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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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풍

0 개 1,010 수필기행

■ 이 한옥


소풍 가는 날은 기분이 붕붕 떴다. 다른 날보다 훨씬 일찍 일어나 나설 차비를 했다. 어머니는 벌써 하얀 쌀밥 도시락을 준비했다. 멸치볶음, 콩자반, 삶은 계란까지 들어 있는 특급이었다. 아버지는 사탕을 사 먹으라며 지폐 한 장을 내 주머니에 넣어 주었다. 산길 원족을 갈 땐 비탈이 위험하니 조심하라며 허리춤도 단단히 매어 주었다. 누나가 만들어 준 노란색 멜가방에 도시락을 넣고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뛰는 걸음으로 학교를 향해 달렸다. 


학교 앞 점방에 들러 사탕 몇 개와 비과, 누가 과자를 사서 주머니에 넣었다. 그동안 사고 싶었던 딱총 화약도 샀다. 아이들이 이것저것 사느라 몰려들어 점방 앞은 울레줄레 문전성시였다. 주먹만 한 고무공이나 말린 오징어 뒷다리를 사는 아이들도 있었다. 어떤 아이들은 꼬깃꼬깃한 지폐를 펴 들고 어떻게 계산해야 할지 몰라 쩔쩔맸다. 돈과 숫자와 물건의 상관관계를 따지느라 허둥댔다. 운동장에는 벌써 학급별로 줄을 서서 출발을 준비하느라 웅성웅성했다. 보자기로 싼 도시락을 하나씩 꿰찬 아이들은 출발 대열 앞에 먼저 서려고 은근히 밀치락달치락했다. 그래 봤자 가는 시간, 가는 곳은 같은데 아이들의 마음은 조급했다. 


학교를 나와 능선을 벗어났다. 먼 들판에는 아지랑이가 아물아물 피어오르고 온화하게 흩어지는 햇빛은 눈이 부셨다. 힘차게 발을 뻗어 내딛는 발걸음에 맞춰 아이들은 목청이 터지게 노래 부르며 벼락폭포가 있는 벼락소를 향해 갔다. 


산골짜기 다람쥐 아기 다람쥐, 도토리 점심 가지고 소풍을 간다…, 고기를 잡으러 바다로 갈까나…, 푸른 하늘 은하수 하얀 쪽배에…, 아가야 나오너라 달맞이 가자…, 금강산 찾아가자 일만이천봉…, 깊은 산속 옹달샘 누가 와서 먹나요…, 고향 땅이 여기서 얼마나 되나…, 무찌르자 공산당 몇 천만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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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안의 절벽 길을 따라 두어 시간을 걷는 동안 수평선 끝에서 날아온 바닷새들이 길동무를 하고 아이들의 노랫소리는 끊이지 않았다. 봄바람은 감미롭고 은빛 바닷물은 잔잔히 일렁였다. 앞에서는 인솔 교사의 호루라기 소리가 간간히 들려왔다. 야방모퉁이를 돌아 박재고개를 넘자 비득치 어촌이 나왔다. 포구에는 크고 작은 고깃배들이 분주히 드나들었다. 바다와 맞닿은 강을 건너 계곡을 따라 벼락소로 올라가는 길은 비탈이 심했다. 선생님들은 조심하라 경고하며 앞뒤를 살폈다. 어디선가 밭두렁을 태우는 연기가 바람결에 쓸려 왔다. 


가까운 곳에 선산과 조상들의 산소가 있어 전에도 와 본 적이 있지만 벼락소는 볼수록 기이한 곳이었다. 맑고 푸른 폭포수가 하얀 포말과 함께 용소 아래로 세차게 떨어졌다. 떨어진 물기둥이 다시 솟구치다가 어디론가 빨려 들어가는 소용돌이는 아이들의 정신을 뺐다. 산등성이를 따라 솟아오른 바위들이 풍채를 겨루며 주위를 감싸고, 평평한 바위와 굽이를 탄 계곡이 어우러져 전교 학생이 놀기에도 안성맞춤이었다. 온 산엔 진달래꽃이 난만하여 불타는 듯 울긋불긋 휘장을 두르고, 초목에 돋아난 연푸른 잎들은 샛노란 개나리의 손을 잡고 한들한들 춤을 추었다. 바위틈 사이로 갯버들이 흐늘거리고 양지 바른 비탈에는 시절 모르고 피어난 보라색 할미꽃들이 꾸벅거렸다. 폭포에서 말갛게 흘러온 냇물이 작은 물줄기들을 불러 모으며 갈 길 바쁜 듯 바위를 휘돌아 흘렀다. 선생님들은 널찍한 반석 위에 다리를 피고 앉아 껄껄대었다. 턱을 괴고 모잽이로 누운 담임 선생은 신선 놀음 시늉을 하며 다른 손을 엉덩이에 대고 까딱까딱 했다. 


보물 찾기를 시작한다는 선생님의 호루라기 소리가 났다. 떼뭉쳐 숲속을 뛰놀던 여자아이들이 진달래꽃을 한아름씩 안고 우르르 내려왔다. 아이들은 풀어 놓은 토끼마냥 흩어져 바위와 나무와 꽃들 사이를 헤집고 다녔다. 싱그러운 산내음이 보물을 찾는 아이들 웃음소리와 함께 산천을 휘돌았다. 나는 보물을 찾듯 신기한 돌멩이를 찾는 재미에도 정신을 뺐다. 계곡의 자갈 속에서 반짝거리는 보물 하나를 발견했다. 하얀 수정과도 같은 주먹만 한 산돌이었다. 살아서 자라난다는 활석이다. 동그란 모양에 송곳니처럼 삐죽삐죽한 모서리가 돋아나 기묘한 조화를 이루고 햇빛에 비추면 무지개 색깔이 조각조각 부서지며 반짝였다. 발견의 즐거움에 나는 입을 일자로 찢었다. 다른 재미도 놓치지 않았다. 딱총 화약을 꺼내 열 방이나 돌로 터뜨려 아이들을 놀라게 하고 다녔다. 산새들이 휘익휘익 아이들 머리 위로 날고, 떨어진 진달래 꽃잎들이 계곡물을 타고 흘렀다.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계곡 아래서 시퍼런 연기가 솔솔 피어올랐다. 육학년 형들 여럿이 둘러 앉아 낄낄거리며 소란을 떨었다.


“산불이다!”


누군가 외쳤다. 아이들이 몰려가고 선생님들도 달려갔다. 연기가 점점 짙어졌다.


“무슨 일이냐?”


둘러앉은 아이들이 고개를 돌렸다.


“웬 불질이여? 이 산 속에서. 빨리 끄지 못히여?”


육학년 담임 선생이 양 허리에 손을 걸치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형들이 깨구락지 구워요.”


마른버짐이 듬성듬성 핀 아이가 당당하게 말하는데 일러바치는 소리였다.


“뭐라, 깨구락지? 예끼 이놈들아, 소풍 와서 맛있는 거 먹고 이게 무슨 짓들이냐?”


누군가 봄 개구리를 잡아 구워 먹는 법을 가르쳐 주는 중이었다. 다른 쪽 아이는 어디서 주워 왔는지 관솔 쏘시개에 삭정이를 얹어 불을 지피느라 코를 박고 입바람을 불어댔다. 송진 타는 냄새가 물씬 풍겼다. 개구리 머리와 몸통은 보이지 않고 살점 붙은 뒷다리만 여기저기 널려 있었다. 여자아이들과 여선생은 찡그린 얼굴로 아연실색하며 웅숭그렸다. 불을 끄는 녀석, 코를 벌름거리는 녀석, 히죽거리는 녀석, 마냥 서서 굽어보는 녀석, 도망가는 녀석, 아수라장이었다. 여자아이들은 꽃잎을 따고 사내아이들은 먹거리를 찾고, 나는 신기한 돌맹이들을 줍고 다녔다. 소풍은 시간이 멈춘 꿈나라였다.


<소설 ‘바람모퉁이’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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