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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느 때처럼 맴생이 두 마리를 끌고 들로 나왔다. 얼마 전 아버지가 암컷 맴생이 한 마리를 사와 맴생이 친구가 하나 더 늘었다. 산과 들이 기지개를 펴고 응달 진 비탈의 잔설이 사르르 녹아 파릇한 새싹들 틈으로 스며들었다. 우리에 갇혀 있던 맴생이들이 밖에 나오자 껑충껑충 뛰며 좋아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아버지는 내게 맴생이가 새끼를 쳐서 늘어나면 팔아서 송아지를 사 준다고 했다. 송아지가 크면 중학교 갈 때 학자금이 될 것이라고 했다. 맴생이는 친구이기도 하고 미래의 희망이며 든든한 후원자였다.
냇가에 이르렀을 때 마을 어귀 쪽에서 누군가 자전거를 타고 왔다. 깜짝 놀랐다. 아버지였다. 우리 집에는 자전거가 없었는데 웬 자전거? 부리나케 맴생이들을 꼴밭에 매어 놓고 집으로 달려갔다. 아버지는 자전거를 헛간 앞에 세워 놓고 장갑을 벗으며 환하게 웃었다. 은빛 자전거는 햇빛을 받아 번쩍거렸다.
“네 형 거다.” 새 자전거는 내 눈을 황홀케 했다. 바퀴가 내 가슴까지 올라왔다. 만지기만 해도 스르르 굴러갈 것 같았다. “형! 아버지가 자전거 사 왔어.” 팔을 휘두르며 소리치자 형이 방문을 열고 뛰쳐나왔다.
온 가족이 자전거 앞에 모였다. 형은 좋아서 입을 함박만큼 벌리고 몸을 배배 꼬았다.
“어른들이 타는 7호 자전거네?” 형이 금방 알아봤다.
“7호가 제일 큰 거여?” 나는 궁금했다.
“아녀, 8호도 있어.” 형은 자전거에 대한 상식이 있었다.
“우리 아들 좋겄다?” 어머니도 덩달아 흐뭇해했다.
누나는 샐쭉 토라졌다. 샘이 났는지 시퉁한 얼굴로 옷고름을 꼬며 비죽거렸다.
자전거는 중학교에 들어가는 형의 통학용이었다. 학교는 읍내 북쪽에 있어 통학길이 삼십 리가 넘었다. 버스가 있긴 했지만 등교와 하교시간을 맞추기 어렵고 버스 차비도 만만치 않아 자전거는 있어야 했다. 아버지는 형을 가까이 오게 하여 자전거 차대에 붙어 있는 자물쇠 사용법을 보여 주었다. 바퀴에 걸리도록 밀어 끼우는 사각 자물쇠였다. 잠금 장치라 해 봐야 부엌문 빗장밖에 없는 집에 열쇠라는 게 생겼다. 형은 핸들에 달려 있는 종을 찌릉찌릉 울려대며 나에게 감히 손댈 생각을 말라는 눈빛을 쏘았다.
언제 배웠는지 형은 이미 자전거를 잘 탔다. 바람같이 내달리더니 자전거 타는 실력을 뽐내려는 듯 금세 동네 한 바퀴를 돌아왔다. 쓰윽 하고 멈추면서 내게 부러워하라는 것처럼 뻐겼다. 나도 중학교에 들어가면 자전거를 가질 희망으로 맴생이를 더욱 잘 돌보기로 했다. 새끼를 쳐서 다섯 마리만 되면 자전거를 살 수 있으리라는 계산도 뽑아 봤다.
느지막이 맴생이들을 데리러 갔다. 녀석들은 나를 봐도 모르는 척 풀만 뜯었다. 나는 암컷 맴생이에게 말했다. “야, 네가 새끼를 많이 쳐야 내 자전거가 생겨.” 나의 희망을 알아들었는지 녀석은 내 발 밑까지 와서 야물야물 풀을 뜯으며 주둥이를 오물거렸다. 수염 갈기가 제법 늘어진 수놈은 못들은 척 딴청을 부렸다. 나는 녀석을 가랑이 밑에 끼워 누르고 머리통을 쥐어박았다. “너도 알아들었지?” 녀석이 아픈 만큼 알아들었을 거라 여겼다.
형은 자전거를 함부로 손대지 못하게 하면서도 기분 좋은 날은 타는 법을 가르쳐 줬다. 자전거 바퀴 살까지 깨끗이 닦아 놓는 조건이었다. 뒤에서 붙들고 중심을 잡도록 유도하며 밀었다 멈췄다 했다. 핸들은 비틀 배틀하고 눈앞은 어질어질했다. “넘어지는 쪽으로 핸들을 틀어야!” 형이 소리를 지르면 나는 더 쩔쩔맸다.
형이 없을 땐 혼자서 몰래 끌어다 중심 잡는 요령을 연습했다. 자전거 안장에 앉으면 키가 작아 페달이 발에 닿지 않으므로 안장 밑으로 오른발을 넣고 변칙적인 자세로 페달을 돌렸다. 감나무 아래서 마당을 가로질러 대밭까지 눈 깜짝할 순간에 다다랐다. 걸으면 오륙십 걸음은 족히 되는 거리다. 몇 번을 자전거와 함께 넘어졌는지 모른다. 그러다 자전거 타기 실력은 곧 한 손으로도 탈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페달을 밟을 때에는 내 궁둥이가 좌우로 오르락 내리락 춤을 추었다. 한번은 휘파람을 불며 자갈길을 달리다가 벌쭉 올라온 돌부리에 걸렸다. 핸들을 놓치는 바람에 하필 냇가로 이어진 도랑에 풍덩 빠져 버렸다. 하늘이 기울고 도랑물이 얼굴을 덮쳐 죽는 줄 알았다. 그러는 순간에도 내 몸보다 자전거에 흠집이 생겼는가 싶어 벌떡 일어났다.
자전거는 우리 집에 재봉틀이 들어왔을 때만큼이나 획기적인 생활의 변화를 가져왔다. 이웃 마을이나 잿등에 가야 하는 심부름도 금방 갔다 올 수 있고, 멀리 사는 친구들도 쉽게 찾아갔다. 웬만한 짐들도 거뜬히 운반했다. 아버지가 걸어서 반 시간이 넘게 걸리는 논을 살피러 갈 때 자전거를 타면 언제 갔나 싶은데 이내 돌아왔다. 느릿느릿한 걸음의 생활에서 속도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형은 사정이 생긴 친구를 뒤에 태우고 학교에 가는 경우도 있었다. 그런 날은 책가방을 핸들에 걸고 더 신나게 페달을 밟았다. 수업이 끝나면 읍내에서 장을 보아 싣고 오기도 했다.
상쾌한 바람을 가르며 자전거 위에 앉아 달리면 세상의 풍경은 더 넓어 보였다. 높은 눈으로 사람들을 내려다보는 묘한 쾌감도 있었다. 아이들은 자전거를 타고 달리는 나를 만나면 무심결로 앞길을 비켜 줬다. 하지만 동네 어른을 만나면 내려서서 인사하는 법도를 지켜야 했다. 인사를 받는 어른은 새 자전거를 보고 부러워했다. “어디 가냐?” 공연히 말을 걸며 자전거를 살폈다. “예, 심바람 가요.” 나는 마음에도 없고 사실도 아닌 말로 대답하고 페달을 눌렀다.
성격이 활달한 형은 자전거를 타고 쏘다니기를 좋아했다. 학교가 끝나고 돌아오는 길엔 외갓집에 들르기도 하고 멀리 있는 고모 집에도 다녔다. 틈만 나면 이웃 마을 친구 집에도 눈깜짝할 사이에 갔다 왔다. 단 두 개의 문명의 바퀴 위력은 대단했다. 시간을 늘려 주고 힘을 덜어 주었다. 세상을 넓혀 주고 먼 곳도 데려다 주었다.
아아, 이런 요물이! 자전거는 어느 날 갑자기 형을 업고 사라져 버렸다. 바람을 가르고 쌔앵, 어디론가로.
자전거와 형이 사라진 것은 단순한 사건이 아니었다.
<이한옥 소설집 ‘바람모퉁이’ 중에서>
■ 이 한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