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칼럼 | 지난칼럼 |
구례 화엄사의 적멸보궁에 이르면 네 마리의 사자가 지키고 선 보물 제35호 4사자 삼층석탑을 만날 수 있다. 사자가 지키는 석탑의 중심에는 누군가가 합장을 한 채 곧게 서 있고, 그 앞에는 무릎을 꿇고 공양을 올리는 모습의 석등이 마주한다.
둘이 하나일 때 완전한 하나가 되는 공양의 상. 천년이 넘게 그 자리를 지켜온 두 개의 석탑 위로 해와 달은 영겁의 시간을 달리고, 그 시간만큼 오래된 의식도 멈추지 않는다.
이 세상의 모든 생을 위한 자비의 의식, 공양의 순간이다.
넉넉하고 고요한 땅
구례하면 떠오르는 섬진강 벚꽃 300리, 드넓은 논과 밭, 그 곁을 채우는 산수유와 차나무, 이 모든 것을 지리산이 든든히 품어주는 아름다운 땅.
그런 이유로 꽃이 흐드러진 계절이면 전국 팔도에서 모여든 관광객들이 구례역전부터 줄을 서서 걸어야 한다지만, 여전히 이곳은 고요하고 평화롭다. 흔한 편의점 하나 없이 옛 정취를 간직한 식당들만 드문드문 곁을 지키는 구례구역, 그래서 더욱 정겨운 이 오래된 기차역에서 차로 20여 분을 달리다 보면 어느새 화엄사에 다다른다.
“봄, 가을에는 날씨가 좋아서 사람도 많아. 여름, 겨울에는 덥고 춥다고 사람이 적으니 조용해서 좋아요. 그런데 그때 풍경도 기가 막히게 좋거든. 구례가 그렇게 좋은 동네예요(웃음).”
연신 창밖 풍경을 눈에 담는 이방인에게 택시 기사님이 전하는 구례의 모습은 사시사철 좋지 않은 때가 없다.
슬며시 웃음 짓게 하는 그 따뜻한 자화자찬에는 자기 고장을 자랑스러워하는 이의 마음도, 어떤 상황도 온전히 받아들이며 자족하는 지혜도 함께 담겨 있다.
좋은 것이 어디 그뿐이랴. 예로부터 ‘세 가지가 크고 세가지가 아름다운 땅’이라는 삼대삼미(三大三美)의 고장으로 알려진 구례. 삼대는 지리산, 섬진강, 풍요로운 들녘을, 삼미는 아름다운 풍광, 넘치는 먹거리, 넉넉한 인심을 뜻한다. 그리고 화룡점정처럼 자리한 천년고찰 지리산 화엄사의 존재는 이 땅을 더욱 특별하게 하는 것이다.
풍요롭고 넉넉한 이 땅을 고스란히 닮은 사찰, 들뜬 마음을 고요히 만져주는 여법한 기운은 이 시대의 사람들을 여전히 화엄사로 향하게 한다. 무엇 하나 치우침 없는 균형의 공간에서 찾는 휴식, 오늘 화엄사를 찾은 이유이다.
산사의 밥상
“어서 오세요, 숙소는 좀 어떠십니까. 집에 온 것처럼 편히 지내세요, 다실에 있는 차도 마음대로 내려 드시면 됩니다.” 화엄사 템플스테이를 이끌어가는 성각 스님의 정겨운 인사가 이방인의 긴장된 마음을 따뜻하게 녹인다.
“공양하러 가시지요, 오늘 점심은 특식입니다. 산사의 밥상을 한번 맛보세요. 화엄사 공양이 유명합니다.”
여장을 풀자마자 들려온 반가운 점심 공양 소식! 염치 불구하고 스님을 따라나선다. 매주 수요일과 일요일 점심은 특식이 나오는 날이라고. 특식은 주로 냉면, 콩국수와 같은 면 요리가 주를 이루는데, 오늘의 메뉴도 늦더위를 달래주는 시원한 메밀국수이다. 그런데 그 곁에 함께 차려진 유부초밥과 먹음직스러운 주먹밥, 겉절이와 잘 익은 무김치, 떡, 치자로 곱게 물들인 무절임까지.
그 자태가 잔칫상에 내놓아도 될 만큼 예사롭지 않다. 게다가 맛은 어찌나 좋은지!
불가에서는 스님들을 절로 미소짓게 만든다는 뜻에서 국수를 ‘승소’라 부른다 했던가. 오늘만큼은 스님이 아닌 누구라도 행복한 식사를 했을 터다. 이런 내 마음을 눈치챈 듯 곁에 있던 보살님이 설명을 더한다.
“지금은 스님들의 안거 기간입니다. 체력도 정신력도 많이 필요로 하시는 때예요. 그러다 보니 화엄사 공양간에서는 이 기간에 더욱 신경을 많이 씁니다. 저 음식들이 다 스님들 수행 잘 하시라고 응원하는 겁니다(웃음).”
그제야 유독 정갈한 음식 차림이 이해가 간다. 그저 평범한 한 끼가 아니다. 마냥 맛 좋은 음식이 아니라 깨달음을 향해 정진하는 이들을 위한 응원의 마음이다. 산사의 밥상이 그냥 밥이 아니라 ‘공양’인 이유이다. 그 귀한 마음이 과분해 더욱 꼭꼭 씹어 밥을 넘기는 시간, 화엄사의 공양은 글자 한 줄 없이 사람을 배우게 한다.
단 한 번의 생이기에
한자리에 모인 오늘의 템플스테이 참가자들을 바라보며 스님은 불가의 이야기를 하나둘 풀어나간다. 이윽고 이야기는 일상 속에서 쉽게 할 수 있는 명상법으로 향했다.
“우리가 능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있는 건 스스로 마인드 컨트롤이 될 때입니다. 하지만 쉽지가 않지요. 그 이유는 집중을 방해하는 망상 때문입니다. 명상은 망상을 거두고, 내 마음의 힘을 기르도록 도와줍니다.” 참가자의 이름을 하나하나 부르며 명상법을 전하는 스님을 따라 참가자들도 고르게 숨을 쉬고, 자세를 가다듬으며 명상의 시간에 젖어 들었다.
“태어났을 때부터 뛰어다녔다는 사람은 없지요? 기고, 넘어지고, 엎어지고 한 걸음을 떼기 위해 용을 쓰며 아기는 어느 순간 걷게 됩니다. 명상도 마찬가지예요. 계속해서 내 행동을 관찰하고 숨을 쉬어보세요. 아마 큰 도움이 될 겁니다.”
명상 후 스님의 안내로 사찰 안내와 예불, 그리고 차담이 이어졌다. 사천왕문을 지나며 “착하게 살면 누구나 하늘의 천신도 되고, 인간도 될 수 있지요. 불교는 윤회의 믿음을 가진 종교니까요.” 담박한 설명을 더한 스님은 따뜻한 차와 함께 다시 한 번 이야기를 전한다.
“불교는 윤회를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시 태어났을 때 전생을 기억하지 못합니다. 만약 그랬다면 우린 모두 아기 때부터 천재 소리를 들었을지도 몰라요(웃음). 하지만 그런 일은 없습니다. 그건 지금 이 현생이 처음이자, 마지막과 같다는 뜻입니다. 아무리 윤회를 해도 우리는 매번 새로운 생을 사는 것이지요. 그러니 우리는 행복해야 합니다. 다음을 이야기하는 대신, ‘지금 이 순간’ 나 자신이 행복하도록. 단 한 번의 생이니까요. 그런 마음으로 우리 모두 행복하게 살아갑시다.”
복을 짓는 사람, 공양주
스님과 함께했던 사찰 안내 시간, 다 함께 화엄사를 대표하는 보물인 4사자 삼층석탑을 찾았다.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모셔진 그곳에 다른 그 무엇도 아닌 ‘공양’의 모습이 남아 있을까. 그것은 공양이 시공간을 초월한 자비의 행위이기 때문이다. 이 순간의 나와 뭇 생명, 혹은 또 다른 세계의 누구일지라도 모두 평안하기를, 고통에서 구제되기를, 끝내 깨달음을 얻어 자유를 얻기를 바라는 간절한 기원이기 때문이다.
뉘엿뉘엿 지는 해를 뒤로하고 적멸보궁에서 내려와 맞이한 저녁 공양은 이곳을 방문한 이방인의 몸과 마음을 채워주고, 다시 아침이 되었을 때 어스름한 안개 너머 불을 밝힌 공양간은 마치 또 다른 법당처럼 느껴졌다. 속을 편안히 해주는 들깨죽과 따뜻한 반찬들로 공양을 마치고 화엄사 공양간의 수장, 공양주 마하연 보살님을 만났다.
국내 내로라하는 방송과 언론매체에서 그녀를 담기 위해 수차례 화엄사를 찾고, 또 이곳의 한끼를 잊지 못해 몇 번이나 다시 오게 만든다는 전설의 공양주. 누구에게도 음식을 배운 적 없지만 마하연 보살님만의 수백, 수천 개 조리법으로 화엄사의 삼시세끼는 매번 활짝 피어난다.
“공양을 준비할 때 가장 주의해야 하는 것은 마음가짐이에요. 속이 상한 채로 음식을 하면 스님들은 단번에 알아내세요. 공양주 보살 오늘 무슨 일 있나? 하신다니까(웃음).”
그런 이유로 마하연 보살님과 공양간 식구들은 음식을 만들기 전 반드시 차담 시간을 통해 마음을 가다듬는다. 30여 년 전, 공양주 보살로 일해달라는 제안을 받은 이후 평생 수행의 길로 삼겠노라 원을 세웠다는 마하연 보살. 그에게 음식은 수행이고, 그 음식을 받는 이들의 수행이 자신의 수행과 다름없었다.
“장을 담글 때 밀가루를 쓰지 않아요. 금방 삭아버리거든. 대신 연근을 넣어 발효 숙성도를 유지하고, 배추김치는 설탕 대신 파프리카를 갈아 넣어 색을 내고 은은한 단맛을 내는 거야.”
“사찰음식은 짜면 안 돼요. 소화가 잘 안 되어서 스님들 수행에 방해가 되니까.”
염분이 많은 절임 반찬 수를 줄이고, 단맛은 직접 만든 청으로 내는 건강한 식단은 수행에 도움이 되기 위한 숱한 고민 끝에 나온 방법이다.
“한번은 어떤 스님께서 그러셨어요. 안거철은 마하연 보살님과 스님들의 싸움이다. 상차림을 보면 열심히 하지 않을 수가 없다고요(웃음).”
‘가장 자신이 있는 음식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비가 오면 오늘은 어떤 음식을 해야 할까? 하고 고민한다는 아리송한 답이 돌아온다. 모든 재료는 자연에서 오고, 인간 또한 자연의 영향을 받는 존재이기에 계절과 날씨, 제철 재료와의 조화를 생각해 그날의 식단을 정해야 한다는 것. ‘나’가 우선이 아닌, 자연의 섭리를 따르는 것이 몸에 밴 고수의 우문현답이다.
“나이가 들고 생각이 깊어질수록, 또 수행이 좀 더 될수록 음식에서 그전과는 다른 맛이 나요. 그래서 내가 바라고, 궁금한 건 단 하나예요. 지금보다 나 자신이 더 깊어졌을 때 과연 어떤 맛을 낼 수 있을 것인가. 지금 나는 그곳을 향해 가는 중인 거예요.”
언젠가 자신이 떠났을 때도 스님들의 수행에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사람들에게 사찰음식 강의를 시작했다는 마하연 보살님. 그녀의 삶 속에 화엄사 석탑의 공양 상이 전하고자 했던 마음은 지금도 유효하다.
살아있는 모든 것은 스스로 균형을 잡기 위해 노력한다.
내 마음의 균형을 잡기 어려울 때, 가끔 삶이 힘에 겨워 휘청거릴 때 화엄사로 발길을 옮겨 보는 건 어떨까.
내 영혼을 채워줄 완전한 한 끼가 기다리는 순간, 화엄사의 공양 시간이다.
■ 구례 화엄사
전남 구례군 마산면 화엄사로 539
061-782-7600 l http://hwaeomsa.or.kr
■ 출처: 한국불교문화사업단
템플스테이 매거진(vol.6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