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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산바라지를 위해 오클랜드에 온 덕분에 오클랜드의 유명한 명소들을 관광하게 되었다. 코리아 포스트 편집장과 사돈들 덕분에 제대로 오클랜드를 여행하게 되었으며, 파미에서 먹을 수 없었던 요리들을 먹는 즐거움을 맛볼 수 있었다.
뉴질랜드에 온 지 20년이 되었지만, 뉴질랜드에서 제일 큰 대도시인 오클랜드 여행은 제대로 해 본 적이 없었는데, 그분들 덕분에 오클랜드 관광의 호사를 누렸다.
산바라지도 그다지 힘들지 않았다. 한국과 많이 다른 형식의 산후조리는 나에게 있어서 신선한 충격을 안겨 주었지만, 뉴질랜드식과 한국식을 병행하는 것도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부분의 산후조리 방법을 내가 둘째 부부에게 양보했지만, 삼칠일 동안 미역국을 먹는 것만큼은 내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출산한 지 3주가 지나 어제 미역국 먹기를 끝냈다. 물론 매 끼마다 미역국을 먹은 것은 아니고 다른 국과 병행하면서 먹었지만, 하루 두 끼는 미역국을 먹었으니 오랫동안 미역국은 손에 대지도 않을 것 같다.
젖이 충분히 나왔다면 아마 미역국을 그렇게 열심히 먹지 않았을 것이나, 나를 닮았는지 젖이 충분하지 못하여 젖을 주는 어미나 젖을 빠는 아기나 고생이 말도 아니었기에, 미역국 먹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내 경험대로라면 젖과 우유를 빨리 병행하는 게 좋을 것 같았으나, 딸애와 미드와이프는 젖이 빨리 돌아서 많이 나오는데 집중을 했다.
미드 와이프가 자주 들락거리면서 젖이 잘 도는 방법을 알려주었으나 생각대로 잘 나와 주지 않았다. 아기나 산모나 첫 경험이다 보니, 젖이 모자란 데도 불구하고 유선염이 오고, 아기는 아기대로 배가 고파서 잠 못 이루고 울어댔다.
이렇게 2주 정도를 고생하다가 우유를 병행하기 시작하니, 배가 고파서 자주 울던 아기가 제대로 푹 잠을 자게 되었다. 그런데 아기가 다시 울기 시작했다. 배에 가스가 차서 그런단다. 대부분의 아기들이 다 겪는 과정이라고 한다. 안타깝지만 그저 지켜보면서 이 관문이 어서 지나가기만을 바랄 수밖에 없었다. 아직도 아기는 배가 아플 때마다 크게 울어댄다. 이 아픔이 언제까지 갈 것인지. 오래가지 않았으면 좋겠다.
딸이나 사위나 이제껏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래도 사위는 싱글벙글 입이 다물어지지 않고, 어떻게든 아내와 아기를 도와주려 애를 썼다. 사랑의 힘이 이렇게도 큰 것이다.
나는 그저 이 예쁜 가족을 바라보면서 먹을거리나 챙겨줄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내 건강을 염려하는 마음도 있었지만, 어차피 두 사람의 일이니 두 사람이 모든 걸 다 해내고 싶었나 보다.
결혼 할 때에도 집을 살 때에도 아기를 낳고도 양가 부모의 도움 없이 자신들의 힘으로 해내기를 바랐고 그 마음 그대로 실행에 옮겨 여기까지 왔다. 아기 돌보는 일도 두 사람의 몫이라고 생각하여 앞으로도 자신들의 힘으로 해나가길 바랐다.
그 마음을 잘 알기에 그들이 하고 싶어 하는 대로 둘 수밖에 없었으며, 난 그저 한 가족의 건강을 위해 잘 해 먹이는 방법밖에 없었다. 그 이상으로 하게 되면 그들이 불편하게 여길 것 같아서 더 이상은 관여하지 않고 있었다.
이렇게 지내다 보니 어느새 갈 날이 다가왔고, 예쁜 아기와도 이별을 고해야만 한다. 언제 다시 만날 수 있을지 기약이 없지만, 그날까지 모두들 건강하게 알콩달콩 재미있게 잘 지내기만을 바란다.
오클랜드 관광 도중 코넬 파크에서 본 한 무리의 나무가 뇌리에서 떠나지를 않는다. 네다섯 그루의 나무들이 가지가 붙어서 한 나무처럼 되어버린 그 나무들이 전해주는 메시지는 지금의 내 생활에서 잊으면 안 되는 지혜를 안겨 준다.
옷을 벗은 겨울나무라서 그들을 하나로 연결해버린 가지들이 그대로 들어나 보였다. 어찌하여 그렇게 하나가 되어 함께 생존해 나가고 있는 지 잘 모르겠으나, 너무 가까이 서 있기에 가지들끼리 부딪혀서 서로 상처가 나고 그 상처가 서로 엉겨 붙어서 한 가지가 되었으리라.
참으로 기괴하며 아름다운 이 나무들을 보면서 칼릴 지브란의 예언자에 나오는 시편 ‘함께 있되 거리를 두라’가 생각이 났다.
서로 마음껏 사랑하되 사랑을 이유로 구속하지 말 것이며, 서로 함께 노래하며 춤을 추되 서로 혼자 있도록 허락하며, 서로 마음을 주되 옭아매지는 말며, 함께 서 있지만 너무 가까이 있지 말라고 가르치는 내용의 시이다.
부부의 사랑에 대한 지혜를 알려주는 시지만 단지 부부만이 지켜야 할 사랑은 아니라고 본다. 가족의 사랑, 더 나아가서는 모든 인간관계에 있어서의 지혜를 전해주는 시라는 생각이 들었다.
매 순간이 다 나에게 가르침을 주는 순간들이지만, 이번 산바라지는 특히나 더 많은 가르침을 주었으며, 연리지와도 같은 나무들까지도 지금의 내 상황에 깊은 깨달음을 얻게 해준 순간이 되었다.
이 나무들처럼 처절한 아름다움으로 생존해 나가는 것은 참으로 슬픈 일이다. 과연 나는 가족이란 굴레를 어떻게 이뤄나가고 있을까? 함께 살고 있는 큰애 커플들에게 상처를 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내년 말에 두 사람 모두 다 공부를 마치고 나면 우리 집을 떠날 것이다. 그런 기약이 있다는 것이 참으로 다행한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다시 파미로 돌아가게 된다면 그들과 좀 더 떨어져서 보다 더 편하게 해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건 새로운 가정을 이룬 두 사람이 어른들과 함께 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며, 어른 역시 어른 노릇을 제대로 하기가 쉬운 일이 아니다.
같이 함께 어우러져서 살다 보면 본의 아니게 서로 상처를 주고 상처를 받으면서 살게 되는 것이 인간지사이다. 인간도 나무들처럼 서로 좀 떨어져 살아야 제대로 잘 살 수 있는 법이다.
둘째네 산바라지를 하면서 그들의 생각을 존중해주고 격려의 마음으로 바라본 것처럼 큰애 커플들에게도 똑같은 바라보기를 하면서 지낼 것을 다짐해 본다.
아기가 또 배가 아픈가 보다. 아기 울음소리에도 달려가지 못하고 어서 낫기만을 바라면서 아기의 울음소리가 그치기를 기다리고 있다.
그저 조금 떨어져서 사랑으로 바라보기만 하는 나무가 되자.
그래야 다들 잘 크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