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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장, 사업은 힘 있는 곳, 잘나가는 곳과 함께 하세요. 그래야 동반 성장 할 수 있는 겁니다. 자꾸 어려운 회사들과 일하지 마세요!”
20년 전 닷컴 버블이 한창이던 시기, 소프트웨어 개발을 업으로 삼고 있던 나는 작은 IT 벤처기업의 대표였다. 일인기업으로 시작했던 회사는 어느 교육 컨텐츠 기업의 펀딩을 받으며 도약의 발판을 마련 하고 있었다. 그 투자 회사의 대표는 간혹 사업과 관련한 조언을 주곤 했는데, 고만고만한 회사들과 서로 의지해 연명해 가는 이 보잘 것 없는 조직의 앞길이 우려스러운 모양이었다.
그의 말은 옳았다. 실제 업계에서는 누구와 손잡았느냐가 그 사업의 성패를 가를 가늠자가 되었다. 지면엔 그렇게 만들어진 조인트 벤처의 소식들이 연일 심심치 않게 올라오고 있었고, 그들은 마치 그들의 기술로 세상을 뒤집어 놓을 듯 한 기세로 신문지면을 장식 하고 있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수없이 많은 벤처들이 나고 지기를 반복 한 후, 결국 우리는 대기업이 되어버린 몇몇의 대형 포탈과 초대형 게임 회사만이 살아남아 시대를 호령하고 있음을 목격하고 있다.
그렇게 수많은 회사와 조직들이 세상에서 지워진 이유가 비단 잘나가는(?) 연대를 하지 못해서만은 아니겠으나, 성공한 이들이 필수적으로 그 길을 택해 왔음을 부인하지는 못할 것이다.
세상의 성공은 위를 향해 뻗어 있는 사다리의 숙명과 닮아있다. 사다리에 한쪽 발을 올리게 된 누군가의 발걸음은 그 사다리의 다른 한편 끝에 다다르고 나서야 비로소 잠시 동안의 휴식을 허락 받을 수 있다. 한번 내딛은 걸음을 사다리의 중간 어디에선가 멈추어 버릴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모두의 발걸음이 위를 향해야 한다고 강요되는 동안, 그럼에도 저 편 누군가의 삶이 한없이 낮은 곳으로 향하고 있다는 것은, 상하로 놓여진 서로의 다른 길 가운데 우리가 선택해 걷는 삶의 여정이 사업의 목표 그리고 성취와는 달라야 하기 때문은 아닐까.
▲ 저작권: 신영복 선생
‘우산을 들어 그들을 감싸기 보다는 함께 비를 맞으며 걷고자 한다’는 (고 노회찬 의원의 정신적 스승) 신영복 선생이나,
자신의 일생 모두를 결핍된 이들을 위해 싸우고도 ‘만일 천국과 지옥이 있다면 나는 죽음 이후 결핍을 경험하는 이들이 모이는 지옥으로 가기를 원한다’고 말한 (버락 오바마와 힐러리 클린톤의 정신적 멘토) 사울 알린스키의 길은 분명 그들이 지향한 낮은 곳에서 새롭게 만나고 있다.
“하방(下方) 연대,”
우리는 과연 세상이 가리키는 방향과 다른 낮은 곳을 향하는 그들의 발걸음에 얼마나 가까이 동행 할 수 있을까?
나눔이라 칭하고 동행이라 읽는 <나눔공동체 낮은마음>의 연대 정신은 그들이 지향한 아래를 향해 있다. 세상이 지향하는 성공의 길과는 확연히 다른 그 반대편 어딘가를 향한 여정은 그렇기에 때로 원치 않는 시선을 함께 담고 가야 한다. 누구나 당연히 바라보아야 할 방향이 아닌 곳을 향한 걸음이기에 어쩌면 숙명과도 같은 것이리라.
그럼에도 이 걸음이 가치 있다 주장하는 것은 우리는 어쩌면, 바다를 닮기 원하기 때문일 것이다.
바다는 기어이 모든 시내와 강물을 받아들여 결국 세상에서 ‘가장 낮’ 지만 ‘가장 큰 물’이 되고 만다. 가장 큰 물로 만나는 관계, 그것은 우리가 사회의 가장 낮은 곳에서 만날 수 있는 가장 큰 연대의 경험일 것이다.
낮은 곳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삶의 모습에 물질적 번영이 담보되기는 어렵겠으나 대신 그것은 지금껏 우리가 경험하지 못한 관계의 풍요로움 속으로 우리를 초대하고 있다.
우리는 오늘 그 풍요의 바다에 흠뻑 젖어 꼭대기를 탐하는 아우성으로부터 잠시… 작은 고요를 찾는다.
■ 이익형 간사 (낮은마음 간사 / BTh, MTh)
레이드로 대학 (Laidlaw College)에서 각각 성서연구 (Biblical Study)와 공공신학 (Public Theology)으로 학부와 대학원 석사과정을 마치고 현재 나눔 공동체 낮은 마음과 문화 공간 <숨, 쉼>에서 일하고 있다. - 낮은마음 이야기는 나눔공동체 낮은 마음이 서부 오클랜드 지역에서 활동하며 지역 이웃들과 함께 나눈 사역을 정리해 엮은 칼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