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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 전 세계인의 사랑을 받는 최고의 동영상 공유 사이트인 YOUTUBE에 뉴질랜드와 관련된 동영상이 한 편 올라왔습니다. 세상 누구나 자신의 관심사를 영상으로 남겨 공유할수 있는 간접 ‘체험 삶의 현장’이니 뉴질랜드 이야기건 한국 이야기건 특히 가릴 것은 없겠습니다만 이 동영상이 많은 사람들, 특히 KIWI들의 관심을 끈것은 영상의 주제가 뉴질랜드 HOMELESS에 관한 것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동영상에는 몇 명의 HOMELESS가 등장합니다. 그 중에는 가족들과 인연을 끊고 혼자서 외롭게 길바닥 삶을 살아가는 중년 남성의 이야기도 있었고 세아이들과 함께 지낼 장소가 없어서 동네 건물 뒷편 주자장의 한 켠에 승합차를 한 대 세워놓고 거기에서 거주하는 젊은 엄마의 이야기도 있었습니다. 모두가 한결같이 고단하고 침울하고 체념에 가득한 모습이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다 자신만의 이야기들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렌트비가 너무 올라가서 정부의 보조금으로는 감당할수 없었기에 길에 나 앉을 수 밖에 없었다는 가족의 이야기로부터, 다니던 회사들에서 연달아 해고를 당하는 바람에 사회생활의 의욕마저 잃고 결국 자청해서 홈리스가 된 사례까지.. 모두들 참으로 마음 아픈 이야기들 이었지요. 신통치 않은 영어실력으로 드문드문 되돌려가며 보고 들었음에도 그 분들이 경험하는 삶의 애환이 고스란히 전달되는 느낌이었습니다. 특히 아이들을 승합차 안에서 재우며 인근 공원의 화장실에서 위생을 해결해야 하는 한 엄마의 모습은 마음이 짠 할 정도로 애처로왔는데요.. 이런 느낌이 저만의 느낌은 아니었는지 그 동영상의 밑으론 셀수도 없이 많은 덧글들이 달려 올라왔습니다. 소개된 분들의 고단한 삶을 안타까워하며 위로하는 대부분의 덧글과 함께 간간히 다소 날카로운 내용을 담은 덧글 글도 눈에 띄었습니다.
‘이것이 실제 뉴질랜드 입니다. 여러분들은 아름다운 자연경관만 자랑하는 뉴질랜드 홍보비디오가 아닌 이곳의 진짜 모습을 알아야 합니다.’
‘모든 KIWI들은 자신과 가족들이 안전한 거처에서 지낼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정부는 그들의 권리를 보호해 주어야 합니다.’
‘이 모든 사태는 해외 부동산투자자들 때문에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거주하지도 않을 부동산을 해외에서 구매하면서 부동산 가격 폭등을 조장하고 있습니다. 그들 때문에 집값과 렌트비는 지나치게 올랐고 국민들은 빈집을 남겨놓은 채 홈리스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정부는 이런 방식의 뉴질랜드 팔아치우기를 당장 중지해야 합니다.’
냉소적이고 무정부주의자스러운 덧글부터 사회주의적인 관점에서 복지의 증진을 요구하는 덧글, 국수주의 혹은 국가주의에 한껏 고양된 듯 보이는 누군가가 주장하는 쇄국정책까지.. 가지각색 다양한 덧글들을 접할수 있었지요. 그런데 그 수많은 덧글 중 하나가 저의 눈을 강하게 끌어당겼습니다.
‘그런데 저들은 왜 일을 하지 않는거지? 결국 모든 문제는 돈이었고 그렇다면 돈을 벌었어야 하는것 아닌가? 왜 모든 책임을 사회에만 떠 넘기고 있는거지? 난 이해할 수가 없다.’
덧글을 읽는 순간 뭔가 머리속에 번쩍하고 스파크가 튀기는 듯 했습니다. 왜냐하면 동영상을 보는 내내 그 덧글의 내용과 같은 생각이 자꾸 머리속을 맴도는 것을 피할수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다만 그런 생각을 하는것 자체가 뭔가 그분들의 인생을 폄하하고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심을 저버리는 행동인 것 같아서 저어했을뿐, 저 또한 분명히 멀쩡한 사지 육신을 가지고서 정부탓만 하고 있는 그 분들이 곱게 뵈지는 않았던 것이 사실입니다. 물론 동영상에 출현한 분들 가운데에는 육체적으로 쇄약하고 정신적으로 박약해서 일반적인 사회생활이 어려워 보이는 분들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나머지 대부분은 너무도 건강해 보이는 육체와 일말의 문제점도 느껴지지 않는 정신상태를 지니고 있었는데.. 그분들은 왜 일을 찾지않고 그냥 홈리스의 삶을 선택했던 것일까요? 혹시나 이 비디오가 어떠한 정치적인 세력을 견제하거나 또 다른 집단을 선동하기 위해서 불순한 의도로 제작된 것일까요?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또한 단순한 동영상 하나를 가지고 내가 살고 있는 터전인 이 땅 뉴질랜드를 비하하게 될까봐 너무 조심스럽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덧글들을 하나 하나 읽어보면서 우리 아이들이 공부하고 있는 NCEA 과정이 가지고 있는 태생적 한계를 직시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기에 그것을 함께 나누고자 하는 마음으로 이번 컬럼을 준비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많고 많은 시청자들의 덧글 중 두가지의 상반된 의견에 집중했습니다. 그 하나는 ‘모든 KIWI 들은 안전한 거주환경에서 지낼 권리가 있고 그것은 사회적으로 보장되어야 한다’는 원론적인 것이었고 또 다른 하나는 ‘그들이 일을 하지 않으니 자신의 권리를 지킬 도리가 없는 것이다.’라는 다소 냉정한 의견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모두는 인간으로서 ‘인권’을 가지고 있고 또한 한 나라의 국민으로서 그 국가가 제공하는 혜택을 누릴 권리가 있습니다. 국가는 모든 국민들이 법으로 정해진 권리를 누릴수 있도록 보장해야 하고, 동시에 국민들은 법이 지정한 의무를 다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국가가 안전한 거주를 보장해야 한다는 의견이나 국민으로서 국민총생산에 기여해야 한다는 두가지 의견 모두, 제 짧은 소견으로는 하등의 그릇됨이 없어 보입니다. 하지만 그 타당성에도 불구하고 두 의견은 극명한 대립관계에 놓여있고 우리는 개인적으로든 사회적으로든 그 중의 하나에 더 많은 무게를 실을 수 밖에 없는 입장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렇게 생각합니다. 국민 각 개인이 안전한 거처를 확보할 수 있는 권리가 너무도 지당하고 너무도 합당함에도 불구하고 그 권리를 저버린 이들에게까지 억지로 혜택을 베풀어야 할까 하는 의구심이 있습니다. 물론 이 이야기는 사회적 생산활동에 참여할 수 있는 능력과 여건을 갖추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계약적 의무를 다 하지 않는 분들에게 국한된 말 입니다. 절대로 사회적인 도움이 필요한 분들을 싸잡아서 매도하는 말이 아님을 양지해주시기 바랍니다.
‘안전한 거처에 대한 권리’를 ‘건강한 육체를 유지할 권리’와 한번 비교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둘 다 뉴질랜드 국민으로서, 그리고 인간으로서 누릴수 있는 당연한 권리입니다. 만약 건강한 육체를 유지할 권리, 다시말해 누군가의 간섭이나 외압, 속임수로 인해 스스로의 건강을 망치지 않을 권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흡연이나 운동부족, 비만, 심지어는 마약에 의해 자신의 건강을 망친다면.. 잃어버린 건강을 회복시켜주기위해 무상금연교육, 무상마약재활, 무상의료서비스 등을 제공하지만 그런 지원에 흥미를 느끼지 못한체 그저 스스로를 파멸의 길로 이끄는 탐닉에서 헤어나오지 못한다면.. 그러면서 입으론 뉴질랜드 사회가 가지고 있는 구조적 문제의 희생양으로 스스로를 치부한다면.. 과연 우리는 그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이와 마찬가지로 무상 일자리 상담, 무상 직업교육, 저렴한 탁아서비스를 제공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하지 않을 권리를 내세우며 정부의 지원이 부족하다는 원망만 하고 있다면 우리는 도대체 그들을 어떻게 받아 들여야 할까요?
KIWI라면 누구나 안전한 거처를 보장받을 권리가 있다는 말의 의미는 사회적인 협약에 의해 누구에게나 그 기본적인 필요조건을 충족해 주어야 한다는 의미이기 보다는 누구에게나 일할 권리, 자신의 수익을 빼앗기지 않을 권리, 스스로의 가정을 외부 요소로부터 지킬 권리가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권리는 권리를 가진 누군가가 자신의 무언가를 빼앗기지 않고 향유 할 수 있는 주체권을 인정하는 것이고 자신이 소망하는 무언가를 취득하기 위해 정당한 노력을 기울일 때 그것이 부당하게 차별받지 않을 평등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결코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손깍지 끼고 누워있어도 국가가, 정부가, 사회가 필요한 모든 것을 충족시켜주는 시스템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한국은 세계에서도 손 꼽히는 학원의 천국입니다. 별의 별 학원들이 다 있지요. 그 중에는 외국으로 조기유학을 다녀온 학생들이 상대적으로 빠른 한국 교육과정을 따라잡기 위해 등록하는 학원들도 있는데요. 그 중 한 곳에서 재직하고 있는 한 지인으로 부터 뉴질랜드 유학생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대부분의 동남아 유학생들은 한국과 대등하거나 혹은 경우에 따라 더 높은 학력수준을 가지고 귀국하는 경우가 많지만 미주 유럽권에 유학한 학생들은 많이 뒤쳐진 학력수준을 가지고 귀국한다는 이야기였습니다. 그리고 그 중 가장 한국 교과과정에 적응하기 어려워하는 학생들이 바로 뉴질랜드와 호주 유학생들이라는 이야기였죠. 호주 유학생들은 걸핏하면 학생으로서의 권리가 어쩌고 저쩌고 하는 자기주장이 너무 강하고 뉴질랜드 학생들은 너무 느려서 학습속도를 잘 따라가지 못한다고 하더군요. 좋게말하면 여유있는 것이고 나쁘게 말하면 게으른 것이겠죠. 물론 개인적인 차이가 있을테니 일반화의 오류를 범해서는 안되겠습니다만 10여년이 넘는 시간동안 귀국 유학생들을 지켜본 담당자의 말이라면 어느 정도의 신빙성은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그런데 언젠가는 제게 재미있는 질문을 하나 하더군요. 뉴질랜드에서 유학을 한 학생들은 무언가를 배울 때 이것을 알아야 하느냐 말아야 하느냐, 시험에 나오느냐 안 나오느냐를 선생님께 계속 질문하고 결정해 주기를 바라는 이상한 버릇이 있다면서 그 나라 교육시스템은 도대체 어떻게 생겨먹었냐고 물어본 적이 있었습니다.
아마 지인이 보기엔 학생들의 학습 주체성이 결여된 것으로 보였던 듯 합니다. 그저 피동적으로 이것 외우라고 하면 외우고, 이렇게 해야 한다고 하면 따라서 하는... 과거 20여년전까지 전형적인 한국 교육시스템이었던 주입식 암기 교육의 잔재를 뉴질랜드 학교에서 찾아볼 수 있다는 다소 당황스러운 결론을 접하게 되는데요.. 사실 이러한 교육형태는 그냥 그려려니 하고 지나치기에는 사뭇 중대한 부분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스스로의 권익를 보장받기 위해 타인에게 의존하는 자세는 인간의 삶을 나태하고 부정적으로 만들기 때문입니다.
예전에 제가 중국에서 잠시 무역업을 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20대말의 혈기 왕성하던 시절에 인생을 개척해 보겠다고 기염을 토하며 중국과 한국을 오가던 시절이 있었지요. 어느날 중국에서 통역을 담당하던 조선족 직원과 같이 백두산 (장백산)의 산막을 향해 가던 길이었습니다. 당시 6시간동안 타고 가야할 기차는 의자에 쿠션조차 없는 허름한 기차여서 불편하기가 그지 없었는데요. 그런데 한 시간쯤 지나고 나니 역무원이 무슨 큰 상자를 어깨에 메고 지나다니면서 돈을 지불하는 승객들에게 도시락통만한 물건을 건네주더군요. 저는 처음에 그게 정말 도시락인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알고보니 그것은 놀랍게도 장거리 여행을 하는 여객들의 지루함을 달래주기 위한 소형 텔레비젼이더군요. 당시 한국에 네비게이션도 등장하기 전이었는데 휴대용 TV 임대 서비스라니요.. 게다가 중국에서 말이지요. 손바닥만한 흑백 브라운관 TV에 애들 머리만한 배터리를 검은 고무줄로 꽁꽁 싸잡아 매어 놓은 ‘저개발 국가형’미디어기기는 임대비용이 꽤 고가였던듯 직원은 빌릴 엄두를 내지 않더군요. 중국어를 잘 모르는 저야 당연히 빌릴 이유가 없었구요. 그래도 심심할테니 대신 빌려줄까... 생각하고 있는데 그 직원이 불쑥 입을 열었습니다.
‘아니.. 로반, 생각해보십쇼. 이 듕국이 어떤 나랍미까? 린민을 위한 린민공화국 아님까? 그렇다믄서 이러이 돈 있는 놈들만 저런 유흥을 빌리게 하는건 말이 안되는 거 아입미까? 진정으로 린민의 권익을 위한다면 모든거이 다 똑같이 값이 없어야디요. 있으면 다 같이 있고! 없으면 다 같이 없고! 저는 그래야 진정한 린민의 낙원인거라 생각함다. 안그렇슴까?’
순간 어안이 벙벙했습니다. 중국에서 생활을 해보신 분들은 잘 아시겠지만 중국에 가면 공산당은 애증의 대상 그 자체이고 존멸의 대상 그 자체입니다. 자신이 기댈 곳이 필요하면 공산당이 최고이고 자신이 조금이라도 손해를 보는것 같다 싶으면 곧바로 비난의 화살을 쏟아붇는 대상이 공산당이지요. 물론 남 듣는데서 그러는 것은 아니지만 말입니다. 한 동안 그런 이중적인 국민성에 진저리가 나 있던 차에 그 놈의 이기적인 태도를 접하게되니 정나미가 뚝 떨어져서 하품을 몇 번하고는 자는 척했던 적이 있습니다. 비용을 지불하고 TV를 빌릴수 있는 여건이 되지 않는다면 스스로가 더 열심히 일을 하고 노력을 해서 그러한 경제적 여유를 누려야겠다고 다짐하는 것이 당연할진데 오히려 사회탓 정부탓을 하다니요.. 황당한 마음이 들지 않을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 분 또한 사회구조의 피해자가 아니었나 생각되기도 합니다. 특별한 노력이 필요없이 당에서 하라는 일만 얼추 마쳐놓으면 생계가 보장되는 삶을 살아오다보니 진취성이나 창의력에 계발되지 못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것이지요.
그런데 무서운 것은 이 곳 뉴질랜드에도 당시의 중국과 같은 분위기가 퍼져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것입니다. 물론 정치적인 부분이나 사회적인 부분을 말하는 것은 당연히 아니구요.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교육과정의 측면입니다.
얼마전 북쪽에 위치한 R 공립학교에 다니고 있는 한 학생이 볼멘 소리를 했습니다.
‘선생님.. 저 이번 인터널 시험에서 Merit받았어요. 그런데 정말 억울해요’
‘억울해요’ 라는 단어의 의미를 제대로 알고있기나 한지는 모르겠지만 그 여부에 관계없이 이 말이 전달하는 의미는 정확합니다. 이제 한 두번 겪어본 일이 아니라서요..
‘그래? 뭐가 억울한데?’
‘이번에 인터널에서요.. 그게 실험하는 거였거든요. 제가 결론을 쓰는데 ‘전선의 길이가 길어질수록 전기 저항이 커진다’ 라고 썼는데 거기에 꼭 ‘비례’ 한다는 표현이 들어가야 한데요. 그런데 길이하고 전기저항하고 같이 증가하는 관계를 보여준다는게 비례한다는 뜻 아닌가요? 왜 꼭‘비례’라는 단어가 들어가야만 하는 거예요? 그게 Excellence 포인트였어요..’
순간 마음이 또 갑갑해져서 한 숨만 푸욱 내 쉬는데, 옆에 앉아있던 친구가 불쑥 한마디 거들었습니다.
‘야.. 우리는 NCEA를 하는거잖아.. 그게 NCEA야..’
태어나 처음으로 인터널 시험을 치른 아이..
잘 해보고 싶다며 그래프 그리는 것 하나까지 꼬치꼬치 물어보던 아이..
시험을 치르고 나서 정말 잘 봤다며 기뻐하던 아이..
그 아이는 이렇게 또 한명의 NCEA 불신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앞으로는 어떻게든 기출문제의 정답을 달달 외워서 시험장에 들어가야 하겠다 다짐하며 맹목적 공부의 신봉자가 된 이지요.
이런 아이들에게 창의적인 접근이나 독창적인 아이디어는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그리고 학생들이 스스로의 창의력이나 진취성을 고무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면, 아니 그렇게 해 봤자 손해만 보는 일의 연속이라 생각하며 오히려 거부한다면 그것은 심하게 말해 ‘학습의 종말’에 진배 없습니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학습의 가장 첫 단추인 ‘왜?’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지나친 비약일수도 있겠지만, 아니 지나친 비약임이 확실하지만, 모범답안을 만들어 놓고 그에 맞추어 단어 하나하나를 끼워 맞추어 채점하는 NCEA의 평가법은 앞서 말한 사회에게 모든 책임을 전가하고자 하는 홈리스들의 가치관을 양성하는 과정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성공적인 학습의 여부가 학생이 얼마나 노력하고 공부하느냐 생각하느냐 하는 것이 아니라, 시험 출제자가 원하는, 그리고 이미 정해놓은 그 답을 똑같이 적는 것이라고 배우며 성장하고 그러다보니 스스로의 학습주체성을 상실하게 되는 문제가 발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심지어는 각각의 특정한 분야에 대한 답을 쓸 때 꼭 어떤 단어를 써야 하고 어떤 숫자를 적어야 하고 어쩐 문장으로 설명해야 한다니... 가르치는 저는 항상 답답하고 배우는 학생들은 항상 애처롭습니다.
Y11학생이 Y12에서 배우는 단어를 사용해 답을 썼기 때문에 그 내용이 지극히 정확했음에도 불구하고 오답처리 되었고, 화석이 만들어지는 시간에 대한 소개에서 few hundred year라는 답안은 상식적으로 너무 짧은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숫자이기 때문에 정답이고 ‘Very long time’는 문맥적으로 몇 만년을 뜻함에도 불구하고 숫자가 아니라서 오답이 되었습니다. 수학적으로 명확하게 설명된 두 수식사이의 관계는 문장이 아니어서 오답이고, 전선의 길이가 증가할수록 전기저항이 증가한다는 설명은‘비례’라는 단어를 쓰지 않았기 때문에 오답이라 합니다. 이렇게 한번 또 한번 스스로의 노력이 가치없음을 인정해야 하는 과정을 겪어가며 아이들은 점점 자신감을 잃어가고 점점 더 의존적이 되어갑니다. 그러면서 이런 질문들을 던지기 시작합니다. 도대체 어떻게 공부를 해야 하나요? 지금 가르쳐 주시는 내용은 아주 잘 이해하겠지만 이 내용이 시험에 출제가 되는 내용인가요? 만약 그렇다면 답을 어떻게 써야 감점을 면할수 있을까요?
서글픈 현실입니다. 분명 누군가의 개인적인 관점이 반영되었을 채점 기준에 맞추어 논리 명확한 자신의 정답을 그들의 정답으로 잘라 맞추면서 아이들은 어떠한 인격적 성장을 경험하게 될까요?
인간에게 보편적인 권리, 앞서 언급한 안전한 거주의 권리나 건강한 삶을 영위할 권리가 있듯 학생들에게도 학생으로서의 권리가 있습니다. 그것은 그들의 노력이 결실을 맺어가는 과정에 있어서 어떠한 외압이나 편견, 차별을 경험하지 않는 것입니다. 인간이 자신의 권리를 향유하기 위해 노력하는 자세가 독려되어야 하듯 학생들에게도 그들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이 권장되어야 합니다. 열심히 노력하면 그에 상응하는 결과가 있다는 사실을 경험하게 해 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정말 애석하게도.. 너무 많은 경우에 아이들은 그 반대를 경험합니다. 이것은 마치 가족을 부양할 생계비를 벌기위해 애쓰고 노력해서 객관적으로 납득할만한 결과를 도출했음에도 불구하고 보고서의 한 문장이 고용주의 마음과 달라서 급여를 받지 못하는 상황과도 같습니다. 과연 이런일이 벌어진다면 우리는 ‘억울’ 하다는 표현 말고 또 다른 어떤 표현으로 그 갑갑한 심정을 표현할 수 있을까요? 이런일이 되풀이 된다면 동영상 속의 그 분들처럼 아예 도전과 노력이라는 진취적 자세를 영영 잊어버리게 되는 것은 아닐까요?
2003년 이후 지난 20년간 NCEA는 많은 변화를 겪어왔습니다. 많은 분들이 머리를 싸매고 고민했고 또 수 많은 학생들이 급변하는 제도에 적응하지 못해 눈물을 흘리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작금의 키워드방식 채점기준이 개선되지 않는 한 급격한 난이도의 수직상승도, 다양한 연령대의 출제위원 구성도 큰 개선의 효과를 거두기는 어려울 듯 합니다.
NCEA 과정상의 최상급 시험인 국가 장학금 시험에는 여타의 시험과는 조금 다른 평가방식이 적용됩니다. 각각의 문제에 대해 모범답안과 같은 예시가 등장하고 키워드와 핵심문장이 있는 것은 동일 하지만 완전하지 않은 답안에 대해 부분점수를 부여하는 합리성이 적용됩니다. 더구나 핵심 키워드가 없으면 득점을 못한다거나 하는 어불성설도 존재하지 않구요. 저의 개인적인 바람은 이런 장학금 시험의 평가방식을 모든 NCEA 시험에 적용하면 좋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물론 가장 좋은 방법은 현재의 에세이 시험방식을 철폐하는 것이겠지만 그게 당장 될수 없다면 차선책이라도 따라야 할 테니까요.
바라기는 우리의 아이들이 지금보다는 조금 덜 억울하고 조금 더 인정받는 교육제도안에서 창의적이고 진취적 어른으로 성장하여, 문제의 본질을 객관적인 관점으로 분석하고 문제의 해결을 스스로의 노력으로 이루어가는 건전하고 건강한 ‘권리향유자’가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