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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속한 목요일.
부축하듯 입구를 들어서는 두 남자. 손님들이 성글게 차 있는 초저녁부터 문이 여닫힐 때마다 시선을 모으던 한씨아줌마가 달려 나가 맞이한다. 마침 지하의 화장실 계단에서 올라오던 경애가 힐끗 그 광경을 바라본다.
한 남자가 다른 남자를 부축하여 자리에 앉는 것을 돕고 있었고 한씨아줌마도 거들고 있다. 돕는 남자가 한씨아줌마의 남편이라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다. 다가가서 인사라도 할까 하다가 그냥 주방으로 들어가 유리문을 통해서 바라본다. 구부정한 허리를 부축 받으며 겨우 자리에 앉는 남자는 바들바들 떨고 있다. 얼굴이 제대로 보이진 않지만 얼핏 보아도 몸도 스스로 가누지 못하는 중환자 티가 난다.
주방으로 들어온 한씨아줌마가 음식 서빙을 준비하며 입을 연다.
“아마 마지막 외출이 될 거야. 한때는 한국에서 잘나가는 사업가였다는데… 사람의 운명을 누가 알겠어”
경애는 물컵과 냅킨 등을 담은 쟁반을 들고 홀로 나가는 한씨아줌마를 바라보며 중얼거린다.
‘그래, 사람의 운명을 누가 알겠어, 내가 주방장이 되리라는 것을 나도 몰랐잖아,’
한숨을 쉬며 김이 오르고 있는 갈비찜 용 채소를 썰기 시작한다. 도마 소리를 내며 양념거리를 다지다가 잠시 유리 칸막이 너머 홀로 시선을 보낸다.
힘겹게 자리에 앉은 후 천천히 모자를 벗어 옆에 놓으며 주위를 둘러보는 남자, 수염과 머리카락이 제대로 정돈되지 않은데다 퀭한 눈과 광대뼈가 거의 해골을 연상시키는 남자, 손까지 덜덜 떨며, 나이를 가늠할 수 없는 얼굴. 헉! 그 순간, 칼 도마질이 멎고, 눈에 현미경이라도 들이대 듯 시선을 모아 초점을 맞춘다. 두두두두..... 틀림없다. ‘배라먹을 놈’ ‘개새끼’ 바로 그 한성조였다.
목울대로 치밀어 오르는 뜨거움. 온몸을 조여 오는 전율. 탁, 소리가 나도록 두 손으로 조리대를 짚고 굳어진다.
“왜 그래? 진수엄마.”
빈 쟁반을 들고 들어오던 한씨아줌마가 놀란다. 경애는 목에 가시라도 걸린 듯 칼자루를 잡았던 손으로 목을 감싸 쥐고 고개를 뒤로 꺾는다. 한씨아줌마가 재빨리 물 한 컵을 들고 온다. 물을 들이켠 경애가 얼굴이 파랗게 질린 채로 숨을 진정하며 팔을 저어 한씨아줌마에게 어서 반찬을 내가라는 시늉을 한다.
한씨아줌마가 불안한 기색으로 몇 가지 반찬을 들고 나가고 경애는 꺾이는 무릎을 겨우 조리대를 짚고 버틴다. 땀이 솟는다. 물컵의 나머지 물을 벌컥벌컥 들이킨다. 아무리 살펴봐도 그 ‘개자식’이다. 아랫배에 힘을 주고 최대한으로 태연을 가장하며 김치 깍두기며 콩나물 무침, 시금치나물을 담는 손길이 가늘게 떨린다.
빈 쟁반으로 돌아온 한씨아줌마가 반찬 쟁반을 들고 다시 나간 뒤 눈을 감고 마음을 진정하느라 단전에 힘을 모은다.
교회모임에서 오이소박이를 맛있게 먹으며 이렇게 맛있는 오이소박이는 처음이라고 하던 ‘개새끼’의 얼굴이 떠오른다. 물론 사단이 나기 전의 일이다. ‘빌어먹을. 왜 이 순간에 그런 일까지 떠오르는 거야.’ 머리를 흔드는 경애의 눈에 배어나는 매운 눈물이 광기로 번득인다.
오이소박이를 큰 접시에 듬뿍 담는다. 갈비찜도 수북하게 담는다. 한씨아주머니가 김이 오르는 갈비찜과 오이소박이가 유난히 듬뿍 담긴 그릇과 경애의 옆얼굴을 잠깐씩 번갈아가며 시선을 멈추고 새겨보다가 묘하다는 듯, 어깨를 들썩하고 나서 마지막 쟁반을 들고 나간다.
경애는 화살촉 같은 눈빛으로 그러나 멀거니 정신 나간 사람처럼 홀을 응시한다. ‘개자식’은 한씨아줌마의 남편이 쥐어주는 젓가락으로 힘겹게 반찬을 집어먹기도 하고, 한씨아줌마가 가끔 수저 위에 올려주는 음식을 입으로 가져가기도 한다.
식사가 끝날 때까지 경애는 구름 위에 서서 흘러가는 바람을 맞고 있는 기분이다. 한씨아줌마가 미심쩍은 시선으로 가끔 주방 쪽을 바라보긴 했지만 그저 그뿐.
모든 것이 물거품이다. 몸속에 쌓인 분노도, 울분도, 퍼붓고 싶었던 증오도 모두 빠져나가버리고 둥둥 뜬 채, 공중분해 된 기분이다. 머릿속에 가득 미세먼지들이 들어찬 듯, 수습되지 않는 현기증이 인다.
식사를 마친 한성조가 한씨아줌마 남편의 부축을 받아 일어선다. 허탈한 시선으로 천천히 실내를 둘러본다. 마치 다시 한 번 오겠다는 듯. 마지막 세상을 망막에 새겨두려는 듯, 그 시선이 주방 쪽 유리를 스치는 순간 경애는 쿵 소리가 나도록 조리대에 이마를 부딪치며 엎드린다.
찬 기운이, 아니 뜨거운 기운이 경애의 온몸을 훑고 지나간다.
다음날, 11월도 다 가는 마지막 금요일이다. 경애는 태연을 가장하고 있지만 전날 밤의 충격을 벗어나지 못한 채다.
“그 양반, 응급실로 실려 갔는데, 오늘을 못 넘길 거래.”
한씨아줌마의 말이 귓등으로 흘러가면서 경애의 마음속에 허망한 여울이 만들어진다. 이미 건너와 버린 여울물 소리가 휑할 뿐이다.
주방의 시렁 위에 있는 앉은뱅이 시계가 10시를 가리키고 있다. 주인아저씨의 결산을 돕기 위해 경애는 마음 속 여울을 건너 뛰어 홀로 나간다. 그때 제임스가 들어온다.
“오늘, …… 저녁 일 마치고 잠깐 시간을 내 줄 수 있어요, 오이씨?”
오랜만의 애칭에 경애가 멈칫, 제임스를 바라본다. 주인아저씨가 빙긋이 웃으며 못 들은 척 한다.
“중요한 이야기가 있어요. 일 끝날 때까지 기다릴게요.”
제임스는 경애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구석 쪽의 빈자리에 앉는다. 주방 쪽 유리너머에서 한씨아주머니가 고개를 끄덕이며 지금 나가라는 눈짓을 한다. 주인아저씨의 결산이 끝나고, 경애가 잠시 어정쩡해 있는 사이 주방에서 나온 한씨아주머니의 손에 경애의 겉옷이 들려있다.
“지금 나가 진수엄마, 오늘 수고했어. 뒷정리는 내가 다 할게.”
등 떠밀리듯 제임스와 함께 밖으로 나온 경애는 제임스의 뒤를 따라 걷는다.
“크리스티 피츠 파크로 가요. 오이씨.”
공원의 공기가 한결 싸늘하다. 길가의 나무 아래 제임스의 차가 주차되어 있었다. 제임스가 차의 뒤편으로 가며 따라오라고 손짓한다. 뒷편의 트렁크를 열고 다가서는 경애를 향해 보라는 시늉을 한다. 경애가 허리를 굽혀 가로등 불빛 스치는 트렁크 안을 들여다본다.
“어머나!”
트렁크 안에는 오이가 가득 실려 있다.
“………?”
영문을 몰라하는 경애의 눈빛과 짤막한 침묵이 흐른다.
“오이씨, 이 오이로 오이소박이 담으면 얼마 동안 먹을 수 있을까?”
여전히 동그라진 눈과 침묵에 싸여있는 경애를 바라보는 제임스의 태도가 진지하다.
“오이씨, 이 오이로 오이소박이를 만들어 줄 수 있어요? 으음, 한 번에 다 만들 수는 없겠지요?”
“………?”
“그러니까, 두고두고 조금씩 만들어주면 좋겠어요. 평생 동안.”
“………!………?”
“아직도 모르겠어요? 오이씨? 나 지금 오이씨에게 청혼하는 겁니다.”
순간 더욱 굳어지는 정적.
“오이씨, 애 써나? 애 서면 오이소박이 시게 익혀서 먹으면 되잖아요.”
정적이 폭발하듯 경애가 웃음을 터트린다.
몸 속 어딘가에 숨어 있던 웃음보가 터지기를 기다리기라도 한 것처럼, 마치 실밥이 터진 부대 자루 같다.
허리가 휘어지도록 웃어도 가시지 않는 웃음을 감당하기 어려워 나무 둥치를 손으로 짚는다.
제임스가 재빨리 어깨로 경애를 받는다.
생각 같아서는 공원의 잔디밭에 나뒹굴고 싶다. 그래야 비로소 비워낼 것 같은 웃음보따리. 아니 눈물보따리.
한참 동안을 그렇게 웃는다. 지켜보던 제임스가 어깨를 들먹이며 따라 웃기 시작한다.
큰 입을 벌리고 제임스가 웃자 비스듬히 제임스의 어깨에 기대어있던 경애의 몸도 흔들린다.
올려다본다. 큰 키의 우듬지에서 검은 피부 때문에 드러나는 제임스의 하얀 이가 마치 공중에 떠있는 팔찌 같다.
‘무슨 팔찌가 공중에 떠있는 거야? 입도 크다!’ 웅얼거리다가 ‘아, 저 팔찌가...’ 내 운명을 묶는 수갑이구나 하는 생각이 스친다.
묘하게도 허탈해진다. 이내 웃음이 잦아들면서 눈물이 솟구친다. 눈물을 감추느라고 우우우 이상한 신음소리까지 낸다.
‘오이, 당신 지금 웃는 거야? 우는 거야?’
한국말이 서툰 제임스의 말에 경애는 다시 웃음을 터트린다. 제임스가 따라 웃기 시작한다.
두 사람이 웃어 제치는 소리가 뒤섞여 불빛 사이를 지나 밤하늘로 퍼져 나간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