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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도 마르지 않은 축축한 이른 아침부터 마당 의자에 나와 앉아있는 여인이 있군요. 볼품없이 뚱뚱하고 거칠게 생겨서 나이를 짐작하기도 어려운 마오리 아줌마였습니다.
둥글고 작은 테이블에 턱을 괴고 앉은 뒷모습이 너무 쓸쓸해 보였습니다. 언뜻 몸을 돌리는데 선글라스를 썼더군요. 한손에는 와인잔을 들고 있었는데 벌써 많이 마신것 같았습니다.
햇님이 얼굴도 내밀기 전인데 선글라스라니? 남모르게 눈물을 흘리고 있는게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선들 바람에 흩날리는 낙엽 때문에 마음이 추웠을까요? 보는 사람마저 등이 시려오는 가을 아침입니다.
와인 한 모금 마시고나서 허공을 바라보는 모습이 평소의 그녀답잖게 왠지 낯설었습니다.
그녀는 누구보다 씩씩하고 활발하고 명랑한 여인이었습니다. 무거워보이는 몸을 가볍게 흔들면서 걸음걸이도 날쌨습니다.
그 집에는 항상 사람들 발길이 끊이질 않아 도대체 그녀의 신분이 궁금하기도 했습니다. 특히 청년들이 시도 때도없이 풀방구리에 쥐 드나들듯 하는가 하면 아예 동거를 하는 청년들도 있었습니다. 비좁은 집에 어찌 저리도 많은 사람들이 기거를 할 수 있을까? 가족도 아닌 또래들이 줄줄이 칫솔을 물고 밖으로 나오는가 하면 어떤 때는 현관계단에 걸터앉아 음식을 먹기도 했습니다.
낮에는 애들까지 데리고와서 저들끼리 놀게 팽개치고 수다판을 벌이는 여인들의 천국이기도 했습니다. 마시는건 음료수인지 술인지 빈병들이 박스에 수북이 쌓여가곤 했습니다.
아무에게도 간섭받지 않는 저들만의 세상을 만들어 동네가 떠나가게 웃고 떠들고 심심할 틈도없이 지내는 배짱 두둑한 여인이기도 했습니다.
그 집 마당은 사람들 말고도 늘 어수선하고 질서가 없었습니다. 낚싯대가 몇대씩 화단에 헝클어져 딩굴고 세탁기가 나와서 선반구실을 하기도 했습니다.
제법 큰 식탁엔 이불보퉁이가 얹혀있고 작고 둥근 탁자는 그녀의 식탁입니다. 먹고 마시고, 혼자 있을 때도 늘 병나발을 불고 있더군요. 보통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마당인지 거실인지... 노숙자를 연상케 하는 생활 모습이 전혀 불편해 보이지 않는게 이상했습니다. 누구 눈치 안보고 그리 살 수 있는건 어떤 특별한 체념인지도 궁금했습니다.
아무런 생각없이 편하게만 사는 줄 알았던 그녀인데 그 날 의 모습은 정말 특이해서 놀랐습니다.
그녀도 문득 가을을 느꼈을까요? 두툼한 점퍼를 걸치고 있었습니다. 소매없는 원피스 차림으로 내놓고 다니는 건강한 근육질이 언제나 부러움을 주었었는데 말입니다.
사월 중순. 햇살이 따갑게 등을 어루만져도 찬바람이 거슬리는 계절입니다. 철벽으로 무장한 여인의 마음을 거칠것 없이 파고드는 송곳같은 힘의 계절임을 실감했습니다.
정열의 불꽃으로 타는 듯, 붉은 다알리아 꽃이 그녀의 곁에서 탐스럽고 화려하게 피어 아양을 떨고 있습니다. 발밑에서 꼬리를 치며 재롱을 떠는 고양이 두마리도 그 순간만큼은 아무런 위안도 되지 않는 것 같았습니다.
가슴 밑바닥에서 치솟는 참았던 아픔을 와인으로 달래며 견딜수 없는 슬픈 눈물을 선글라스 안에서 흘리는 여인.
청바지에 낡은 티 차림으로 페인트 통을 들고 아침마다 집 을 나서던 남자가 그녀의 남편이었습니다.
검은 피부의 여인보다 해사한 인상의 탄력있고 젊어보이는 남자였습니다.
매일아침 늘상 같은 시간대에 밖에 나와 느긋하게 담배를 피워물고 휘적휘적 걸어서 차에 오르던 남자였습니다.
언제부터인가 그가 보이질 않았습니다. 출장을 갔을까? 여행을 갔을까? 서툰 추리는 빗나갔고 그는 영영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이혼을 했는지 갑작스럽게 사별을 당했는지 알 수 없는 숙제로 몇 해가 흘러갔습니다.
분명 추억으로 남았을 가슴속 회한을 이른아침 알콜로 달래고 있을 그녀임을 깨달았습니다.
문득 빈 잔 하나 들고 뛰쳐나가 따뜻하게 등을 쓸어주며 내 서름도 함께 위로받고 싶었습니다.
동생 사랑이 유난히 특별했던 내 언니, 언니가 하늘나라 여행 떠나신 날을 며칠 앞두고 있는 때 였습니다.
흔들리는 감정을 추스르느라 밤잠을 설치는 요즘입니다. 가볍게 스치는 바람소리에도, 초침을 울리는 시계소리에도, 잠은 멀리 도망가고 초롱한 눈빛은 언니의 영상을 더듬기에 바쁜 밤들입니다.
내 귀국 소식을 듣기만 하면 나보다 먼저 집에 와서 기다려주시는 언니. 그 손맛 유명한 겉절이 한통 급하게 버무려서 무거운 줄도 모르고 들고 와 계셨습니다. 버스와 지하철을 몇번씩 바꿔 타면서 먼 길 한달음에 달려오시던 늙은 언니, 멀리 떨어져 산다고 임종도 못 지킨 형편없는 동생, 나의 사월은 그래서 한달 내내 서럽고 그리움이 짙은 계절입니다.
내 설움 당신설움 와인잔을 기울이며 손잡고 함께 울고싶은 낙엽비 내리는 우리들의 가을 아침입니다.
그 집엔 일년내내 방풍커튼이 드리워져 있어 항상 빈집처럼 을씨년스러웠습니다.
어느 날, 그 유리문 한쪽이 빠끔히 열려있어 혹시 다른 사람이 이사를 왔나 생각을 했는데 아니었습니다.
열린 창문밖으로 옷걸이에 걸린 야한 팬티 한장이 민망하게 시선을 끌었습니다. 노인 혼자사는 집에 젊은 여인의 속옷이라니 깜짝 놀랄 이변이었습니다.
생머리의 단발을 깔끔하게 묶은 여인은 30대 후반이거나 40대 초반으로 보였습니다. 몸은 왜소했지만 그런대로 균형이 잘 잡혀 제법 귀여움이 느껴지는 모습이었습니다.
앳되고 단정한 동양인 이었기에 혹시나? 하고 속으로 반겼지만 그녀는 중국 여인이었습니다.
거북이 목으로 꾸부정한 집주인 남자는 칠십대로 보이는 노인이었습니다. 양 손을 상의 주머니에 찌르고 땅만 내려다보고 걷는 헐렁하게 볼품없는 사람이었습니다. 뭘 하는 사람인지 아침에 집을 나가면 언제 돌아오는지 밤에 불빛도 없었습니다. 인적없는 빈집처럼 늘 그렇더군요.
아직도 그렇게 골초가 있었는지 자주 밖으로 나와 담배를 열심히 피우고는 들어갔습니다.
키위 노인과 딸만큼이나 젊은 중국 여인이 동거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지요.
남의 사생활에 관심을 가질 필요는 없었지만 그 또래의 딸 을 가진 어미의 마음일까요? 왠지 측은지심이 들었습니다.
둘이는 현관 밖 양지바른 계단에 나란히 앉아 해바라기를 하고 있기도 했습니다. 비둘기 한쌍처럼 그림은 좋았어도 말 한마디 없는걸로 보아 언어의 소통이 문제인 것 같았습니다. 표정없는 무료함이 안됐더군요.
중국에서 돈벌러 왔다가 영주권 취득을 목적으로 동거하는 사례같아 씁쓸해 졌습니다.
심심함을 달래려는 듯 여인은 마당에 엉킨 푸서리를 손수 다듬더니 작은 텃밭을 만들었습니다. 뭔가를 부지런히 심으며 재미를 붙이는 것 같았습니다. 시퍼렇게 살찐 파 잎들이 쑥쑥 키 자랑을 할 때쯤 여인의 표정이 조금씩 밝아지기 시작했습니다.
어디서 저런 여인을 만나 살게 되었는지 하찮게 봤던 노인의 능력(?)에 새삼 놀랐습니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어느 아침 문득 밖을 내다보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주황색 조끼를 입고 헬멧을 쓴 장정들이 그 집 세간들을 밖으로 날랐습니다. 한동안 노인이 안 보여서 이상히 생각하던 며칠 후 였습니다.
혼자이던 여인은 어느새 자취를 감췄는지 보이지 않았습니다. 주인없는 집을 인부들이 비우고 있었습니다.
(아! 노인이 갑작스럽게 변을 당한 모양이구나.) 바람처럼 사라져간 여인의 뒷모습이 눈앞에서 어른거렸습니다.
온지도 얼마 안되었으니 영주권도 실패했을께 뻔했습니다.(가여운 여인...) 남의 인생에도 가슴이 저려왔습니다.
정성으로 물주며 키우던 파란 잎새들이 나풀거리며 주인의 손길을 마냥 기다리는 것 같습니다.
사월은 그토록 가슴시리게 깊어만 갔습니다. 새롭게 다가오는 오월은 밝은 햇살처럼 포근하게 맞이하고 싶은 마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