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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정보시스템을 공부하고 강의했다. 정보시스템은 정보를 만들고 제공하는 시스템이니 IPO의 과정을 거치게 된다. 소위 입력(input), 처리(processing), 출력(output)이라는 3 과정이다. 입력하면 일단 저장되어 처리하고, 출력해도 저장되어 있어야 하니 저장이 잘 되어야 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이 저장에 문제의 소지가 많다. 저장공간인 메모리와 데이터베이스(DB)가 정보시스템의 속도와 성능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입력은 5감이라는 센서를 통해서 이루어지고 뇌에서 처리하고 뇌에 저장한다. 그래서 기억이 중요한 것이다. 인간의 출력이란 우선, 쓰고 말(노래)하는 것이다.
오래된 하드디스크에는 배드 섹터가 생긴다. 하드디스크 같은 기억장치는 레코드판처럼 돌아야 헤드(레코드의 바늘 같은)에서 읽을 수 있기에 많은 트랙을 여러 구역인 섹터로 나누어 저장 단위로 하였고, 여기에 번지(주소)를 부여하여 관리하고 있다. 마치 대단지 아파트를 동과 층, 호로 나누어 관리하는 방식과 같은 것이다. 이 중에 물리적으로 손상이 되어 기억을 시키거나 불러내지 못하는 곳을 배드 섹터라고 한다. 우리의 뇌에 배드 섹터가 생기지 않도록 해야 하지 않겠는가? 충격을 받거나 뇌혈관이 손상되지 않는다면 평생 쓰는 저장장치이니 결코 공장에서 만들 수 없는 저장장치를 가진 것이다.
이젠 완연한 봄이고 곧 여름으로 들겠지만 지난 3월에는 날씨가 변덕스러웠다. 낮엔 덥고 밤이면 춥고, 양지는 따뜻하고 음지는 추웠다. 그래선지 머리가 무겁고 맑지 않았다. 잠이 덜 깬 것 같은 느낌에 몸도 마음도 무기력하였다. 코로나 블루라는 말이 있었으나 인터넷에 찾아보니 두불청(頭不淸)이라는 병 같았다. 영어로는 ‘brain fog’라고 하는 모양이다. 몇 년 전부터서 건망증처럼, 단어가 잘 생각나지 않는 것도 걱정이었다. 얼굴은 떠오르는데 사람 이름이 생각나지 않기도 하고...... 기억하는 전화번호가 거의 없고 가사를 몰라 노래를 부르기가 어렵다. 치매라면 어쩌나 싶어 더 나빠지기 전에 검사를 받아보기로 했다. 두 시간이 걸릴 거라는 검사는 쉽지 않았다. 지시에 따라 손가락을 움직이는지와 계산, 논리, 색 인지, 기억력 등을 묻는 다양한 검사였다. 그림을 보고 따라 그리고는 안보고 그걸 다시 그려보라는 것까지 오랜만에 보는 시험은 힘이 들었다. 그 중에서 가장 어려운 것은 열 개가 훨씬 넘을 것 같은 물건들을 들려주고 그걸 생각나는 대로 말해보라는데 잘해야 대여섯 개를 기억할까?
하여튼 치매는 아니라 해서 자신감을 얻었지만 이제 기억하고 저장하는 힘을 단련해 보기로 했다. 메모를 하고 있지만 그래도 뇌에다 기억해 보려고 한다. 약도 침도 있다는데 스스로 해결해 보기로 했다. 간단하다. 자강불식(自强不息)을 하는 것이다. 햇볕을 쬐고 많이 움직이면 된다. 매일, 만보(萬步)는 기본으로 채우기로 했다. 전해오는 건강명약이 만보라고 들었기 때문이다. 한 달이 지난 지금, 나날이 달라지는 것 같다. 불면증이 있을 리가 없다. 밥맛이 없을 리가 없다. 몸이 찌뿌둥할 리가 없다. 허리가 아플 리가 없다. 뛰다 걷다 하고 가끔은 언덕을 오르기도 한다. 돈 안들이고 내 발로 움직이는 것이 얼마나 귀하고 장한 일인가? 소식다작(少食多嚼)에, 소차다보(少車多步)에, 일소일소(一笑一少) 맞다.
컴퓨터의 출력은 화면에 보여주고 인쇄하거나 스피커로 들려주는 정도이다. 그런데 인간의 몸은 엄청난 출력을 한다. 은퇴 후에 더 많은 입력과 출력을 하려고 버킷리스트(bucket list)를 적어보았다. 너무 많아서 우선 몇 가지를 시작했다. 그 중의 하나가 피아노 연주다. 벼르고 벼르다가 시작했는데 참 잘했다 싶다. 서두르지 않고 계속해서 대중가요 정도는 자연스럽게 연주하도록 해 볼 생각이다. 두 손을 따로 움직인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알겠다. 누가 정했는지 기호로 고저, 장단, 강약에다 서로 어울리는 화음을 배치시키니 빠져들고 있다. 매일 감탄이다.
어쩌다 또 시낭송 강의를 듣고 있다. 어줍지만 내가 좋아하는 시, ‘엄마걱정’은 외우고 있다. 외워보려고 몇 백번은 더 읽었을 것이다. 첼리스트 나탈리 망세(Nathalie Manser)의 ‘Les Anges(천사들)’를 배경으로 낭송해보니 ‘지금도 내 눈시울을 뜨겁게 하는’ 또 ‘해는 시든지 오래’인데 열무 30단을 이고 시장에 가셔서 안 오시는 엄마를 기다리며 ‘찬밥처럼 방에 담겨’ 천천히, 천천히 숙제를 하는 소년이 된다. 그립고 죄송스러운 엄마를 생각하며...... 중학생 때 숙제로 시작한 영시 두 편은 아직도 암송한다. 한 줄을 까먹었다가 새로 찾아 익혔다. 한 달 전에 만개했던 벚꽃을 보며 또 부활절에 다시 생각나서 그걸 글로 적어볼까 하다가 미루고 말았다. 시인은 70평생에서 20년을 빼니 겨우(?) 50년이 남았다고 엄살이다.(And take from seventy springs a score, It only leaves me fifty more.) 내게 50년이 남았다면 축복일까 저주일까? 기억에는 이런, 몸과 머리를 쓰는 일들이 도움을 준다. 50년은커녕 30년이나 남았으면 좋겠다 싶은데 살아 움직이는 동안은 제대로 된 정보시스템이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