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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에서 온 연인의 범어사 템플스테이
그런 길이 있다.
분명 긴 시간을 내야만 도착지에 이를 수 있는 길인데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설레고 기다려지는 길.
길에 오르기 시작하면 기쁨은 더욱 선명해지고
그 기쁨에 가속도가 붙어 어느새 도착지에 이른다.
그렇게 마음이 가는 길은 멀어도 멀지 않다.
스페인에서 먼 길을 사이에 두고 사랑을 키웠던 두 사람
하비에르(Javier)와 루치아(Lucia)는
함께 휴가를 내어 범어사를 찾았다.
사막이 아름다운 건 어딘가에 우물이 숨어있기 때문이라는 말처럼 우리나라의 천년고찰이 아름다운 건 신비한 전설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으로부터 1,345년전인 신라시대 문무왕(678년) 때 세워진 부산 범어사는 고승대덕을 배출하며 해인사, 통도사와 함께 영남의 3대 사찰로 자리매김했다. 범어사에는 ‘하늘나라 물고기’의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아득히 먼 옛날 하늘나라의 금빛 물고기는 지구별의 많고 많은 산 중에서 이 산으로 내려와서 산꼭대기에 있는 금빛 샘에서 놀았다고 한다. 이 이야기로 하여 산은 금샘을 품고 있다는 뜻의 금정산(金井山)으로, 금정산 동쪽 기슭에 자리한 절은 하늘의 물고기란 뜻을 담아 범어사(梵魚寺)라 명명되었다고 한다.
인연의 힘이란 이런 것일까. 스페인에서 범어사로 템플스테이를 하러 온 하비에르와 루치아가 수줍은 미소를 띠며 연인이 된 계기를 이야기할 때 그 모습에서 하늘나라 물고기가 겹쳐 보이는 듯했다.
“루치아는 일을 하면서 알게 됐어요. 제가 미디어 플랫폼 마케터로 일하면서 산업디자이너인 루치아와 업무차 연락을 하게 되었는데 점차 호감을 느꼈고 연인이 되었습니다. 각자 갈리시아와 마드리드에서 일하고 있었죠. 두 지역의 거리는 600km, 먼 거리이지만 그건 우리 만남에 장애물이 되지 못했어요.”
하늘나라에서 금정산까지 아득히 먼 거리를 찾아온 금빛 물고기처럼 물리적 거리를 훌쩍 뛰어넘는 순정한 마음을 간직한 두 사람은 연인이 되었고 스페인에서 10,179km 떨어진 한국에 함께 왔다.
처음 만나는 한국, 그리고 범어사
“하비에르와 20일의 휴가를 함께 보내기로 했어요. 첫 10일은 한국에서, 다음 10일은 튀르키예에서 보낼 계획이에요. 범어사에 오기 전에 전주, 제주, 서울 등을 여행했어요. 청결한 환경과 친절한 사람들이 한국의 첫인상으로 강하게 남아있어요. 대중교통도 편리해서 첫 여행이지만 불편함을 느끼지 못했고요. 범어사도 어려움없이 왔습니다. 한국의 전통문화를 체험해보기 위해 범어사를 선택했어요. 외국인을 대상으로 템플스테이 프로그램을 운영한다는 점이 좋았어요. 템플스테이 프로그램이 시작되기 전에 조금 일찍와서 범어사를 둘러 봤는데 처음 보는 건축양식과 상징물 등이 인상적이었어요.”
마치 노래하는 듯 스페인 억양이 묻어나는 영어로 이야기한 루치아는 내내 잔잔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주위의 어둠을 밝히는 듯 환한 그 미소의 아름다움을 누구보다 잘 아는 하비에르가 “루치아는 스페인어로 빛이란 뜻입니다!”라고 설명해 주었다. 그의 얼굴은 ‘이름처럼 빛이 되어 주는 존재이죠!’라고 말하는 듯 연인에 대한 자랑스러움이 가득했다.
바야흐로 ‘가을로 접어든다’는 처서가 지난지 사흘이지만 대기 중의 습기가 좀 잦아들었을 뿐 햇살이 제법 강렬했다. 범어사 템플스테이 프로그램을 맡고 있는 연수국장 서연(西蓮) 스님은 두 사람을 선문화교육관 안의 카페로 안내했다.
템플스테이 프로그램이 시작되기 전, 잠시동안이지만 향긋한 커피를 선물하고 싶다고 스님은 말씀하셨다. 스님은 “가을, 연인들에겐 차가 잘 어울리죠. 다양한 나라에서 많은 분들이 범어사를 찾고 있어요. 참 소중한 인연들이지요.”라고 말씀하셨다. 커피 한 잔의 여유가 있는 주말 오후, 범어사 템플스테이관에는 11명의 내국인과 12명의 외국인들이 참가한 가운데 템플스테이 프로그램이 시작됐다. 스위스, 이탈리아, 홍콩, 싱가폴 등에서 온 12명의 외국인들은 영어로 번역된 사찰예절 영상을 보며 1박 2일 동안 체험할 사찰생활을 배웠다. 이탈리아에서 온 니콜라는 분위기 메이커였다. 참가자들 앞으로 나가 절 하는 법 등을 시범 보이며 분위기를 즐겁게 만들었다.
범어사 일주문에서 느껴보는 ‘한마음’
템플스테이관에서 범어사까지는 걸어서 15분쯤의 숲길로 이어져 있다. 작열하는 햇빛을 가려주는 초록 그늘과 싱그러운 바람, 계곡 물소리와 새소리가 어우러지는 숲길을 걸어 도착한 절집의 첫 관문, 범어사 일주문 앞에 이르니 중년 남성이 참가자들을 맞아주었다. 오늘 영어 가이드를 맡은 명산(明山) 님이었다. 젊은 날 해외 영업 분야에서 일을 했다는 그는 정년퇴임 후 부산시 문화유산 해설사이자 범어사 포교사회 교육부에서 활동하고 있다고 했다.
일주문은 하나[一]의 기둥[柱]으로 이루어진 문이란 뜻인데 실상 네 개의 기둥이 지붕을 이고 있다. 이에 명산님은 기둥이 하나이기 때문이 아니라 기둥이 일직선상에 나란히 놓여있기에 일주문이라 한다고 알려주었다.
이렇게 일직선상에 기둥을 두고 지붕을 올린 의미는 분별심을 버리고 일심(一心), 곧 한 마음으로 이 문을 지나 부처를 만난다는 의미가 있다는 것도 배웠다. 불교에서 일심이란 하심(下心)과 같은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내 마음속에 자리한 여러 가지 상(相)을 내려놓는 그 마음에는 잘못된 분별이 자리하지 않는다. 분별하려는 마음이 없는 한결같은 마음은 서로를 성장케 하는 연인의 마음이기도 하다. 내 잣대로 상대를 규정하고 강요하지 않는 마음, 일주문에서 두 손을 맞잡은 하비에르와 루치아의 모습을 보며 일심의 지혜가 앞으로도 계속 이들과 함께 하길 바랐다.
일주문을 지나 천왕문으로, 천왕문을 지나 불이문, 보제루, 미륵전, 비로전을 둘러본 두 사람은 마침내 대웅전 앞에 이르렀다. 하나하나 관문을 지날 때마다 다른 풍경, 다른 가르침이 펼쳐지고 마치 여리게 시작하다가 강렬하게 절정으로 흐르는 교향곡처럼 마침내 대웅전에 이르는 것이 사찰 배치의 특징이다. 대웅전 부처님 앞에서 명산 님은 “저는 불교의 가장 아름다운 메시지는 ‘모든 사람들에게 부처의 마음이 있다’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우리 모두에게는 자비롭고 지혜로운 부처의 마음이 있습니다. 저 하늘의 해가 구름에 가려져 있을 때처럼 우리가 잠시 잊고 있을 뿐이죠. 해는 언제나 존재하지요!”라며 마지막 안내를 마쳤다.
처음 만나는 행복에 대하여
저녁 공양을 마친 뒤 우리나라의 전통부채에 민화를 그리는 시간이 펼쳐졌다. 그림을 전공하신 서연 스님은 “민화는 조선시대 서민의 밝고 소박한 마음이 담긴 그림으로 누구나 쉽게 그릴 수 있습니다. 그림의 소재에는 액운을 막고 희소식을 듣고자 하는 마음이 담겨있습니다. 이 부채의 도안은 ‘까치와 호랑이’인데 까치는 반가운 소식을, 호랑이는 나쁜 기운을 막아주는 힘을 상징하지요. 여기 이 연꽃 도안은 진흙 속에서도 맑고 향기롭게 피어나는 연꽃과 같은 삶을 뜻하고요. 부채는 여름날 시원한 바람도 만들지만 안 좋은 것들을 다 날려 보낸다는 의미도 있어요. 그래서 저희는 연중 부채에 민화 그리기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어요.”라고 설명해 주셨다.
대부분의 남성 참가자들이 ‘까치와 호랑이’ 도안을, 여성 참가자들은 ‘연꽃’ 도안을 선택한 점이 재미있었다.
하비에르와 루치아도 그렇게 선택했다. 오랜만에 그림을 그려본다는 루치아가 연꽃 채색을 막 완성했을 때 느낌을 물으니 “뭔가 긴장이 풀리고 고요한 느낌이에요.”라고 했다. 참가자들이 그림을 다 그리면 서연 스님이 금빛 물감으로 연꽃의 줄기에 잎맥을 그려주거나 호랑이의 수염을 그려 넣어주며 화룡점정(畵龍點睛)하셨다. 스님은 부채에 자신의 소망을 써보라고 하셨다.
‘행복, 사랑, 건강’이란 글자가 하비에르의 부채에 쓰여졌고 루치아는 ‘사랑, 건강, 평화’를 썼다. 한국어 사전을 찾아서 처음 썼다는 한글이 또렷하고 자연스러웠다. 이탈리아에서 온 청년은 영어로 ‘너의 게를 찾아라 (Find your crab)’라고 썼다. 왜 ‘게’냐고 묻자 그는 미소 지으며 옆으로 걷는 흉내를 냈다. 세상을 남다르게 살아가고픈 바람일 거라고 생각했다.
처음 방문한 한국에서 처음 만들어본 부채를 신기하게 바라보는 두 연인에게 서로가 미친 새로운 영향에 대해 물어보았다. 하비에르는 루치아를 만나며 더 나은 사람이 되고자 노력하는 자신을 발견했다고 하고, 루치아는 새로운 경험과 낯선 세상을 향해 열린 하비에르의 열정을 배운다고 했다. 하비에르의 제안으로 처음으로 스킨스쿠버를 배우고 상어도 보았다며 웃는 루치아의 얼굴에서 ‘처음 만나는 행복’의 기쁨이 전해졌다.
마음에 금빛 우물을 간직한다면!
이튿날 새벽 3시 30분, 참가자 모두가 함께 짙은 어둠을 가르며 범어사로 향했다. 뭇 생명들을 제도하는 사물의 소리를 듣고 대웅전에서 비춰지는 빛을 장명등 삼아 보제루에 올라 서연 스님의 지도 아래 108배를 하고 108염주를 만들었다. 절 하나에 꿰어지는 한 알의 염주는 처음에는 무심하게 느껴졌지만 점점 뭉클하게 가슴을 두드렸다. 하비에르와 루치아를 비롯해 많은 참가자들이 새벽의 108배를 가장 인상적으로 꼽은 이유도 그 뭉클함 때문이지 않을까 생각해보았다. 108배를 마치고 선문화교육관에서 차담시간이 펼쳐졌다. 서연 스님은 스님들이 생활 속에서 늘 함께하는 참선과 호흡법을 가르쳐주셨다. 차 한 잔을 마실 때도 눈과 코, 혀로 집중해서 마시면 전과 다른 점을 발견할 것이라고 소개해주셨다. 한 잔의 차를 마실 때도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집중한다면 마음에 정결한 마중물을 퍼 올릴 수 있을 터이다. 그리고 그것이 모여 환한 금빛을 발하도록 잘 가꾼다면 어디선가 반가운 물고기가 소중한 벗으로 찾아오지 않을까. 금정산에 깃든 범어사처럼.
“여러분, 잊지 마세요! 우리는 모두 소중한 존재입니다.”
정겨운 차담 끝에 서연 스님의 목소리가 긴 여운으로 가슴을 울렸다.
마침내 모든 프로그램이 끝난 시간, 하비에르와 루치아는 다음 여행지를 위해 탈 버스 시간이 가까웠다며 바삐 발길을 옮겼다. 마음이 가는 길이기에 멀어도 멀지 않은 길을 나서는 두 사람의 발걸음에서 설렘이 묻어났다. 처음 만났을 때와 달리 그들은 두 손을 모아 합장을 하며 인사했고 목에는 108염주를 걸고 있었다.
■ 부산 범어사
부산광역시 금정구 범어사로 250
금정산 범어사 (청룡동 546)
051-508-5726 ㅣ https://www.beomeo.kr
■ 출처: 한국불교문화사업단
템플스테이 매거진(vol.6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