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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 흘리는 여성들
한 사람은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출산을 앞둔 새댁이었고, 다른 한 사람은 사십대 후반의 중년 여성이었다. 그들은 결혼 이후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걸 남편에게 맞춰 생활해야 할 뿐만 아니라 친구들을 만나거나 여행을 갈 수도 없고, 심지어 젊은 여성의 경우는 남편이 하루 종일 전화를 하여 감시하는 것도 모자라 아내와 함께하고 싶다는 이유로 직장까지 그만두었다고 한다. 그런 이유로 두 주인공의 고민과 바람은 남편의 통제로부터 조금이라도 벗어나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또 한 사람의 고민의 주인공도 생각난다. 그는 남편의 지나친 폭언으로 인해 상처가 깊은 여성이었는데, 그 말들은 내가 들어도 결코 용서가 되지 않는 아내의 인격과 자존감을 완전히 짓밟는 것이었다. 이 여성의 경우 위의 두 주인공과 달라 보이지만, 그들의 남편이 아내를 자신의 틀 안에 가두어 하나의 인격체가 아닌 본인 소유의 감정 없는 물건처럼 취급하고 있다는 점에서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위에서 언급한 과거의 여성작가들과 프로그램 속 주인공들의 고민을 들으며 문득 저 유명한 옛이야기 ‘푸른 수염Bluebeard’을 떠올렸다. ‘푸른 수염’은 어른이 된 지금 읽어도 매우 충격적이고 무서운 이야기로 다가온다. 특히 딸의 동선을 따라가며 그 심리를 읽다 보면 온몸에 소름이 돋는다. 딸의 심리에는 두 가지의 측면이 있다. 하나는 사랑과 선택에 대한 측면이고 다른 하나는 궁금증과 호기심 그리고 그에 대한 갈등과 위반의 측면이다. 나는 이 두 가지를 주목한다.
‘푸른 수염’은 남성 중심의 가부장적 이데올로기를 가장 극렬하게 보여주는 이야기로, 이 이야기를 처음 기록했을 당시의 시대상을 잠시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17세기 프랑스의 샤를 페로Charles Perrault는 유럽에서 구전되는 옛이야기들을 기록하여 아동 교육을 위한 장르로 정착시켰고,‘푸른 수염’역시 그중 하나이다.
그러나 페로는 옛이야기에 교훈을 덧붙여 당시 중요한 덕목이었던 남성의 권위와 여성의 복종이 결혼생활에 부와 행복을 가져오는 일임을 강조하였다. 결국 ‘푸른 수염’에도 역시 남성의 말을 위반하고 복종하지 않는 여성에 대한 경고의 메시지가 담겨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푸른 수염’의 메시지가 페로가 살던 시대 또는 그보다 이후에 기록된, 비교적 원전에 가깝다고 여겨지는 독일의 그림 형제Jacob Grimm, Wilhelm Grimm의 옛이야기에서 그치지 않는다는 점이다. 또 과거 동서양의 여성작가들과 마찬가지로 현대에 와서도 위에서 언급한 토크 프로그램의 주인공들과 같은 여성들이 주변에 존재하고, 남편의 통제와 폭력 앞에서 숨 죽여 살거나 심지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하는 여성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여전히 ‘푸른 수염’의 모티브로 다양한 작품들을 재생산하고 있는 것으로 증명되고 있기도 하다. 대표적으로 카터Angela Carter의 <피로 물든 방Bloody Chamber>이나 하성란의 <푸른 수염의 첫 번째 아내>와 같은 소설이 바로 그것이다.
여성이 자신의 방을 갖기 위해서는 ‘푸른 수염’의 금기된 방에서 보았던 장면처럼 피를 흘리는 대가를 치러야만 한다. 그것은 곧 여성이 자신의 능력을 펼치고자 할 때 오랜 역사 속에서 고착된 젠더 규범의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 수많은 칼날에 찔리며 희생해 왔다는 의미이다.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