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칼럼 | 지난칼럼 |
유별나게 날씨가 좋았던 새해 첫날, 파티에 초대 받아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큰애가 뉴질랜드에 와서 처음 사귄 20년 지기 친구의 부모님 집에서의 파티였다. 손님들이 한두 접시씩 가져 온 음식들과 주인장이 마련한 음식들로 커다란 테이블이 꽉 차서, 디저트는 나중에 따로 올려놓을 정도로 푸짐한 뷔페식의 파티였다.
양식 일본식 한식 아시안식의 특색 있는 요리들 앞에서 ‘적당히’란 생각은 저 멀리 달아나버렸다. 나중에 올려 진 디저트들까지 왜 그렇게 맛있던지, 과식을 할 수밖에 없었다. 뱃속의 미생물들이 전쟁을 하건 말건 일단 먹고 보자는 심보였다.
다행히 내 뱃속은 활명수 한 병으로 진정이 되었고, 내일을 기다리는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1월 2일인 내일은 아주 특별한 날이기에 여간 기대되지 않았다. 오클랜드에 살고 있는 둘째와 사위 그리고 뱃속의 아기까지 함께 오는 날이었다.
둘째가 한창 입덧이 심할 때, 그저 전화로만 위안을 해줄 수밖에 없었고, 파미에 오면 먹고 싶은 거 만들어주겠다는 약속을 하면서 입덧이 빨리 가라앉기만을 바랐었다.
드디어 기다렸던 시간은 다가왔고, 반가운 해후와 더불어 비행기 여행으로 핼쑥해진 둘째에게 체리부터 내놓았다. 입덧이 끝날 무렵이어서 오느라 많은 고생은 하지 않았던 거 같다. 다행이었다.
내 나이면 벌써 할머니가 되고도 남을 나이이지만, 막상 진짜 할머니가 되고 보니, 기쁨과 더불어 여러 감정이 교차했다. 신기하게도 내가 태몽을 꾸었다. 태몽이 분명했다. 큰애를 가졌을 때 꾼 태몽이 생각나면서 손주의 태몽에 감회가 새로웠다.
인간이 영적인 존재임이 틀림없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태몽이란 것이 있겠는가?
새로운 영혼이 둘째 부부를 선택하여 자리를 잡고나서, 내 꿈을 통해 인사를 나눈 것이 마냥 신기하면서도 고마웠다. 태명을 짓지 않았단다. 그래서 나 혼자 ‘영혼’이라 이름 지었다.
초음파로 본 영혼이의 모습이 여간 귀여운 것이 아니다.
겨우 6cm 정도 밖에 안 된 아기가 골격이 다 형성이 되었고, 손가락 발가락까지 있었다. 쫙 편 다섯 손가락은 ‘Hi~” 라며 인사를 하는 듯 했다. 이렇듯 존재가 확실한 영혼의 사진은 내게 경이로움과 더불어 반성의 시간을 갖게 해주었다.
둘째를 낳고 나서 원하지 않았던 임신을 하여 낙태 수술을 한 경험이 있는데, 내가 큰 죄를 지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죄를 짓지 않고 살다가 죽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만. 이래저래 인간은 죄인이며 불쌍한 존재란 생각이 들었다. 알면서도 죄를 짓고 몰라서도 죄를 짓고.
인간이 지구에서 태어난 생명들 중에 가장 죄를 많이 짓는 종일 수도 있겠다. 다른 생명들과 달리 선택을 통해 자신의 길을 개척해 나가는 인간이야말로 자신과 남에게는 물론이거니와 지구에 있는 많은 존재들에게 얼마나 많은 죄를 지으면서 살아가고 있는가?
자신들끼리의 전쟁은 고사하고 환경오염을 일으키며 지구온난화까지 빨리 오게 하면서 지구를 병들게 하는 죄인인 것이다. 그 죄의 값을 치르듯 코비드 19로 온 인류가 곤혹을 치루고 있다.
2020년은 모든 인류의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은 고통스러운 한 해였다. 진정한 자유와 선택이 무엇인지 숙고할 시간을 주었으며 아직도 그 숙고의 시간은 지속 되고 있다. 뉴질랜드처럼 고립된 섬나라는 피해가 덜했지만, 세계가 하나인 현대인으로서 힘든 마음은 매한가지였다.
영혼이의 이모부인 큰사위는 자신의 휴가를 영혼이를 위해 소비했다. 거실의 가구들을 옮기고, 잔디를 말끔히 깎아 놓고, 둘째가 먹고 싶다고 한 오코노미야키와 육개장을 만들 식재료들을 사고, 두 음식을 아주 맛깔스럽게 만들었다.
이모인 큰애야말로 동생 가족을 위해 보이지 않게 이것저것 준비하느라 분주히 돌아다녔고, 나 역시 뱃속의 영혼이가 어떻게든 많이 잘 먹어주길 바라면서 있는 솜씨 없는 솜씨 다 부려가면서 반찬을 만들었다.
영혼이 입맛이 지 어미와 달라서 평소 잘 먹던 음식들은 멀리하고 완전 한식 요리만 먹었다. 취나물 도라지 고구마줄기....... 같은 나물을 선호하고 얼큰한 육개장과 된장찌개 등....... 완전 토종 한국인 입맛이었다.
다행히 만들어 주는 것들마다 아주 맛있게 잘 먹어 주어서 얼마나 기분이 좋았는지 모른다. 심한 입덧의 고행이 끝나고 먹고 싶은 것을 제대로 먹을 수 있는 시간이 온 것 같다.
입덧을 하는 아내 옆에서 고달팠었던 사위는 며칠이나마 처갓집에서 잘 먹고 편안히 쉬었다면서 굳이 저녁 한 끼라도 대접을 해야 한다고 했다. 그 덕분에 온 가족이 모여 중국식 레스토랑에 가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나는 아이들이 집으로 돌아가서 한 동안 먹을 밑반찬 만드는 일까지 하느라 부지런을 떨었다. 너무 무리하지 말라고 딸들이 성화를 부렸지만, 내가 만든 음식을 오물오물 잘 먹고 있는 모습이 보기 좋아서 힘든 줄도 몰랐다.
5일이란 시간이 훌쩍 지나갔고, 공항에서 그들을 떠나 보내놓고 나니 그때부터 삭신이 쑤시기 시작했다. 몸살기운이다. 그래도 할머니가 될 준비를 제법 잘한 거 같아서 마음이 흡족하다.
머리에 서리가 앉더니 어느덧 흰 눈이 소복하다. 그래도 아직까지 완전 백발은 아니고 회색빛이 돈다. 여기서는 이런 머리를 그레이 헤어라고 말하는 것 같다.
염색하기를 멈추고 그레이 헤어로 다니니 편하기 그지없다. 다행히 그레이 헤어가 잘 어울린다고들 말하니 고맙기만 하다.
이제부터 나는 그레이 헤어 할머니다. 진짜 할머니가 된 것이다. 할머니가 되면 슬플 줄 알았는데 막상 되고 보니 너무 기뻐서 새로운 힘이 마구 솟아난다. 자식을 낳아서 기를 땐 자식의 나이가 되더니만, 손주가 생기니 손주의 나이가 되는 가 보다.
자궁 속에서 “Hi~” 하며 인사하는 영혼이와 같은 눈높이로 이 세상을 함께 살아갈 것을 생각하니, 여간 행복한 것이 아니다. 나 역시 초음파 사진을 보면서 영혼이에게 “Hi~”라며 인사를 보낸다.
따스하면서도 현명한 할머니가 될 것을 기약하면서 내 다섯 손가락을 활짝 펴고 반가운 인사를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