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칼럼 | 지난칼럼 |
그 날은 그저 보통의 여느 날과 다름 없었을 것이다. 일상의 바쁜 아침이 그렇듯 아이들과의 짧은 실랑이에 조금은 언짢았을 것이며 분주한 마음에 들어선 고속도로의 정체에 살짝 짜증도 났을 것이다. 그럼에도 싱그러운 안개비와 차 안에서 들려오는 김광석이면 난 여전히 그런 아침을 즐거워했을지 모른다. 아무 다를 것 없이 조금은 바쁘지만 나름 여유를 찾아가는 그런 아침이 그 날도 지나가고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예상보다 조금 일찍 도착한 마을입구엔 어김없이 마리 할머니가 주차장 옆 의자에 앉아 초점 없는 눈으로 밖을 응시하고 있었고, 케니 아저씨는 주차할 곳을 고르느라 서성이는 내 차로 다가와 나를 맞는다. 그 마을에서 맞이한 첫 겨울의 어느 날, 죽음은 그렇게 평범히 그리고 너무도 조용하게 찾아오고 있었다.
지금은 정부의 주거시설에 대한 새로운 기준과 정책으로 목재로 만든 작은 캐빈이 제공되고 있지만, 당시만 해도 그 캐빈들이 서 있던 자리엔 그 보다 더 비좁고 허름한 이동식 캐라반이 차지하고 있었다. 그나마 나무로 지어진 캐빈은 크기의 문제만 제외하면 그럭저럭 한겨울의 추위를 버틸 간이숙소가 되고 있지만, 오래되어 낡은 캐라반은 덧대어 이어진 철판에 이음새 마다 구멍이 뚫려 비 많은 오클랜드의 겨울을 힘겹게 버티고 있었다.
▲ 사진: 지금은 점차 사라지고 있는 오래된 거주형 캐라반 모습
낡고 헤어진 캐라반의 양철 표면은 틀림없이 그 주인의 외투만큼이나 후들거렸고, 비라도 세차게 내릴라 치면 양철을 때리는 빗소리에 고함을 지르지 않고는 어지간한 대화는 불가능 했다.
“에이든, 오늘 아침은 기도가 필요해.”
어느덧 운전석 앞까지 걸어 온 케니 아저씨의 목소리는 평소와 달랐다. 여전히 술에 취해 있었지만 그렇다고 어눌하지 않았으며 그의 눈빛은 흔들려 슬퍼 보였지만 빛나고 있었다.
“??”
“너 목사잖아. 네가 토니를 위해 기도해 줘야 할거 같아.”
그날 아침 한 생명이 스러졌다. 이틀 전 여느 날과 다름없이 너무도 무심한 일상의 인사를 나눈 토니는 내가 맞이한 그 아침의 싱그러움을 맞이하지 못했다. 이 마을에서 사역을 시작하며 누군가의 죽음 앞에 마주 서 있게 될 나 자신을 상상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 시간이 이렇게 갑작스레 찾아와 주리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했다.
케니의 손에 이끌려 들어간 그의 작은 처소에는 수년간 세탁되지 못한 듯 곰팡이가 피어 새카메진 이불에 그가 덮여 있었다. 변변히 허리 조차 펼 수 없는 작은 공간에 누여진 그의 몸을 더듬어 발견한 그의 발은 너무 거칠었고 검게 변해 있었다. 그의 발등을 부여잡자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내 손을 통해 그가 경험했던 이 땅의 고난들이 고스란히 전해지는 것 만 같았다. 나는 케니에게 부탁 해 젖은 수건을 준비해 그의 발에 묻은 흙을 조심스레 닦아냈다.
그의 마지막을 위해 기도하며 나는 차라리 고통으로부터 이제 자유로워진 그의 영혼이 축복되다 생각했다. 이 땅의 시간은 비록 무언가에 끊임없이 얽매였었더라도 이제부터는 자유로워 지기를, 눌리었던 고통의 무게를 벗고 가볍게 날아 오르기를 나는 간구했다. 나는 그 시간 드려진 나의 기도가 떠나 보내는 한 생명에 대한 위로와 추모의 기도였는지 아니면 그 기나긴 고통의 터널을 마친 그의 새로운 시간에 대한 축복의 기도였는지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지 않다. 하지만, 나는 내가 가진 믿음이 이 세상의 축복에만 머물러 있지 않음에 감사했다.
굳어진 그의 발등에 손을 떼고 돌아서니 좁은 캐라반에 함께 들어 오지 못한 몇몇의 이웃이 함께 기도를 마치고 있었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던 한 생명의 마지막은 그렇게 그들 사이에서 추모되었고 그렇게 다시 주변인들에게 잊혀져 갔다. 이제 그의 몸은 부검을 거쳐 남아있는 가족이 없을 시 변변한 장례조차 없이 무연고로 처리되어 뿌려질 것이다. 이렇게 그 겨울의 초입에 조우한 죽음은 그 계절이 끝나기까지 3개월 남짓의 시간 동안 4번이나 더 나를 찾아왔다
그 해 겨울, 난 내가 살아온 시간 동안 경험한 죽음 보다 더 많은 죽음을 보아야 했다. 관념적으로 이해하고 있던 가난은 죽음에 너무도 취약 했고, 삶의 모든 영역에 고통으로 자리잡은 빈곤은 그렇게 죽음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마지막을 고할 수 있었다. 그 작은 공간 속에서 가난에 지쳐가는 그들의 시간은 여간 해선 스스로의 회복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 시간의 끝에 기다리는 죽음은 누구도 예상치 못한 시간에 담담하게 우리를 찾아 오고 있다.
한참의 시간이 지난 후 나는 케니의 작은 캐라반에서 토니의 사진을 다시 볼 수 있었다. 가장 잘 보이는 입구 한쪽에 액자도 없이 걸려진 그의 사진은 지금도 그렇게 위로 받고 있었다.
(* 글에 등장하는 이름은 모두 가명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