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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은 눈물이 날 만큼 투명했다.
태풍 ‘산바’가 지나간 며칠 후부터 그랬다. 아침마다 안개가 자욱이 산허리를 감아 피어오르고 나무들은 비릿한 냄새를 풍겼다.
마당에 서서 앞산을 바라보며 새벽안개를 마시노라면 몸속으로 차고 비린 축축한 가을 냄새가 들어왔다. 뒷산에서 살찐 산꿩이 구슬프게 울고, 짧은 생애를 슬퍼하듯 매미는 자지러진다. 마당 위에 부서지는 햇볕은 쨍한데 여름날의 서슬은 어느덧 식은 듯 공기는 오히려 서늘하다.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바늘 하나 떨어지는 소리에도 땅이 울릴 것 같은 고요다. 아니 잠자리의 날갯짓, 풀밭을 뛰는 개구리, 영그는 이삭 위를 노니는 메뚜기의 몸짓, 하늘을 유유히 나는 백로의 선회. 소리 아닌 것이 없고 듣고자 하면 들리겠지만 그냥 적요다. 나는 이 가을의 적요를 감당하기가 녹록지 않다. 벌써 며칠째인지 모른다, 툇마루에 앉아 하늘을 바라보고 있기가. 이럴 때 손녀에게 전화라도 오면 좋을 걸…….. 높고 맑은 목소리로 ‘할아버지!’하고 곧 부를 것 같은 환상에 빠진다. 손녀를 못 본지 벌써 일주일째다. 보고 싶다고 울지는 않을까. 그러면 핑계삼아 서울로 갈 텐데. 사람의 연치가 70즈음이면 조석 끼니로 사는 게 아니고 바람과 햇빛과 객담으로 산다는데 소녀와의 시답잖은 객담이 그리워진다.
어스름 녘에 홀로 걷는다. 참나무와 잣나무가 지천인 뒷산을 오른다. 나무와 나무가 서로 의지해 몸 비비는 소리가 사각사각 들린다. 살이 부딪는 소리다. 생명의 소리다. 나무들도 때로는 부딪치면서 때로는 껴안으면서 우렁우렁 커가는구나. 생명이 있는 모든 것들의 삶과 생성이 대개는 그러하리라. 쏴 하고 바람이 인다. 나무들은 잎을 떨어뜨리며 부르르 몸을 떤다. 곧 겨울이 오리라. 나무들은 어깨를 움츠리고 몸을 감추고 가진 것들을 되도록 다 떨어내고 겨울을 준비할 것이다. 나무의 인내가 눈물겹다.
들녘이 나온다. 햇빛 가득한 가을이 거기 있었다. 하늘은 투명하고 맑다. 인적 하나 없는 외길 위에 저녁 햇살이 드리워져 있다. 나는 서늘한 가을의 기운을 깊이 들이켜며 처넌히 걸었다. 어떤 산길에서도 우리는 문득 우울을 만난다. 단풍이 곱게 물든 산기슭을 혼자서 걸어가야 할 때, 이렇게 들판 한가운데 길이 있고 행인 하나 없는 적막을 만날 때, 귀가 멍해지면서 까닭 모르게 서러워진다.
논두렁을 적시는 물소리가 맑다 못해 시리다. 밑바닥의 조각돌까지 훤히 보인다. 몇 마리의 미꾸라지들이 헤엄치고 다닌다. 물이 맑으면 조약돌까지 보이지만 흐려지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맑아지면 부처고 흐려지면 중생이라 했다. 가을은 부처인가? 내 눈에 그렇게 보이면 내가 부처인가? 사바와 정토는 한 발자국 나아가느냐 물러가느냐에 있다고 하지 않는가. 내 마음에 부처를 만들자. 어슬렁거리며 천천히 걷는다. 마을이 나온다. 느티나무가 나오고 정자 밑에 촌로 서너 명이 앉아 한가롭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끝머리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았다.
“어디 사시요?”
“요 넘어 새로 생긴 황토마을요.”
“서울에서 오셨구려.”
“예.”
“살 만하시오?”
“좋은데요.”
“다행입니다.”
농사 걱정, 자식 걱정 등의 이야기가 이어진다. 어디 가나 살이는 비숫하다.
달이 능선 위로 올라 집안 가득히 스며들었다. 베란다에 나앉아 달을 쳐다보았다.
외진 곳에 초가집을 지으니(結盧在人境)
찾아오는 이 없구나(而無事馬喧)
……
동쪽 울타리에서 국화꽃 꺽어들고(菜菊東離下)
유연히 남산을 본다(悠然見南山)
도연명의 시를 읊조리다 나는 무릎을 쳤다.
이 시의 제목이 왜 ‘음주飮酒’인지를 알 것 같았다.
이태백처럼 달을 마주하고 도연명처럼 술을 마셨다. 여항에서 일희일비하며 근근이 살아온 내가, 굳힘 없는 기개를 뽐내던 그런 옛 분들의 기상을 닮을 수는 없겠지만, 흉내야 못 낼 것도 없지 않은가. 죽림에서 맑은 물과 놀며 한가로이 귀나 씻으며 살고자 했지만 속기俗氣가 덜 빠져서인지 아직까지는 외롭다.
바람은 서늘하고 별은 총총했다.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 위로 달빛이 일렁거렸다. 뱀이 풀숲을 스치며 지나가는가? 벌레들의 울음이 딱 그쳤다. 다시 잔을 들어 술잔을 드는데 문득 잔을 잡은 손이 눈에 들어온다. 손마디 여기저기에 톡 불거져 나온 굵은 힘줄들이 어지럽고 주름 잡힌 손등에 저승꽃이 여럿이다.
그렇다. 그나마 조금 있던 머리털도 다 빠져 이제는 구제불능이고, 툭하면 무얼 빠뜨리고 다닌다. 책을 읽어도 잊어버리기 일쑤고, 산 책 또 사기 일쑤다. 휴대전화를 어디에 두었는지 몰라 당황하기가 한두 번이 아니다. 바람 부는 날은 어머니가 보고 싶어진다. 삶도 사랑도 영원할 수야 없겠지만 여름날 한잠 낮잠 잔 것처럼 사라져 버렸다. 빈들이 허수아비처럼 허무하다.
가을 탓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