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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 허 수경
문득 나는 한 공원에 들어서는 것이다
도심의 가을공원에 앉아있는 것이다
이 저녁에 지는 잎들은 얼마나 가벼운지
한 장의 몸으로 땅 위에 눕고
술병을 들고 앉아있는 늙은 남자의 얼굴이 술에 짙어져 갈 때
그 옆에 앉아 상처 난 세상의 몸에서 나는 냄새를 맡으며
차가운 해가 뜨거운 발을 굴리는 것을 바라보는 것이다
얼마나 다른 이름으로 나, 오래 살았던가
여기에 없는 나를 그리워하며
지금 나는 땅에 떨어진 잎들을 오지 않아도 좋았을
운명의 손금처럼 들여다보는데
몰랐네
저기 공원 뒤편 수도원에는 침묵만 남은 그림자가 지고
저기 공원 뒤편 병원에는 물기 없는 울음이 수술대에 놓여 있는 것을
나는 몰라서
차가운 해는 뜨거운 발을 굴리고
지상에 내려놓은 붉은 먼지가 내 유목의 상처를
물끄러미 들여다보는 동안
술 취해 잠든 남자를 남기고
나는 가을공원에서 나오는 것이다
♣ 허 수경 : 시집으로 <<슬픔만한 거름이 어디 있으랴>>, <<혼자 가는 먼 집>>, <<내 영혼은 오래되었으나>>, <<청동의 시간, 감자의 시간>>, <<빌어먹을, 파차가운 심장>>,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 산문집 <<길모퉁이의 중국식당>>, <<그대는 할말을 어디에 두고 왔는가>> 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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