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씨 도둑은 무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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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씨 도둑은 무죄

0 개 408 템플스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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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세상이 하얀 휴식에 드는 계절, 나는 간간이 지난 가을의 정원을 떠올리며 무채색 계절을 화사하게 물들여 보곤 한다. 가을 정원에서 나는 이런 생각에 잠겼다. 꽃씨를 훔치는 도둑은 죄가 될까, 되지 않을까?


가을 아침 마주친 부부를 통해 새삼 이 문제가 명상의 실마리가 되었다. 초면의 부부는 구절초 가득 핀 정원을 거닐다가 꽃이 진 황금해바라기(금화규)가 반가워 손수건에 씨앗을 받아오는 길이라 했다. 나와 마주치지 않았으면 도둑이 될 뻔했다며 무안해했다. 나는 환한 미소로 ‘꽃씨 도둑은 아름다운 무죄’라며 흔쾌히 나누었다. 세상엔 다양한 절도죄가 있지만 적어도 꽃씨 도둑은 죄를 묻기 곤란하다. 그 행위 속에는 고운 마음이 스며있기 때문이다. 누군가에 의해 옮겨지는 꽃씨는 그 주변을 향기롭게 할 것이므로 죄가 성립되지 않는다. 아주 귀한 꽃씨라면 몰라도 흔한 꽃은 세계만방으로 전파해야 한다는 것이 나의 지론이다.


가을 우리 절 정원에는 백일홍, 코스모스, 봉선화, 구절초 등 가을꽃 씨앗들이 알알이 맺힌다. 이곳을 방문하는 이들이 원하면 언제든지 씨앗을 털어주고 나머지는 보관하였다가 내년 봄에 꽃모종으로 사용한다. 꽃씨가 바람에 날려 지천으로 번지듯 그렇게 이웃에게 전하며 온 세상을 꽃동산으로 만드는 것이 내 소원이다.


피천득 선생이 발표한 <꽃씨와 도둑>이라는 시를 보면 ‘마당에 꽃이 많이 피었구나. 방에는 책들만 있구나. 가을에 와서 꽃씨나 가져가야지.’라는 내용이 있다. 서재가 잘 꾸며진 집을 들렀다가 그곳 마당에 가득 핀 꽃을 보며 가을에 꽃씨 가지러 와야겠다는 마음을 먹었다는 것이다. 따로 날짜를 기억했다가 가을에 꽃씨 받으러 방문하는 이들이 얼마나 될까. 그런 시대가 아니라서 위의 구절이 소박하지만 따스하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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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젊은이가 전쟁에 나갈 때 고향의 코스모스 씨를 간직하고 있었는데, 그 병사가 전사한 자리에 코스모스가 피어 가을바람에 실려가 고향으로 안부를 전했다는 일화를 읽었다. 사람은 이 세상에 없더라도 꽃씨는 남아 전쟁의 상처를 위로해 준 것이다. 포화 속 방공호에 핀 어린 채송화를 보며 아들의 주검을 찾던 어머니가 울음을 멈추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어느 병사가 채송화 씨앗을 품었다가 장렬한 죽음을 맞이했을 것이다. 아마도 어머니는 꽃을 통해 절망 중에 희망을 보았을지도 모르겠다. 이것이 꽃씨가 가진 거룩한 힘이다.


여기 절에는 제주도 풍경을 재현해 놓은 작은 정원이 있다. 화산석을 돌담 삼아 돌하르방도 배치하여 제법 섬 느낌이 나도록 했다. 그곳엔 버들마편초와 칸나를 무리 지어 심어 놓고 벽면에 ‘내 인생, 꽃길만 걷자’라고 적어두었다. 방문하는 이들에게 위로와 희망을 선사하고픈 평소의 생각이 반영된 정원이다. 삶의 길에서 꽃들에게 위로받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그들은 척박한 환경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기어이 꽃을 피워낸다. 바람에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처럼 꽃들은 저마다의 자리에서 성실한 태도로 우리네 인생을 응원하며 격려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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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를 막론하고 정원 문화는 우리 생활에 여전히 유효하다. 식물에 대한 인간의 사랑은 고금을 관통하는 본능이기 때문이다. 종교에서는 인간이 잃어버린 신성을 식물이 간직하고 있다고 본다. 그래서 누구나 꽃 앞에서는 순수한 본성에 귀의하게 된다. 분명한 것은 나이와 성별과 상관없이 꽃을 보며 화를 내는 사람은 없다는 점이다. 식물은 참으로 교묘하게 인간의 복잡한 심성을 다독이며 교화해주는 능력이 있다. 이러하기에 꽃과 나무를 사랑하는 일은 혼탁한 영혼을 순화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꽃과 마주하고 있으면 언제 어디서든 표정이 밝아지기 마련이다. 이러한 꽃의 마술을 처음 발견한 프랑스 심리학자의 이름을 따서 ‘듀센 미소’라 부른다. 이러한 미소는 꽃이 우리에게 선물하는 천연치료제라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한 해 동안 지출하는 꽃값이 평균 만 오천 원이라는 기사를 읽었다. 유럽이나 일본 등과 비교하면 우리는 꽃을 구입하고 선물하는 일에 아직은 인색하다는 통계가 아닐 수 없다.


나는 가끔 이 나이에 꽃을 가까이 두지 않았다면 무엇으로 기쁨을 삼았을까 싶다. 지금의 기쁨을 말하라면 오로지 정원 뜰과 마주하는 것이다. 이제는 사람과의 교류도 흥미 없고 새로운 일에 대한 열정도 식었다. 그렇지만 정원은 날마다 나를 설레게 하고 가슴 뛰게 한다. 호미를 들고 뜰에 나가면 다양한 일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기에 무료할 시간도, 심심할 틈도 없다. 정원 식물들과 계절을 같이 보내고 있는 지금이 더없이 행복하다.


그러나 아무리 꽃을 사랑한들 꽃씨를 구할 수 없다면 허사이다. 그래서 가을날의 꽃씨는 생명을 품고 있는 보고(寶庫)다. 어느 가을날, 천수국 꽃씨를 받으러 이웃 마을에 다녀왔다. 우리 정원에도 이 꽃이 많긴 하나 그 곳은 품종이 다른 꽃들이 피어 있어서 가을에 재차 갈 것을 약속했더랬다. 내가 준비해 간 봉선화 씨앗을 답례로 주고 돌아오면서 마음은 참 풍요로웠다. 봄날엔 꽃을 나누고, 가을엔 꽃씨를 나누는 인정이 우리 둘레에 넘쳐났으면 좋겠다.


새로 문을 연 가게가 있었다. 어느 여인이 가게에 들러 주인에게 물었다.

“이 가게는 무엇을 팝니까?”

주인이 빙그레 웃으면서 대답했다.

“당신이 원하는 것이면 무엇이든 구할 수 있습니다.”

이 대답에 상기된 여인은 행복을 떠올렸다.

“평화와 사랑을 가져다주는 행복의 열매를 사겠습니다.”

주인은 다시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미안하지만, 이 가게에는 열매는 없습니다. 오직 씨앗만을 판매합니다.”


씨앗을 심지 않고 어찌 열매를 거두겠는가. 씨를 심지 않고서는 행복의 열매도 없다. 지금 내가 누리는 행복은 사소한 일상들이 씨앗 되어 만들어진 결과이다. 행복해지려면 인생의 정원에 씨앗을 뿌려라. 행복의 씨앗은 연민, 자비, 봉사, 희생, 노력, 열정, 감사, 친절, 만족 이런 것일 터이다.


씨앗 없이 피는 꽃이 없듯 원인 없는 결과도 없다는 걸 명심해야 한다.


나와 교우하는 지인은 동네를 다니며 꽃씨를 받아 이웃에게 전하는 일을 하고 있다. 그러다가 남은 씨앗은 주인 모를 빈터에 뿌려 주거나 골목길 화단에 묻어 두고 온단다. 한번은 자신이 다니는 절 담장 아래에 분홍 달맞이꽃 씨앗을 남몰래 뿌렸는데 그해 여름에 꽃이 활짝 피었단다. 영문 모르는 사람들은 의아해했다지만 그것은 그 혼자만 즐기는 비밀 선행이었다. 그 씨앗은 해마다 번져 지금은 무리를 이루어 피고 진다고 했다.


꽃씨는 이렇게 아름다운 마음씨에 의해 방방곡곡 퍼져 나간다. 꽃씨가 그냥 꽃씨일까. 자비와 평화의 꽃씨일 것이다. 꽃씨가 사람과 사람에게 전해지면 세상은 온통 축복의 꽃밭이 된다. 꽃밭에서는 서로 우열을 뽐내지도 않고 시비를 가리지도 않는다. 그냥 조화롭게 자신의 향기와 개성을 드러낼 뿐 다투거나 시샘하지 않는다.


인도의 스승 라즈니쉬는 모든 종교는 ‘평화의 정원’이 되어야 한다고 역설했고 수덕사의 만공선사는 ‘세계일화(世界一花)’를 강조했다. 세상 모든 인류는 공영해야 하고 평화를 구현해야 하는 큰 정원의 일원이라는 뜻이다. 모두가 정원의 꽃이 된다면 전쟁할 일이 무엇 있겠는가. 거기엔 이념이나 사상도 없고 오직 상생과 화합만 존재한다. 이름만 다를 뿐 정원에 모이면 모두가 꽃이라는 말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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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강단에 설 때마다 종교보다는 ‘종교성(宗敎性)’을 주제 삼는다. 종교를 믿는 목적은 마음의 고요와 평화를 실현하는 것이다. 결국 그 종교의 가르침을 인생의 양식으로 삼는다는 뜻과 같다. 만약 종교를 받아들인 후 옹졸하고 투쟁하는 마음이 높아졌다면 그 사람은 믿는 방식을 바꾸어야 한다. 흔히 불교 신자라고 말할 때, 그 대상은 부처님이 아니라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그러니까 부처님의 진리를 등불로 삼아야 한다는 뜻이지 부처님을 신격화하지 말라는 것이다. 즉, 교조주의에서 벗어날 때 더 큰 진리로 확장할 수 있다는 말인데 지금의 종교갈등은 모두가 교조주의 전형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예수를 믿지 말고 그 가르침을 따르라. 마호메트를 신봉하지 말고 그 뜻을 따르라. 그렇다면 종교라는 큰 정원에서 조화롭게 어울릴 수 있다. 적어도 자신의 교의에 매몰되어 서로를 비방하거나 무시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왜 그럴까. 그것은 종교만 따지기 때문이다. 신앙의 본질을 잊지 않고 자신의 삶을 선하게 이끌어 가는 것이 종교인의 본 얼굴이다. 그 본질 속에서 신앙을 구하는 일, 그것이 종교성이라는 것을 말하고 싶다. 그러므로 종교를 따르지 말고 종교성을 배워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거듭 말하지만 참다운 신앙인은 종교라는 이름이 아니라 그 가르침을 따르는 것이다.


한 송이 꽃에는 수백 개의 씨앗이 숨어 있다. 씨앗이 인연이 되어 수만 개의 꽃을 피워내는 보살행을 하는 셈이다. 세상이 시끄럽고 혼탁하여도 나는 이 일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이 씨앗이 종래에는 이 세상을 화엄 정토로 장엄할 것이라는 확신 때문이다.


겨울, 나는 꽃피는 봄을 기쁜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다.


■ 출처: 한국불교문화사업단 

템플스테이 매거진(vol.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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