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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지명(地名)을 대면 곧바로 그 지역의 가장 유명한 음식이 떠오른다. 전주하면 ‘비빔밥’, 안동하면 ‘간고등어’, 그리고 고창하면 ‘풍천장어’가 생각난다. 식도락가들은 독특한 양념구이 풍천장어(風川長魚)를 안주 삼아 복분자술(覆盆子酒)을 마시기를 기대한다. 일찍부터 선운산(禪雲山, 336m) 지역의 3대 특산물로 풍천장어, 복분자술, 작설차(雀舌茶)를 꼽고 있다.
‘풍천장어’는 전라북도 고창군을 흐르는 주진천(인천강)과 서해(西海)가 만나는 고창군 심원면 월산리 부근에서 잡히는 뱀장어를 가리킨다. 지역 주민들은 주진천을 풍천강이라고 부른다. 인천강에 하루 2번 서해 바닷물이 들어오는데 자연산 장어가 바닷물과 바람을 함께 몰고 들어온다고 해서 ‘바람풍(風)’자 ‘내천(川)’자를 써서 풍천장어라고 불렀다고 한다.
10여년전 한국파인트리클럽(총재 朴明潤) 산하 광주파인트리클럽에서 1968년부터 활동한 李興洙 이사장(전남대 사범대학 학장)의 초대로 고창 선운사(禪雲寺) 인근 장어 전문음식점에서 풍천장어를 맛있게 먹은 기억이 난다. 그리고 약 7년전에는 우리 부부가 장인어른(李鍾恒 전 국민대 총장)을 모시고 전남 고흥으로 여행을 갔다가 귀로에 고창을 들러 풍천장어를 먹었다.
장인어른께서 2017년 1월 98세를 일기로 별세하시기 전에는 우리 가족은 매 주말에 ‘맛집’을 찾아 함께 식사를 했다. 그 맛집 중 한 곳이 불광동 국립보건연구원(NIH) 인근 ‘할아버지 장어집’이다. 이 식당은 우리집 둘째딸(朴宣柱 가천대 식품영양학과 교수)이 보건원에 근무할 당시 단체회식을 한 식당으로 숯불 장어구이 맛이 아주 좋았다. 그러나 아쉽게도 최근에 문을 닫았다.
더위에 시달려 입맛을 잃고 지친 여름철에 가장 좋은 식품으로 흔히 비타민A가 풍부한 장어를 꼽는다. 그러나 장어의 맛은 가을이 제격이다. 가을이 되면 강에서 3-4년 자란 장어가 산란하기 위해 바다로 향한다. 암컷 한 마리가 약 1천만 개의 알을 낳으며, 알에서 깨어난 장어 새끼는 1년쯤 바다에서 살다가 실뱀장어가 되어 민물로 올라와서 성숙할 때까지 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향류성(向流性)이다.
뱀장어는 성장하여 산란기가 되면 아름다운 혼인색(婚姻色)이 온 피부에 나타난다. 혼인색이 나타난 뱀장어는 생식기관이 성숙하는 반면에 소화기관이 퇴화하며, 흐르는 물을 따라 내려가는 주류성(走流性)으로 변한다. 이 때 장어의 몸에는 영양이 풍부하게 저장되어 있다. 소화기관이 퇴화된 뱀장어는 전혀 먹지 않고 산란장인 깊은 바다로 가서 알을 낳고 수정을 마친 후 생을 마감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뱀장어는 아무것도 먹지 않고 깊은 바다까지 헤엄쳐가는 신비한 에너지를 가지고 있다. 이에 장어를 먹으면 그 놀라운 정력을 계승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심리적인 것도 크게 작용하여 남성들이 장어를 즐겨 먹는다. 정력에 좋은 보양식으로 알려진 장어에 함유되어 있는 아르기닌은 남성 음경 해면체의 혈관 확장 인자인 cGMP(고리지엠피) 생성을 자극한다.
장어에 함유되어 있는 아르기닌(Arginine)은 우리 몸에 존재하는 20종(種) 아미노산(amino acid) 중 하나이며, 단백질 합성에 이용된다. 혈관 평활근을 이완시켜 혈관에 가해지는 압력은 낮추고 혈압을 떨어뜨린다. 면역세포(B-cell, T-cell) 성장과 발현도 증가시켜 신체 저항력을 키운다. 또한 항노화(抗老化) 호르몬으로 알려진 성장호르몬 분비를 촉진하다. 그 결과 지방 연소, 근육량 및 골밀도 증가, 면역기능 개선 등에 도움을 준다.
아르기닌은 면역 증강제로서 콜레스테롤과 싸우는 아미노산이므로 콜레스테롤을 하강시키는 심장에 중요한 아미노산이다. 일정량을 섭취하면 LDL 콜레스테롤은 낮춰주면서 HDL 콜레스테롤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으므로 심혈관 질환 예방에도 도움이 된다.
뱀장어목(Elopomorpha)에 속하는 모든 종들을 통틀어 장어(eel)라고 하지만, 보통 장어라고 하면 뱀장어를 가리킬 때가 많다. 한자는 ‘長魚’ 말 그대로 ‘긴 물고기’라는 뜻이다. 장어는 뱀처럼 몸이 길고 가늘며, 크기는 종류마다 달라 정원장어(garden eel)처럼 60cm 정도 되는 작은 장어도 있고 곰치장어(moray eel)처럼 2m가 넘는 큰 장어도 있다. 거의 모든 장어들은 등지느러미와 뒷지느러미가 길어 꼬리 끝까지 연장된다.
장어를 연어(salmon)처럼 민물과 바다를 오가는 물고기라는 인식이 있지만, 뱀장어속(Anguilla)을 제외한 모든 장어들은 바다에서만 서식한다. 뱀장어속의 장어들 또한 바다에서 번식하기 때문에 모든 장어들은 바다 생활에 의존한다. 대부분 장어들은 먼 거리를 이동하지 않고 바위의 틈이나 동굴 속에 숨어 살거나 모래바닥 밑을 기어 다니면서 살고 있다. 장어는 주로 소형 어류나 갑각류를 먹는 육식성 물고기이다.
장어는 스태미너(stemina) 음식으로 유명하여 동양인(東洋人)뿐만 아니라 서양에서도 즐겨 먹는다. 그러나 모든 장어류가 식용으로 사용되는 것은 아니고, 장어 중 뱀장어속의 물고기들이 식용 가치가 제일 높다. 뱀장어는 맛이 좋고 껍질도 사용하기에 쓸모도 많은 생선이다. 장어의 잔가시는 다른 생선의 잔가시에 비하면 가늘고 부드러운 편이다.
뱀장어는 일반 생선에 비해 150배 정도의 비타민A 성분을 함유하고 있어 눈 건강에 좋다. 우리 몸에 비타민A가 부족하면 야맹증(夜盲症), 시력 장애, 치아 발육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또한 피부나 점막의 저항력도 약해지기 때문에 감기에 잘 걸린다. 장어의 미끈미끈한 부분에 있는 뮤코 단백질(muco protein)은 위장 점막을 보호해주고 소화를 돕는다. 장어에 함유되어 있는 비타민B2와 타우린(taurine) 성분이 피로해소를 도와주며, 비타민B2와 레티놀(retinol)은 피부 노화를 방지하는데 도움이 된다.
장어의 지방을 구성하는 불포화지방산(不飽和脂肪酸)은 모세 혈관을 튼튼하게 해주며 몸의 생기를 왕성하게 해주는 작용을 한다. 그러나 장어도 먹이에 따라 지방산의 조성이 다르게 되는데 양식(養殖)한 것보다 자연산이 훨씬 우수하다. 산성식품인 장어는 등의 빛깔이 회흑색, 다갈색, 진한 녹색인 것이 맛이 좋으며, 살이 미끈하고 눈이 투명한 것이 신선하다.
장어 손질법은 장어 등 쪽에 칼집을 넣어 내장과 뼈를 발라낸 뒤 뜨거운 김을 쐬고 얼음물에 담가 진액을 제거한 후 각 요리에 맞게 손질하여 사용한다. 장어는 양념을 하여 구워 먹거나 찜 또는 튀김으로 또는 장어덮밥으로 먹기도 한다. 장어 특유의 비린 맛을 제거하기 위해 생강, 청주 등을 많이 사용한다.
장어의 종류는 20여종이 있는데, 한국인이 즐겨 먹는 장어는 민물장어인 ‘뱀장어’와 바닷장어인 ‘붕장어(아나고, 穴子)’, ‘곰장어(먹장어)’ ‘갯장어(하모)’ 등이 있다. ‘뱀장어’ 요리법은 소금구이와 양념구이가 대표적이며. 기름기가 많아 느끼함을 줄이기 위해 생강과 함께 상추에 싸 먹는다. 바닷장어 ‘붕장어’는 회로 먹으면 고소한 맛이 일품이며, ‘곰장어’는 짚불로 구어 먹으면 담백한 육즙에 식감이 쫄깃하다.
‘갯장어’는 붕장어와 닮았지만 붕장어에 비해 주둥이가 길고 뾰족하며 억세고 긴 송곳니를 비롯한 날카로운 이빨이 있다. 조선시대 정약전(丁若銓)이 1814년에 펴낸 자산어보에는 ‘개의 이빨을 가진 뱀장어’로 묘사했다. 갯장어는 잘 물어대는 습성을 가지고 있어 ‘물다’ 라는 뜻의 일본어 ‘하무’에서 그 이름(하모)이 유래한다. 여름철이면 횟집 메뉴에 갯장어가 등장한다. 제주도에서 ‘깨붕장어’라고 불리는 무태장어(無泰長魚)는 서귀포 천지연(天地淵)에서 서식하는 천연기념물 물고기이다.
곰장어 명소는 부산시 기장군의 곰장어촌이 유명하다. 기장에서는 마른 짚에 불을 붙이고, 그 위에 석쇠를 얹어 곰장어를 굽는다. 진액으로 뒤덮인 껍질은 짚불의 순간적인 강한 화력(火力)에 숯처럼 타버리고 껍질 속 살코기는 육즙이 고스란히 남아 촉촉이 익는다. 장갑을 낀 손으로 까맣게 탄 곰장어 껍질을 벗긴 뒤 쫄깃한 속살을 기름에 찍어 먹는다. 조선 제10대 왕 연산군(燕山君, 재위: 1494-1506)은 장어로 마늘 백숙을 해서 즐겨 먹었다고 한다.
바닷장어는 뱀장어보다 영양가가 떨어진다. 칼로리는 100g당 뱀장어는 210Kcal 가량인데 비해서 바닷장어는 170Kcal 정도이다. 바닷장어는 지방의 함량이 11% 가량밖에 안된다. 장어의 지방을 구성하는 불포화지방산은 영양적으로 쇠기름이나 돼지기름과는 성격이 다르다. 이것은 모세혈관을 튼튼하게 해주며, 몸의 생기를 왕성하게 해주는 작용을 한다.
일본인들은 장어(鰻, 우나기)를 고급 보양식으로 꼽는다. 일본 대표 식문화 중 하나인 돈부리(일본식 덮밥)에서 장어가 차지하는 비중이 상당하다. 달콤 짭짤한 양념을 바르며 구워낸 장어를 뜨거운 밥 위에 올린 덮밥(우나기 돈부리)이 장어를 가장 맛있게 먹는 방법으로 정평이 나 있다. 이 때 덮밥에 들어가는 밥 역시 수분을 잘 흡수하는 묵은 쌀에 장어 뼈 육수로 밥을 지어 장어향(香)을 듬뿍 배어들게 하는 것이 포인트라고 한다.
간편하면서도 맛있는 ‘우나기 돈부리’는 공연 시간이 길기로 유명한 일본의 전통 가부키(歌舞伎, 노래ㆍ춤ㆍ연기가 함께 어우러지는 공연예술) 공연을 관객들이 놓치는 장면 없이 끼니를 해결할 수 있도록 고안한 음식이라는 설이 있다. 일본에서 인기 있는 장어 요리‘카바야키’는 장어를 꼬챙이에 꿰어 달짝지근하게 졸인 간장 양념을 바른 뒤 숯불에 구워내면, 바삭바삭한 껍질과 즙이 많은 살을 맛볼 수 있다. 한편 진짜 장어광(狂)은 양념을 바르지 않고 구운 ‘시라야키’를 좋아한다.
거의 대부분의 해산물을 날로 즐기는 일본인이지만 장어는 조리해서 먹는데, 이유는 장어의 피에 독성이 있기 때문이다. 독은 단백질 성분이므로 섭씨 60도 이상에서 5분정도 조리하면 독성은 사라진다. 물론 피를 철저히 제거하고 껍질은 뜨거운 물로 살짝 익혀 먹기도 한다. 일본 내에서 시즈오카현의 하마마츠시가 장어로 유명한 지역이며, 특히 호수와 바다가 만나는 기수 지역에서 잡힌 장어를 최고로 친다.
중국에서는 장어를 토막 내고 기름으로 튀긴 마늘을 섞어 고아낸 요리인 산자현대의(蒜子炫大蟻)라는 요리가 자양 강장 식품으로 알려져 있다. 이 요리는 비린내도 없고 특유한 맛을 가지고 있다. 프랑스에선 장어를 와인이나 소금으로 비린내을 없앤 다음 샌드위치로 먹으며, 독일에선 크림을 넣어서 탕으로 먹고, 영국에서는 푹 삶았다가 굳혀서 젤리처럼 만들어 먹는다. 네덜란드에선 훈제해서 먹는다.
북아프리카 북부 지중해 연안에 있는 튀니지(Tunisia)는 이슬람교 국가여서 장어를 먹지 않지만 자국에서 생산되는 장어를 한국이나 일본으로 수출한다. 장어 껍질(eel skin)은 핸드백이나 지갑, 벨트 등 가죽제품의 고급 원료로 인기가 있다. 장어 가죽은 얇으면서도 질기고 부드러울 뿐 아니라 행운을 가져다준다는 속설도 있다.
혼인 때 신랑 신부의 사주(四柱)를 오행(五行)에 맞추어 궁합(宮合)을 보아서 상생(相生)과 상극(相剋)을 점친다. 우리가 먹는 식품에도 ‘음식 궁합(宮合)’이 있어 상극인 식품 두 가지를 먹었을 때는 건강에 해가 될 수 있다. 장어는 후식으로 복숭아를 먹으면 복숭아에 함유된 유기산이 장어의 지방 소화를 방해하여 설사를 유발할 수 있다. 일본에서는 장어와 우메보시(梅干, 매실에 소금을 넣고 절인 음식)를 같이 먹으면 배탈이 난다고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