 돌리거나 쿵! 하고 내리치는 것도
언어자체가 역설의 구조에서 벗어나지 못하니 말을 하지 않고
행동으로 전달하는 것이다.
즉 불립문자/ 언어도단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내 견해로서는 이해하기 힘들다.
언어도단/ 불립문자는 어떤 상황이 일어났을 때 드러내는 것인데
아무일도 없는데 처음부터 표현하는 것은 위험하다 본다.
그 모습이 TV 방송되면 온 국민들이 다보게 되는데
처음 보는 이들이나 초심자들에게 어떻게 이해될 것인가?
위험하다!
그것이 모든 수행의 기준이 된다고 착각하기 쉬울 빌미를 주는 것이다.
법을 전하는 것이 오히려 법을 망칠수도 있다고 본다.
다만 근기가 수승한 수행자들끼리면 별 허물이 없어 보인다.
고승 경봉선사는 평생 주장자를 들지 않으셨다.
단상에 올라 조용히 책을 펴시고 죽비 내리칠 동안 책만 보고 계셨다.
나는 경전을 보지 않고 수행함을 자랑하는 풍토를 보고
놀란적이 한두번이 아니다.
언듯 봐도 아직 오전반 인듯한데도 스스럼없이
불립문자를 내 뱉는 수행자들이 넘친다.
시대의 변화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기존의 관습대로만 이어 가려함은 당장은 편하겠지만
결국 외면당할 수 밖에 없다
이치가 그렇치 않은가?
또한 깨달음을 누가 인가해 준다는 것이 과연 타당한 일인가?
동질의 집단속에서는 가능할지 몰라도
보편적으로 적용한다는 것은 글쎄?
이것도 화두 인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