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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매가 온 아버지는 요양원에 들어가셨다. 당신께서 치매란 사실을 전혀 모르시는 아버지께서는 요양원에서 청일점으로 호강을 단단히 하신다고 들었다.
나는 매주 아버지와 전화 통화를 나누면서 아버지의 근황을 듣고 있다. 늘 아버지의 목소리는 밝고 경쾌하시다. 치매란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나와 대화를 나누실 때 아주 정상적이며 양호하시다.
손자들의 근황에 대해서 항상 물어 보시고, 내가 알려 준 소식은 전혀 잊어버리시지 않으신다. 그런데 치매라고 하신다. 동생 말로는 아버지와 한 시간 정도 함께 지내다 보면 아버지가 치매라는 걸 알 수 있다고 한다. 50도 안 된 나이에 과부가 된 홀어머니와 6명의 동생들, 그리고 6남매 자식들의 가장 노릇을 하면서 살아오셨으니, 정신력이 남다른 분이시다. 그래서인지 치매인데도 불구하고 증손자들의 근황까지도 일일이 다 기억하고 계신다. 중증 치매라던데......
치매의 종류가 다양한가 보다. 아무튼 아버지는 예쁜 치매에 걸리신 거 같다. 많은 것을 잊어버리고 아버지만의 세상에서 살고 계시지만, 평소 몸에 밴 주위 사람들에 대한 배려와 긍정적인 사고는 사라지지 않았다. 그 덕분에 요양원 생활이 아버지껜 천국과도 같다.
전화를 받을 때마다 전화해줘서 고맙다는 말을 잊지 않으시고, 전화통화가 끝나면 전화를 연결시켜준 직원에게 “감사합니다.”라고 말하신다. 보이지 않지만, 정중하게 인사를 하면서 말씀하시는 모습이 훤히 보인다.
늘 행복의 날개를 달고 날아다니시는 아버지를 상상할 때마다 아버지께 감사가 절로 나오면서도 너무 오래 사시지 않게 되기를 바란다. 93세이신 아버지. 이렇게 좋으실 때 편안하게 가시면 좋겠다.
아버지가 나에게 아주 커다란 유산을 남겨 주셨다. 바로 행복의 날개를 달아주신 거다. 아버지가 달고 계신 독수리 날개와도 같은 거대한 날개는 아닐지라도 나에게 적당한 예쁜 날개를 달아주셨다.
나는 그 날개의 덕을 톡톡히 보면서 살아가고 있다. 아버지처럼 나도 날개를 달고 날아다니니 그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오십견으로 굳어 있었던 팔은 카이로와 한의사 덕분에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게 되었고, 양쪽 어깨에 날개까지 달았으니, 남은여생을 마음껏 즐기기만 하면 될 것 같다.
둘째 산바라지 하는 것을 포기할 뻔 했었는데, 할 수 있을 것만 같다. 무리 없이 내 몸이 움직일 수 있을 정도로만 해주면 될 거 같다. 이 일 또한 즐거운 놀이가 아니겠는가? 어려서 소꿉놀이를 했었던 것처럼 서로 오순도순 해나가면 되지 않을까?
한동안 손에서 놓았었던 일들도 다시 시작하려 준비하고 있다. 내 안에 누워있었던 열정이 다시금 일어나고 있다. 움직이기 귀찮았었던 몸이 스스로 움직이려 준비운동을 하고 있다. 이 모두가 나 혼자 해낸 일은 아니다.
내 틀어진 몸과 마음을 바로 세울 수 있도록 나를 도와주고 인정해준 사람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재즈 음악과 더불어 사찰에서 피우는 향내가 실내에 은은하게 퍼졌다. 동양과 서양의 문화가 만난 힐링의 공간에서 나는 마음껏 창작의 즐거움을 맛보았다.
젊어서 설치 미술가의 작업실에 방문을 했었던 기억이 난다. 그때 그녀의 나이는 지금의 내 나이였다. 촛불과 향과 음악이 있는 작업실에서 커피를 마시면서 작업하는 그녀를 보면서 나 또한 그녀처럼 늙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그 생각이 현실이 될 줄이야.
늦복이 터졌다. 자유롭게 하고 싶은 것을 하면서 즐기는 생활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나를 아티스트라고 불러주는 사람들. 그저 작은 내 꽃꽂이 사진 하나만 보고 ‘어메이징 아티스트’라고 말하면서 나와의 조우를 기대하고 계시는 분. 자신의 집에서 직접 꽃을 따다가 선물한 멋진 아티스트.
갑자기 나는 아티스트의 반열에 오르게 되었고, 그들과 함께 교류하면서 콜라보 작업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내 생애 중 가장 행복한 지금 이 순간이야말로 말도 안 되는 일로 여겨진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일이니 말이다.
동양의 침봉 꽃꽂이를 뉴질랜드에 전수하고 싶었지만, 나에게 있어서 그 꿈은 그저 꿈일 뿐이었다. 15년 전에 내 수강생들과 꽃꽂이 전시회를 시립도서관에서 열었지만, 그것은 단지 한국 꽃꽂이를 선보였던 것으로 그쳤다.
그 전시회는 성황리에 끝을 맺었고 매년마다 그곳에서 전시회를 열 수 있게 해주겠다고 했지만, 더 이상 엮어갈 기력이 내게는 없었다.
15년이 지난 지금 나는 키위들을 상대로 꽃꽂이를 시작하려 한다. 든든한 조력자들이 있어서 물심양면으로 전혀 부담감이 없다. 앞으로 나는 매 순간을 즐기기만 하면 된다. 뉴질랜드에서의 삶 20년 전체가 이 날을 위한 엑기스 역할을 한 것으로 여겨진다.
낯 뜨거웠던 일들과 헛발질과 실수를 반복하면서도 꾸역꾸역 버티며 살았는데, 그 모든 것들이 누에고치 속의 엑기스처럼 내 성장에 꼭 필요한 일들이었다. 그 어떤 순간도 나에게 최상의 순간이었음을 다시금 확인하게 된다.
나는 항상 날고 싶었다.
작가이자 조각가이며 운동가인 트리나 폴러스의 ‘꽃들에게 희망을’을 읽으면서 애벌레 산을 오르는 삶은 살지 말자고 생각했었다. 소녀시절의 그 생각이 이제껏 내 무의식 전체를 지배해왔었던 거 같다.
어느 듯 나는 고치를 뚫고 나왔다. 부드러운 바람의 숨결이 내 젖은 날개를 말려주고 있다.
감회가 새롭다. 그래서 말도 글도 나오지가 않는다. 그저 지금 이 순간의 행복에 온 몸이 떨려올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