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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람들이 보는 외국인 혹은 이민자들에 대한 이미지는 “개인 성향이 무척 강하다”는 거다. 소속감을 답답해하고, 개인사 등의 사적 이야기는 부담스러워한다. 아무리 친한 사이여도 보이지 않는 선이 존재하는 느낌이 들고, 무리와 어울려 지내기보다 혼자 있는 것을 더 편해하는 성향. 바로 이것이 한국인이 바라보는 외국인의 모습이다.
반대로 외국인이 바라보는 한국인의 모습은 참견하기 좋아하고, 낄 데 안 낄 데를 가리지 못하며, 옆집 숟가락 수까지 훤히 알고 있는 “오지랖”. 나는 전자의 성향에 더 가까웠다. 친구들과 어울리지 않는 건 아니지만 혼자서도 크게 불편함 없이 뭐든 잘했다. 예를 들어, 보고 싶은 영화가 있으면 퇴근길에 극장에 들러 혼자 영화를 본다든지, 배가 고프면 음식점에서 혼자 밥도 잘 먹었다. 모르는 사람과 말을 하는 걸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고, 이런 이유로 택시를 타도 기사님이 말을 걸까 늘 긴장하곤 했다. 그런데 이런 내 성향을 “과거형”으로 쓰는 데는 이유가 있다. 나도 모르는 사이 난 “오지랖 대마왕”이 됐기 때문이다. 물론 여전히 혼자 밥도 잘 먹고, 혼자 잘 다닌다. 그런데 요즘은 그렇게 남에게 먼저 말을 건다.
며칠 전의 일이다. 도로에 사람들이 웅성웅성 모여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예전의 나라면 그냥 지나쳤을 일인데, 나도 모르는 사이 나 역시 그들 무리에 껴있는 나를 발견했다. 도로 위에는 차 한 대와 오토바이 한 대가 서 있었다. 사고가 난 듯 싶었다. 그리고 내가 내 입을 막기 전에 이미 난 처음 본 옆 사람에게 “어머, 어떻게 된 거예요? 누가 피해자예요?” 라고 말하고 있는 게 아닌가. 이 뿐만이 아니다. 예전에는 환한 대낮부터 라이트를 켜고 운전하는 사람들을 보면 속으로 ‘나중에 알아서 끄겠지’라고 생각하고 난 내 갈 길을 갔다. 그런데 요즘은 차 안에 있어서 내 목소리가 들리지 않을 운전자를 향해 손짓, 발짓으로 라이트가 켜져 있다고 온몸으로 알려준다.
내 오지랖이 최절정에 이르는 곳은 바로 동물병원이다.
“초코파이 보호자님 2번 진료실로 들어오세요.”
“맹꽁이 어머님 3번 진료실로 들어오세요.”
“박순자 보호자님 4번 진료실로 들어오세요”
각 강아지의 이름이 호명될 때마다 나도 모르게 피식 웃으며 강아지 주인들과 대화를 시도한다. 특히, 우리 강아지와 이름이 같은 동명이견(同名異犬)이라도 발견하는 날에는(생각보다 이런 날이 많다.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은 강아지가 하얀색이면 무조건 “구름”이라고 짓기 때문이다) 아주 절친을 만난 날이다. 이제는 내 오지랖이 걱정될 정도다. 이런 고민을 친구들한테 털어 놓으면 그들은 아직 심각한 수준이 아닌, 보통 한국인의 수준이라고 한다. 동물병원에서 사람이 아닌 강아지에게 강아지 이름을 부르며 “초코는 어디가 아파서 왔어?”라고 하게 되는 날이 오면 바로 그때가 심각하고 위험한 단계라고 날 위로(?)한다.
한국의 오지랖을 이해하지 못했던, 무척이나 싫어했던 내가 이렇게 될 줄 누가 알았을까. 한국으로 돌아온 지 10년 남짓, 나도 이제 한국 사람이 다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