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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겨울, 어둠이 내리기 시작한 이른 밤이었다. 어린 계집애는 따뜻한 요밑에 언발을 묻고 책가방을 끌어 당겼다. 숙제를 하려던 참이었는데 얼었던 몸이 녹는가싶더니 스르르 눈이 감겼다. 손에 쥐었던 연필을 떨군채 잠시 꿈나라를 헤매고 있었다.
갑자기 무슨 소리인가 귓청을 때리는 바람에 소스라쳐 잠에서 깨어났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또다닥 또다닥.... 또다닥 또다닥...”
바로 문 밖 대청 마루에서 들려오고 있었기에 발딱 일어나 방 문을 열었다. 언제나 그렇듯이 엄마와 언니가 마주 앉아서 신나게 다듬이질을 하고 있었다. 돌아앉은 언니의 곱게 땋아내린 긴 머리끝 댕기가 가볍게 리듬을 타고 팔랑거렸다. 그건 일이 아니고 재미나게 노는 놀이처럼 흥겹게 보였고 엄마와 짝을 잘 맞춰 하는 언니가 그리 부러울 수가 없었다.
방망이 네개가 질서정연하게 박자를 맞추니 또다닥 또다닥 소리도 경쾌해서 즐거웠다.
저만치 물러앉지 않으면 방망이에 얻어맞는다고 야단을 맞으면서도 가까이에서 얼씬댔다. 해보고 싶은 호기심 때문이었다. 배워서 엄마 언니에게 당당히 자랑하고 싶었다.
혼자서 집을 보던 어느 날이었다. 다듬잇돌 위에 얌전히 덮여있는 무명 보자기를 젖혔다. 가즈런히 접혀있는 빨래위에 방망이질을 했다. 뭔가 되는 것 같아 신이나서 팔이 아플때까지 두들겼다. 아니 힘껏 두들겨 팼다는게 더 맞는 말 일 것이다.
나도 할 수 있다는 성취감 때문이었을까? 힘은 드는데 왠지 기분이 좋아지는 걸 느꼈다.
감쪽같이 덮어놓고 시침이를 떼었다.
저녁 설거질을 마친 엄마와 언니가 다듬이질을 하려고 옷 을 다시 손질하다가 깜짝 놀라서 소리를 치셨다.
옷감이 터져버렸으니 이게 어쩐 일이냐며 난감해서 언니에게 물었다.
언니는 고개를 좌우로 살짝 흔들면서 입가에 야릇한 미소를 띄었다. 엄마가 은연중 눈치를 챘다.
밖으로 끌려나온 계집애는 얼마나 혼이날까? 겁에 질려있었다.
엄마의 나들이 모시치마가 칼로 벤것처럼 갈라져 있었다.(세상에 이럴수가...) 못쓰게 버려놓은 것이었다.
어쩐담. 크게 야단을 맞을줄 알았는데 엄마가 기가 막히다는 듯 츳츳 혀를 차며 차분히 웃기만 했다.
이담에 지겹도록 할 일인데 그렇게 하고 싶었어? 혼자소리로 말하며 다시 부드러워진 눈길로 어린 딸을 용서했다.
아무렇게나 하는게 아니라는 걸 알았다. 불룩한 방망이 배를 잘 활용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린 마음이었지만 엄마 나드리 옷을 못쓰게 버린게 너무나 미안했다. 커서 돈벌면 엄마 옷부터 해 드려야지, 그런 생각을 했었다.
50년대 후반, 남자들도 쉽게 입을 수 없었던 제일모직 라벨이 찍힌 순모(純毛)로 어머니에게 두루마기를 해 드렸다. 기쁨에 들떠서 옷자랑 딸자랑을 했지만 아마도 십여년전 어린딸의 마음속 과제였음을 짐작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달빛고운 초 겨울밤, 어디선가 또다닥 또다닥 바람을 타고 들려오는 다듬이질 소리, 댓돌밑에 귀뚜라미 소리와 어우러져 청아한 메아리로 언제나 마음을 흔들었다.
어느때는 슬프게 또 어느때는 경쾌하게... 답을 알 수 없는 마력의 음율이었다.
시집살이 고되었던 옛 여인들은 가슴속 응어리를 다듬이질로 풀었을 것만 같다. 사나운 시어머니, 미운 시누이 옷들은 더 모질게 때리면서 서러움을 달래지 않았을까?. 일상적인 일을 하면서 동시에 스트레스를 해결할 수 있었으니 그나마 다행이었다.
낮 일은 바쁘기 때문에 다듬이질은 주로 밤에 많이했다.
검푸른 달빛속에 마주앉은 두 여인의 다듬이질 모습과 청아한 소리는 한폭의 아름다운 그림이며 예술이었다.
누가봐도 멋드러진 서정시가 한편 써 질것만 같은 한국적인 정서였다.
명주나 비단같은 고급 옷감은 홍두깨에 감아올려서 돌려가며 다듬었다. 더욱 곱게 살을 입히는 예사롭지 않은 지혜였다. 단단한 박달나무 홍두깨 소리는 더 가볍고 경쾌해서 가슴이 뻥 뚫리는 시원함까지 느끼게 했다.
우리 여인들의 애환의 숨결이 담겨 대대로 이어져온 아릿함, 그러나 음악처럼 아름다운 음율은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추억이었다.
종전 후, 귀환치 못한 피난지에서의 일이었다. 우리의 생계는 어머니의 바느질로 시작되었다.
염색솥에서 바로 건져 검은 물이 줄줄 흐르는 마대를 한짐씩 지고와서 마루에 풀어놓는 사람이 있었다. 더운김이 남아있는 그것을 빨랫줄에 널어 대충 말려서 축축할 때 손질을 해야했다.
꺼칠하고 투박한 마대가 다듬이돌 위에서 흠씬 두들겨 맞고나면 제법 천 구실을 했다. 그 다듬이질 몫이 언니와 나 였다. 지어입을 옷감도, 사서 입을 옷도, 있을리 없는 시절이었다.
어머니는 그 천으로 마름개질을 해서 손틀로 몸빼바지를 수도없이 박아냈다. 수공업 몸빼바지 공장구실을 한거였다.
집 안은 온통 검은 물이 들었고 여자들 손이 몽땅 까매져서 밥하기가 민망했다. 그러나 깡수수밥 먹기도 어려운 때에 식구들이 배불리 먹고 살 수 있었으니 참으로 다행이었다.
어렸을 적 고운 정서로 들었던 다듬이질의 청아한 음악은 거친 세파에 휘둘려 잊혀졌다. 그리도 하고 싶었던 일이 오직 팔 아프고 지치는 고달픈 작업일 뿐이었다.
등이 젖도록 물건을 져날랐던 뫼산이 아저씨는 돈을 알뜰히 모아서 부자가 되었다고 들었다. 이북 평양에서 피난 내려온 홀아비가 큰 집을 사서 괜찮은 여인과 폼나게 결혼도 했으니 얼마나 대단한 성공인가.
세태가 바뀌고 변해서 이제 다듬이질은 한낱 옛 일이 되어 버렸다. 지금 우리들 세대가 그걸 경험한 마지막이 될 것이다.
하지만 그 아름다운 리듬과 청아한 소리는 영원히 우리곁에서 사라질리가 없다.
그럼 그렇지, 예술로 승화해서 공연까지 하는 단체가 여러지역에 있는 것을 알게되니 너무나 반가웠다.
여인들 수십명이 어우러져 다듬이질을 하는데 노동의 흔적이라곤 없었다. 정말로 예술적인 감각이 물씬 묻어나는 멋진 공연이었다. 우리만의 독특한 타악기로서의 손색없는 음율이 참으로 자랑할만 했다. 가슴이 뭉클하다.
다알리아 꽃이 고개숙이고 달빛 곱게 창틈으로 빗겨드는 초저녁, 어디선가 청아한 다듬이질 소리가 들려올 것만 같아 귀를 기우려본다.
그러나 내 지난 시절을 몰고온 회오리 바람일 뿐, 그것은 한자락 추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