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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변함없지만 이 집에 처음 입주했을 당시 뒷편 큰 도로 주변은 어수선했다. 주유소부터 목공소, 침대공장, 무슨무슨 모터스며 공구상, 자동차 판매점까지 무질서한 분위기여서 심난했다. 차도 많이 다니니 자동차 소음 걱정까지. . . ..
쉽게 정들지 못할 곳이란 생각이 들었었는데 살아보니 기우였다. 어언 20 여년 세월을 잘 살아가고 있다.
집 앞으로 한발만 나서면 잡초 어우러진 시원한 들판이 가슴을 활짝 열어주었다.
골목길 양쪽 차도를 끼고 길다랗게 빈 공간이 그지없이 편한 쉼터였다. 현실이란 버거운 일상에서 잠시나마 규제가 풀린 것 같은 자유로움이 그 곳에 있었다.
지천으로 깔린 토끼풀 꽃이며 키작은 들꽃들이 여린 바람을 타고 살랑거렸다. 누구라도 반갑게 맞아주는 자연의 너그러움이 늘 좋았다. 거기에 가면 아득히 멀어져간 내 어린시절이 어제일처럼 떠오르고. 맑은 동심으로 돌아가 함께 어울리는게 참 즐거웠다.
토끼풀 꽃 화관 만들어 머리에 두르고 손가락에 반지까지. 노오란 민들레꽃 융단길을 헤치며 새색씨 놀음하던 어린시절.
천진스럽게 뛰놀던 놀이터 한강둑이 바로 거기처럼 느껴졌다.
“낮에 나온 반달은 하얀 반달은 햇님이 쓰다버린 쪽박인가요 . . . .” 어느새 입에선 노래까지.
어제 아침 식사는 뭘로 했는지? 사물사물 멀어져만 가는데 옛날 가사가 또박또박 나오는게 신기하기도 했다. 요즘 것은 잊고 옛날 것은 생각나는게 세상 많이 살았다는 증거라는데 놀라울 일도 아니지. 무관심한척 행운의 네잎 클로버를 찾겠다고 처진 눈꺼풀로 풀숲을 더듬었다. 불청객 훼방꾼이 나타날 때까지 . . ..
놀라서 엉덩방아를 찧고 둘러보면 눈을 반짝이는 고양이와 눈이 마주쳤다. 주인없는 길고양이가 그도 심심해서인지 내 주위를 어슬렁거리다가 친구하자고 협상이라도 하자는 꼴인지? 반쯤 꽁무니를 빼고 경계의 태세를 한 모습에 웃음이 나왔다.
어느새 아무에게도 털어놓지 못했던 가슴속 응어리가 시원하게 풀렸다. (다시 또 올께) 자리를 털고 일어서려면 한자락 바람이 더 쉬어가라고 옷자락을 흔들었다. 작은 꽃들은 꽃잎 떨궈 발끝에 놓아주며 또 오라고 아양 인사도 어김이 없었다.
그러나 영원한 것은 없다. 어느날 인가. 포크레인의 모진 삽날에 여린 생명들은 일시에 사라져 버렸다. 집을 지으려는 모양이었다. 고층집이 아니기만을 소원처럼 빌었다.
여덟채의 예쁜 양옥이 제각각 향을 달리하며 깔끔한 새 동네가 만들어졌다.
내 놀이터는 사라졌지만 빨강과 회색의 지붕 너머로 파아란 하늘만은 아직도 열려 있어 다행이었다. 그 드넓은 스크린에 그림이 떠오르듯 묘기를 부리는 구름놀이를 계속 볼 수 있고 저녁무렵엔 가끔씩 하얀 손톱같은 낮달이 반겨주기도 했다.
내가 스스로 찾아내는 소박한 행복이었다.
언제 그랬을까? 대여섯집 건너 집이 화재를 당해 새까맣게 타버리고 없어졌다. 흔적으로 남은건 밑둥뿐, 너무 놀랐다.
그 집 넓은 뜰 한켠에는 고목으로 자란 피조아 나무 한그루가 싱싱하고 푸르렀다. 펜스 밖으로 뻗은 나무 가지에 무수히 달린 피조아가 탐스러워 눈길을 끌곤 했었다. 형체도 없이 사라져버린 집터엔 몇년째 잡초만 무성해갔다.
요즘 그 자리를 포함해 마당 넓은 옆집이 헐리고 아파트 공사가 한참이다.
이 옛날 동네도 드디어 개발이 시작되는구나. 어떤 모습으로 변모가될지 궁금하기도 하고 불안도 했다. 많은 인구가 갑자기 입주가 되면 조용하던 동네가 시끄럽게 변화되는게 불편했다.
이 나라에 처음 왔을때 나는 ‘티티랑이’에 살았다.
산을 병풍처럼 뒤로 하고 있는 마을은 시골 동네처럼 안온했다. 이웃 사람들도 따뜻한 인심으로 맞아주어 정착하는데 많이 위로가 되었다. 그럼에도 해질무렵 땅거미가 내려앉으면 어김없이 타향에 버려진 아이처럼 그리움에 허덕였다.
아이들 눈길을 피해 혼자 골목길을 서성이며 눈물을 찍어내기도 했다. 그럴때 어디선가 코끝에 묻어오는 알수없는 향기? 같은게 마음을 달래주었다. 정감을 불러오는 그 냄새는 나무타는 냄새였다. 집집마다 검은 굴뚝에서 뭉게구름처럼 연기가 솟아 올랐다. 바로 부드러운 명주 실타래처럼 풀어져서 검푸른 사방으로 소멸해 버리는 연기.
그 연기속으로 까마득히 지나간 옛날 일이 떠올랐다. 그 순간의 기분이 아마 그 때의 기분과 너무도 일치되는 공감 때문이리라.
모두가 살기 어려운 시대였다. 그렇더라도 진학해서 공부하는 애들도 더러 있었다. 나도 공부하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꿈을 접고 대신 직장을 얻었다. 진학보다 더 어려운게 취직이어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서울이 아닌게 아쉬웠지만 반발심같은 오기가 생겨 기꺼이 D시로 내려가 기숙사 생활을 했다.
“게 발 물어던진듯 천리 타향이 웬 말이냐?”
어린딸 시집도 가기전에 혼자 타향살이가 웬 말이냐며 눈물로 적어 보내던 엄마의 편지 구절이었다. 학교 문전에도 못 가 보았다는 엄마가 들어 본적도 없는 그런 말을 어찌 써 보냈는지,평생 잊혀지지가 않는다.
퇴근후 구내식당에서 저녁을 먹고 기숙사 긴 복도를 들어설 때면 금빛 노을빛이 등뒤에 바짝 따라오곤 했다. 기다란 그림자를 발끝에 앞세우면 왜 그리도 외롭고 서럽던지. . . 주말마다 갈 곳 없어 혼자 저녁 특식을 먹고 노을지는 서녁을 바라보면 식구들 얼굴이 차례로 떠올라 견딜 수가 없었다. 화려한 20대 청춘이 그리움에 시들어 가며 살아야 했다.
가끔씩 번개처럼 나타나주는 오빠가 있어 그나마 위로가 되었다. 비행기 타고 잠깐 내려 왔다며 뽑내듯 자랑하는 오빠는 공군에 복무중이었는데 정말 생각지도 못했던 기쁨이었다. 그런 오빠가 너무 반가워 용돈 얼마 쥐어주는게 큰 즐거움이었다.
“나중에 다 갚아줄께 ...”
신이나서 돌아서는 오빠의 등뒤를 바라보며 하염없이 숨어 울던 동생이었다. 오빠는 그런 동생의 외로움을 알기나 했을까?
지금은 D시보다 수만배 더 먼 곳에 떨어져 와 있지 않은가. 연기 흩어지는 먼 하늘에 별들이 하나둘 솟아나면 내 그리움도 저만치 사라져가곤 했다.
요즘은 낡은집 빈 굴뚝에 둥그런 안테나가 점잖게 기대고 있다. 시대는 빠르게 바껴가기를 서두르니 머지않아 다 없어질 것이 분명하다.
한층 또 한층 계속해서 올라가는 공사 현장을 보면 꼭끼는 옷을 입은 것처럼 가슴이 답답해진다.
그 곁에 학교 뒷문을 거쳐서 앞문으로 빠지면 공사장을 뒤로 질러가는 길이 된다. 그 곳을 지날때마다 공사장과 학교 사이로 잘 지은 단독주택 하나가 마음에 걸린다.
(저 집 사람들은 얼마나 속이 상할까?) 큰 건물사이에 갇혀버린 꼴이 되었으니 내 답답함은 아무것도 아니다. 오지랖 넓은 걱정이지만 남의 일이 아니었다.
이제 그만 끝이겠지 하고 보면 다시 한층이 올라간다. 어느새 7층 높이까지 올라가서 깃발을 날린다. 얼마나 더 높이 올라갈건지 알 수가 없다. 수 백 세대가 입주할 대형 아파트이니 올려다보며 살라고 겁을 주는 것 같다.
또 그 옆으로 낡은집 네 채가 창문을 판자로 막고 있으니 머지않아 헐린다는 표시다. 옛날 집들은 건물 말고 터가 넓어 쓸만한 가치가 충분하다. 거기 또 얼마나 큰 아파트가 지어질지. 아마도 우리 동네가 아파트 대 단지로 변할 것이 눈에 보였다. 정부에서 짓는 서민 아파트 같아 평수가 크지 않을 것으로 짐작된다. 많은 세대로 복작거릴 생각을 하니 왠지 고향을 잃어가는 것 같아 안타깝다.
그렇다고 시대를 외면하고 살 수는 없는 일이다. 나만 생각하는 이기심은 더욱 안되지 않는가. 다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이 되어야지.
자주 보던 시티의 노숙자 가족들이 떠올랐다. 이불자락을 돌돌말고 건물앞에서 잠든척 눈감고 있는 사람들.
누구는 따뜻한 집에서 편안한 잠 자는데 . . . 그들도 하루빨리 안주할 곳을 찾아야지. 마음을 바꾸니 아무렇지 않다.
그래 여기도 저기도 자꾸만 지어라. 그리고 높이 높이 올려라. 너도나도 어울려 버글거리며 살자꾸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