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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대 아래 방파제에 앉아 바다를 바라본다. 눈앞에서 파도가 밀려왔다 밀려간다. 파도는 무슨 사연이 저리 많은지 금세 모든 이야기를 다 해줄 듯 다가왔다 사라진다. 밀물로 왔다가 썰물로 몸 바꾸어 떠나는 파도에는 언제나 만남과 헤어짐이 넘실댄다. 밤이 되어 사람들이 모두 돌아간 해변에는 갈 곳 없는 바닷새 몇 마리가 어둠 속을 서성이고 있다.
세월 지나면 잊히는 것이 있는가 하면, 아무리 세월이 지나도 오히려 자꾸만 떠오르는 것이 있다. 오래전부터, 돌아가신 아버지에 대해 언젠가는 글로 정리해봐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좀처럼 시작하지 못한 채 세월이 흘러갔다. 아버지에 대해서 무언가 글로 남긴다는 것이 왠지 불경스러운 일로 여겨졌고 그 기억을 함부로 훼손한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아버지의 아들이 초로에 이르고, 그 아들이 또 아들을 낳는 시간의 윤회 속에서 이제 이 일을 더는 미룰 수 없었다.
내가 바다를 찾는 것은 아버지가 몹시 그리워지거나 바다에 가면 혹시 아버지를 만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 때이다. 바다에서는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많아지지만, 지상의 언어는 썰물처럼 공허한 말이되어 저 혼자 떠돈다. 아무에게도 아무런 말을 할 수 없을 때 바다는 더 무서웠다. 바다 비린내를 맡으면 바람이 불어오는 등대에 한참 동안 서 있다 보면, 아직도 머릿속에 선연히 남아 있는 아버지와의 아픈 결별의 기억이 파문으로 일렁인다.
아버지는 언제나 지독하게 엄격한 분이어서 그 앞에만 서면 무서운 바닷소리가 들렸다. 자신의 말이 곧 진리라고 생각하고 그를 따르지 않는 가족에게는 가차 없는 전제적 태도를 보였다. 아버지 앞에서 우리는 항상 숨을 죽이고 서로 눈치를 살피곤 했다. 세상의 모든 아버지는 성장하는 아들이 자신의 권력과 여자를 빼앗아갈지 모른다는 열패감에 젖어 있다지만, 아버지는 유독 장남인 나에게 엄격한 가부장적 권위와 질서를 강조했다.
바다와는 쉽게 대화할 수 없었다. 바다는 나를 저물어가는 해변에서 하릴없이 서성이는 저녁노을 같은 사람이 되게 만들었다. 모든 것 위에 군림하는 바다는 나의 언어와 존재를 송두리째 앗아가려 했다. 바다는 자신의 위대함을 보여주겠다는 듯 끊임없이 출렁이면서 현존을 과시한다. 넓은 품을 자랑하며 안겨 오라고 손짓했지만 좀처럼 다가갈 수 없었다. 오히려 그 엄격함과 철저함에 치를 떨었다. 차라리 멀리서 낙조와 함께 부유하는 섬이 되고 싶었다.
우리에게 정녕 바다는 무엇인가. 바다는 아득한 시원始原이자 지칠 줄 모르는 역동이고 마르지 않는 충만이다. 바다는 거부 없는 포용이며 경계 없는 통합이다. 바다는 가장 오래된 시원이지만 언제나 새롭다. 인간은 바다를 정복해 왔다고 말하지만, 바다는 결코 인간에게 정복된 적이 없다. 인간은 바다를 아는 척하지만, 바다는 여전히 알 수 없는 세계이다. 바다는 거역할 수 없고 피할 수 없는 우주의 근원이다. 인간은 오랜 역사에 걸쳐 바다에 순응해 왔다. 아버지는 근원의 세계이어서 나는 그것을 거부할 수도 회피할 수도 없었다. 나는 항상 건널 수 없는 바다 앞에 주저앉아 우는 꿈을 꾸었다.
어머니의 바다는 달랐다. 온화한 어머니는 잔잔하고 풍요로운 바다의 다른 모습이었다. 어머니가 없었다면 집안은 일찌감치 망가지고 말았을 것이다. 바다의 장중함과 위용은 자신을 위대하게 만들지만, 바다의 포용성을 따르지 못한다. 바다가 진짜로 위대할 수 있는 것은 저 도저한 인내와 기다림 때문이다. 바다는 결코 잠드는 법이 없다. 낮이나 밤이나 몇십 년이고 몇백 년이고 멈추거나 중단됨이 없다. 아득한 세월의 아픔과 슬픔을 다 쓸어안고 기다려주는 저 바다의 깊은 속을 나는 헤아리지 못한다.
빛과 어둠의 조화가 세상을 이끄는 힘이듯이, 아버지와 어머니의 조화는 우리 가정을 이끄는 힘이었다. 깜깜한 밤바다 위에서도 그들은 흩어졌다 다시 이어지며 명멸하고 있었다. 어느 시간과 공간에서든 빛과 어둠이 조화롭게 공존하는 것이 곧 사랑이며 삶의 완성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오랜 시간이 지난 후였다.
파도가 밀려오고 밀려간다. 바다에서는 파도가 생겨나고, 파도가 모이고 이어져 바다가 된다. 바다는 파도를 만들고 파도는 바다를 만든다. 파도에 밀리고 밀리며 돌아서 우는 바다, 아무리 외면하고 등을 돌려도 바다는 또 나타났다. 바다가 저 혼자서 가슴을 깎아내리며 울듯이, 언젠가 아버지도 할머니의 제사상 앞에서 목 놓아 울었다. 아버지의 울음소리는 곡비梏婢의 호곡 소리처럼 처절했다. 나는 그때나 지금이나 그 울음의 의미를 알지 못한다.
언젠가 아버지는 뜬금없이 온 가족이 모여 등대가 있는 바다 여행을 가자고 제안했다. 어머니가 아버지를 가까이서 지키고 있을 뿐, 이제 가족들은 모두 뿔뿔이 흩어져 있다. 품 안의 자식이라고 성년이 다 된 자식들은 모두 직장에 다니거나 외국에서 공부한다며 저마다 바쁜 생활을 하고 있었다. 흩어진 가족, 이제 가족의 의미도 부서지는 파도의 포말 같은 것이 되어버렸다.
아마도 아버지는 마지막으로 가족이 모여 그동안의 불화와 갈등을 풀어보려고 했는지 모르겠지만, 바다 여행의 계획은 끝내 실현되지 못했다. 삶에서 결정적 계획은 언제나 실패와 좌절로 끝나는 것인지 모른다. 넓은 바다는 어둠이 찾아오면 형체도 없이 사라졌다가 다시 아침이 되면 항구 어디에선가 이별을 서러워하는 요란한 무적霧笛 소리와 함께 되돌아왔다.
임종을 앞두고 병상에서 아버지가 마지막 힘든 호흡을 몰아쉰다.
“아버지 빨리 일어나세요. 바다 여행을 가셔야지요.”
나의 말귀를 다 알아들으시는 듯 아버지는 내 손을 잡으며 간신히 이야기했다.
“아무래도 너희들과 바다 여행을 가기 힘들것다.”
아버지의 손은 겨울 바다같이 싸늘하게 식어갔다. 우리의 사랑하는 방식과 이별하는 방식은 언제나 서툴렀다. 그저 서로 다른 시선으로 등대같이 먼바다만 바라볼 뿐이었다. 아버지가 고개를 떨어뜨리며 마침내 이 세상과 작별할 때, 팽팽하게 당겨져 있던 줄의 한쪽 끝이 뚝 끊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 순간, 아버지를 향해 들끓던 미움과 갈등의 감정들도 일시에 무화되었다. 바다는 그렇게 속절없이 잠잠해지고 말았다.
숨결의 마지막 온기마저 사라졌을 때, 나는 갑자기 언젠가 태풍이 지난 후에 바라보았던 허무의 바다를 생각했다. 아버지의 육탈한 영혼은 돌볼 겨를도 없이 쓸쓸하게 남은 바다와 같이 고요했다. 떠나가는 배 앞에는 가긍한 애도만이 남았다. 진실로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질 때는 다시는 만나지 말자고 말한다고 한다. 나는 독하게 눈감고 아버지에게 말했다. 저승에서는 좋은 자식 만나서 잘 사시라고, 다시는 만나지 말자고, 나는 아버지의 식어가는 손을 잡고 피 같은 눈물을 쏟았다. 그러고는 아버지가 즐겨 부르시던 <사의 찬미>도 <바다(La Mer)>도 영영 들을 수 없게 되었다.
오늘도 등대는 바다를 향해 지겹도록 앞만 바라보고 서 있다. 등대는 저 멀리 바다 건너 보이지 않는 세상과 사람들을 바라보고 싶어 한다. 등대 아래에서 밀려왔다 밀려가는 파도의 철썩임이 아버지에 대한 때늦은 회한을 일깨우고 있다. 나는 왜 그렇게 아버지의 바다를 받아들이지 못했던가. 세상에서 나를 가장 믿어준 사람도, 나를 끝까지 기다려 준 사람도 아버지였다. 아버지는 나의 파도였고 등대였고 포구였다. 나는 오늘도 아버지의 바다를 지켜본다.
이 청명한 날, 멀리 수평선 끝에 계실 아버지도 넘실대는 파도와 등대를 볼 수 있을까. 사랑은 가고 그리움만 남은 빈 바다에 햇살을 받은 윤슬이 부드럽게 일렁이고 있었다.
■ 허 상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