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쌀이 귀했던 시절이 있었다.
지금처럼 쌀을 쉽게 간편하게 구할 수 있는 경험은 과거에는 찾아보기 힘들다.
불과 사/오십년전만 해도 동네마다 쌀 가게가 있었고 한가마니, 10KG, 20KG 단위로 파는 것보다 한되, 두되씩 됫박으로 사고 파는 것이 다반사였다.
단단해 보이는 참나무로 만든 한되짜리 됫박에 쌀을 담아서 종이 봉투에 담아 건네준다.
쌀을 됫박에 담으면 밥공기처럼 위로 올라오는 볼록한 부분이 생기는데 이를 고봉이라 한다.
주인이 되질을 할때 쌀 됫박 위의 고봉을 깍아내리는데 고봉을 깍는 막대기를 평미래라 불렀다.
되질을 할때 양을 일정하게 하기 위해 사용하는 원통형 막대를 평미래, 평자, 개자 라고도 한다.
어려웠던 그 시절 하루벌어 하루 살아가던 서민가장들은 퇴근할 때 한 손에 쌀봉다리 다른 한손에는 연탄 2장을 새끼에 꿰어서 들고 집으로 가는 것이 소소한 행복이었다.
형편이 좋아 고기한근, 과자한봉지라도 들고 가는 날이면 온 식구들 얼굴에 웃음꽃이 피던 시절이었다.
개념(槪念) 이라는 말은 이전에는 사용하지 않던 현대적인 용어이다.
槪(개)는 평평하게 밀어버린다는 평미래 "개" 자다.
念(념)은 우리의 생각, 의식과 관련이 있다.
다시 말하자면 나의 생각속의 볼록한 고봉을 평자로 싹 밀어버리고
일정한 한됫박짜리로 만든다는 말이다..
한되짜리 됫박속에 남아있는 양은 똑 같다.
여분의 것을 깍아내고 공통의 형태로 말끔하게 모양을 만든다.
한되라는 정해진 틀속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않는 보편적 용량을 만들어내는 것이 槪念(개념)이다.
우리의 언어가 대개 개념의 틀 속에서 이루어진다.
편리하고 누구나 동의하는 개념의 동일성에 별 저항감없이 살다가
가끔 사라져 버린 자신의
고봉을 생각하고 찾아보려는 시도를 하는 돈키호테들이 있다.
이들은 자신의 삶의 테두리에 미세한 틈을 만든다.
유리잔에 조그만 틈이 생기면 시간이 지날수록 서서히 균열의 공간이 커지고 갈라지듯이
그는 자신의 고봉을 찾기위해 끝없이 균열의 영역을 확장한다.
커져가는 틈은 단순히 파괴하고 해체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본래의 출발점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힘을 제공하기도 하고 스스로에게
why! what! 이라는 질문울 던지기도 한다.
균열의 시작은 불안과 불만에서 일어난다.
원인과 결과 속에서 반복되는 일상의 빤한 루틴을 견디지 못하고
마침내 닫혀진 튜브속에서 작은 구멍을 발견하고
그 간격을 점점 확장시켜 자신의 몸이 빠져 나올만한 공간을 만들고
튜브밖으로 나와서 자신이 속해있던
그 곳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나서 새로운 경험의 세계속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균열은 모여있는 질서를 해체하고 파괴하는 부정적인 모습인 동시에 새로운 공간을 통해
그 동안 경험하지 못했던 시원한 빛을 보고 신선한 공기를 맛 보는 기회이기도 하다.
오염되고 무겁게 가라앉던 몸이 오랫만에 생동하는 에너지를 만난다.
강물은 끊임없이 흘러가고 바람은 어디서 오는지 어디로 가는지 모르게 나의 뺨을 스치고
들판의 이름모를 꽃은 스스로 그렇게 피고 진다.
인간들과 상관없이 수백만년, 수천만년동안 그렇게 흘러가고 그렇게 왔다가 간다.
개념은 그 흐름을 막아 수로를 차단하고 댐을 만들어 저장하고 멈추게 하여 인간들이 필요할 때
언제든 유용하게 쓸수있는 대상으로 바꾸어 버린다.
이 모든 복잡한 공정을 순식간에 해치우는 것이 언어고 그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것이 명사다.
나무, 안경 , 가방, 새, 매미, 꽃... 딱 떨어진다.
한 생명이 한 단어에 쑥 들어가버린다.
눈앞의 거대한 산이 말 한마디에 꼼짝 못하고 갇혀버린다.
언어는 이 세상 어떤것도 표상으로 만들어서 눈앞에 즉시 가져다 놓는다.
신통도 이런 신통이 있겠는가?
한마디면 충분하다.
더 이상 관심을 기울일 필요도, 이유도 없다.
모든 것이 대상화되고 언제든 쓸 수 있는 도구가 되어버렸다.
인간은 이제 사물들 /생명체들의 주인이고
그들은 5분 대기조처럼 항상 인간의 기호에 따라 처분될 준비를 마친 셈이다.
인간의 고통은 대개 서로의 관계속에서 일어난다.
수많은 정보와 개념으로 무장한 그들은 서로서로 실타래처럼 얽혀서 살아간다.
인드라망 처름 촘촘한 선으로 연결되어 있다.
보이지 않는 선은 점점 두터워져간다.
점점 복잡해지는 네트웤의 실선을 처리하기 위해 보다 더 정밀하고 간결한 개념과 은유들이 인간의 등뒤로
겹겹이 둘러지고 있다.
두꺼운 실선은 끌어당기는 힘이 점점 강해져 간다.
실선은 틈이 없다.
그리고 직진한다.
점선은 모든 구간에 빈 곳이 있다.
그 사이로 바람이 들고 햇살 속에 자욱한 먼지들이 춤을 추고
창밖의 새소리도 스며든다.
자유롭다.
열려있다 .
그리고 일방적으로 끌어당기지 않는다.
필요할 때는 점선들 스스로 뭉쳐서 가느다란 실선을 이루어낸다.
간섭할 일이 없다.
다툴일도 없다.
점선과 실선의 양면을 바라볼 수 있는 새로운 시선의 출발을 위해
첫 걸음을 내딛는것도 균열을 통해서 일까?
처음 내딛는 걸음은 두렵기도 하고 힘들기도 하다.
이때 기재의 관성이 다시 나를 제자리로 제자리로 잡아당긴다.
그리고 대부분의 지인들은 그 출발을 우려하고 위험에 대한 경고의 한마디를 던진다.
새로운 세계에 대한 설레임/ 기대 보다는 눈앞에 있음과 손안의 소유를 상실할 위험/ 파괴를 일러준다.
그러나 몇몇 돈키호테들은 기어이 로시난테 등에 오른다.
중력의 사슬을 끊어버리고 심연에서 밀려오는 질문의 경로를 따라 아무도 말해주지 않는
그길로 묵연히 나아간다.
오로지 성현들의 등불과 내면에서 치고 올라오는 그 알수없는 화두! 그리고 간절함을 손에 움켜쥐고
기어코 자신의 경계 가장자리에서 균열의 차이를 만들어 낸다.
돈키호테는 짜라투스트라와의 만남을 확신하고
로시난테, 산초와 함께 숲으로 향해간다..
- SOUNDS OF SLIENCE-
돌고 돌아서 바라보니 내 방안이로다!
다만 보는 마음만 예전의 모습이 아닐뿐!
(행행본처 지지발처 行行本處 至至發處)
色卽是空 空卽是色
(색즉시공 공즉시색)
무위(無爲)의 유위(有爲)!
색은 구하고 소유하는 상(相)!
색(色)은 얻는바 없는 얻음이고 구한바 없는 “상”이다
수행은 언어의 한계속에 갇히지 않는 것!
동시에 그곳의 심연으로 한없이 들어간다
그후 禪定(선정)은 침묵의 소리를 듣는다
* 본문의 평미래에 관한 글은 최진석교수의 논문을 참조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