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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탓인지 어떤 물건이나 이름, 단어가 가물가물하면서 떠오르지 않는 경우가 있다. 독립영화제로 유명한 선댄스 영화제를 만든 사람, 로버트 레드포드는 입에 돌기만 하고 대신에 해리슨 포드가 생각난다. 포드 2자가 같기는 하다. 내 성을 말할 때 초콜릿의 초(Cho)라고 하면 통한다. 그런데 초콜릿을 만드는 재료가 카카오인지 코코아인지 모르겠다. 이 둘이 어떻게 같은 건가? 조선말 하와이로 이민 갔던 선조들이 사탕수수 밭에서 피눈물을 흘리며 일하다 옮긴 곳이 파인애플 농장이라 한다. 아무리 생각해도 파인애플과 애플의 연관성을 찾을 수가 없다. 외양이며 맛도 천양지차인데 여전히 의문이다. 유명한 파인애플 가공 브랜드 Dole 공장은 하와이에 있다. 이게 입에 뱅뱅 돌기만 하고 안 떠오른다. 그런데 이걸 어찌 읽어? 돌? 도레?
맹물을 데워 마시는데 물맛이 별로여서 향이 나는 과일 한 조각을 넣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양 볼에서는 벌써 신 침이 번져 나오는데 melon이 떠오르면서 노오란 lemon이 생각나지 않는 것이다. 왜 멜론인가 말이다. 단어에서 L과 M이 헷갈린 것이다. 음운도치가 일어나기는 했다. 레몬을 살 때 자몽을 사야겠다. 겅중겅중 썰어서 꿀단지에 재워 몇 달을 두었다가 두어 쪽씩 끓는 물에 넣어 차로 마셔야지...... 20년 전쯤엔가 오래전에 처음으로 자몽을 사다가 껍질을 벗기고 통째로 꿀에 찍어 우걱우걱 먹었던 그 맛, 알갱이가 톡톡 터지는 그 쓴 맛과 쓴 맛을 잡아주는 꿀은 입맛을 살려주었다. 자리 값으로 비싸게 받아야겠지만 큰 잔에 한 조각 넣어 주는 자몽 차는 인색의 대표선수다. 포도와는 닮은 점이 하나도 없는 자몽(pomelo)을 왜 grape(포도) fruit라 하는지도 모르겠다.
작은 그릇인 나는 잘 나서지 않으려고 한다. 그런데 답답함을 보면 참지를 못해, 나서는 때가 어쩌다 있다. 불편한 것은 참아도 부당한 것엔 참기 어렵기는 하다. 그래도 잘 나서지 않으려고 한다. 그러나 일을 맡으면 밀고 나간다. 그래서 그것도 카리스마(charisma)에 해당하는지 나를 잘 못보고 카리스마가 있다고 하는 소릴 들은 적이 있다. 그래 그거, 시원시원함. 추진력. 카리스마가, 또 세렌디피티(serendipity)가 입에 뱅뱅 돌기만 한다. 우연히 떠오른 생각도 이전의 어떤 경험이나 학습 없이 톡 떨어지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런 갑자기 떠오른 생각이 대단한 발견이거나 문제의 해결책이 될 때가 있다. 행운이다. 소음 속에서 하나 건지는 경우도 있고 덜 깬 잠에서 비몽사몽간에 얻는 경우도 있다. 세렌디피티처럼 찰나에 깨달으면 돈오(頓悟)라 할 것이다.
가까운 곳엔 걸어 다니고 멀리 갈 땐 기차나 버스를 타고, 술자리에 갈 땐 택시를 탄다. 그래서 차를 세워두면 며칠씩 둘 때가 있다. 지하주차장엔 오랜만에 나오면 어디에 대었는지 가물가물하다. 헛짚어 아래위층을 오갈 때도 있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1층, 2층을 구분해 적어 놓은 통에 키를 두고 나갈 때 확인한다. 이게 치매와 관련이 있는 것일까? 대형주차장에서는 사진을 찍어두는 것이 안전빵이다.
저마다 다른 재주가 있다. 사람의 이름과 신상정보를 잘 기억하는 사람이 있다. 그런 친구가 곁에 있으면 편하기는 하다. 나는 그걸 잘 못한다. 그래서 명함을 받으면 나름대로 메모를 해 둔다. 그 사람의 인상이나 특징, 누구 닮은 사람 같다느니 등을 적어 둔다. 안 그러면 언제 어디서 무슨 일로 만난 사람이라고 적어 두긴 한다. 그래도 잘 기억하지를 못한다. 그런 면에서 보면 나는 정치나 사업하기에는 부적절한 사람이다. 명함에 메모를 해 두고도 정작 필요할 때면 명함을 찾기가 쉽지 않다. 찾을 땐 없다가 나중에 뜻하지 않은 곳에서 쉽게 나온다. 메모를 잘 하지만 그것을 다시 보는 경우가 많지 않은 것은 필기만 열심히 해두고, 또 사진만 바지런히 찍어 두고는 다시 보지 않는 것과 같다. 이젠 앱이 있어 저장해 두기는 한다. 소는 배불리 먹고 밤새도록 되새김질을 해서 소화시킨다. 밥통이 하나뿐이라서 소처럼 먹은 것을 되새김 하기는 쉽지 않겠지만 뇌는 하드 디스크처럼 따로 나누어서 생각을 되새김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야 해리슨 포드에게 멜론을 깎아주고 로버트 레드포드에게 레몬 차를 한 잔 내어줄 수 있을 것이다.
따라 갔던 카페나 식당, 저번에 본 영화의 이름이 눈에 여겨지지 않는다. 그 카페에서 만나자 하면 위치를 다시 찾아야 한다. 이름을 몰라 검색하는데 애를 먹는다. 영화의 스토리나 주요장면은 생각나는데 제목은 모르겠다. 노래방에서 노래를 잘 찾지 못한다. 가사 한 두 줄로 검색이 안 되기 때문이다. 즐겁게 보았어도 콘서트의 지휘자나 연주자를 기억하지 못한다. 곡목은 아예 기대할 것이 못된다. 더위를 피해 시원한 산중의 스키장으로 옮긴 시향(市響)을 보러갔다가 한여름 밤의 별빛 소나기를 흠뻑 맞고는 21발의 포성과 포연이 다 사라지고 나서야 겨우 정신을 차린, 그 감동의 종소리와 박동은 아직도 생생한데 그 서곡(序曲)이 몇 년이었더라? 1882, 1812? 근데 내 나이는 몇이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