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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더운 여름철에 떨어진 입맛을 끌어 올려주는 음식으로 우리는 냉면(冷麵)을 꼽는다. 필자도 여름이 되면 시원한 냉면을 즐겨 먹는다. 냉면은 더워지기 시작하는 5월부터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8월까지가 성수기이며, 이 4개월 동안 1년 매출의 약 80%가 발생한다.
우리나라 고유음식인 냉면(冷麵ㆍchilled buckwheat noodle soup)은 말 그대로 차가운(冷) 국수(麵)다. 냉면은 더운 여름철에 즐기는 음식으로 자리를 잡았지만, 원래는 추운 겨울철 음식이다. 이북(以北)이 고향인 사람들은 추운 겨울 뜨거운 온돌방에서 이가 시리도록 찬 동치미국에 냉면을 말아먹는 것이 진짜 ‘냉면 맛’이라고 한다.
냉면을 겨울철에 먹은 이유는 냉면 국수를 만드는 메밀은 조선시대에는 제주도를 포함한 전국에서 재배됐는데, 음력 7월 초순에 심어 가장 늦게 수확했다. 당시 평안도 사람들은 한여름에 밀을 수확해 만두와 국수를 만들어 먹고, 겨울이 되면 늦가을에 추수한 메밀로 냉면을 만들어 먹었다. 당시엔 겨울에 먹는 냉면이 ‘제철 음식’이었다.
우리나라 식당의 평양냉면은 북한 평양냉면에 비교해 고명(garnish)이 적다. 북한에서는 고명이 달걀지단, 소고기, 돼지고기, 닭고기, 무생채, 무짠지, 소금에 절인 오이가 층층이 쌓이며, 고춧가루를 육수에 갠 후 파, 마늘을 다져 넣은 양념장도 식탁에 올린다. 메밀은 금방 소화되기에 고명을 넉넉하게 올리며, 북한에서는 껍질째 제분한 메밀과 감자전분을 섞기 때문에 국수가 검은빛이 돈다.
필자는 지난 1973년 UNICEF 인도네시아 사무소에 근무할 당시 자카르타(Jakarta) 시내 Asoka 관광호텔 1층에 서울 우래옥(又來屋)에서 운영한 Korea House에서 한식을 즐겨 먹으면서 냉면도 먹은 것이 생각난다. 인도네시아(印尼, Republic of Indonesia)는 1945년에 네덜란드로부터 독립했으며, 북한과는 1964년에 외교수립을 했으며, 한국과는 1973년에 국교를 맺었다. 필자가 2007년 10월 노무현정부 당시 통일부의 대북지원사업 전문가 자격으로 평양과 황해남도 신천군을 3박4일간 방문했을 때 평양 고려호텔에서 일행과 함께 냉면을 즐겼다.
2년 전 남북 정상이 만났을 때 문재인 대통령은 평양 옥류관(玉流館) 냉면에 대해 “내가 늘 먹어왔던 평양냉면 맛의 극대치”라고 했다. 한편 최근에 평양 옥류관 주방장이 문 대통령을 가리켜 “평양에 와서 옥류관 국수를 처먹을 때는 무슨 큰일이나 칠 것처럼 요사를 떨고 돌아가서는 전혀 한 일도 없는 주제”라며 “몽땅 잡아다가 우리 주방의 구이로에 처넣고 싶은 심정”이라고 막말을 하여 물의를 일으켰다.
‘평양냉면’과 ‘함흥냉면’은 흔히 ‘물냉’과 ‘비냉’으로 불리지만 본질적인 차이는 면(국수)의 재료다. 한복진 등이 1998년에 발간한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우리 음식 100가지’란 책에서 평양냉면과 함흥냉면은 조리법과 맛이 크게 다르다고 소개한다.
즉 ‘평양냉면’은 메밀을 많이 넣고 삶은 국수를 차가운 동치밋국이나 육수에 만 ‘장국 냉면’이다. 한편 ‘함흥냉면’은 고구마 전분을 넣어 가늘게 뺀 국수를 매운 양념장으로 무치고 양념한 홍어회를 얹은 ‘비빔냉면’이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평양식 물냉면이 대부분이었는데 1990년대 이후 함흥냉면 체인점이 전국에 퍼지며 인기를 얻었다.
냉면의 주재료인 메밀은 자체에 끈기가 없기 때문에 밀가루나 전분(澱粉, starch)을 섞거나, 뜨거운 물로 반죽해서 치대야 한다. 밀가루나 전분의 비율과 치대는 기술에 따라 면의 끈기와 질감이 달라진다. 메밀국수는 메밀 80〜90%, 밀가루나 전분 10〜20%의 비율로 섞인 것이 적당하다. 냉면의 열량(1인분 한 그릇)은 물냉면(계란 1/2개) 435kcal, 비빔냉면(계란 1/2개) 442kcal, 회냉면(홍어회) 490kcal이다.
필자가 즐겨 찾는 냉면집은 필자의 아호(雅號, 靑松)와 같은 연희동 청송, 공덕동 을밀대(乙密臺), 을지로 우래옥(又來屋), 북한산 인근 만포면옥 등이다. ‘미쉐린 가이드(The Michelin Guide) 2020’에 수록되어 있는 서울지역 냉면 맛집은 정인면옥(영등포구), 남포면옥(중구), 필동면옥(중구), 진미 평양냉면(강남구), 오장동 함흥냉면(중구), 봉밀가(강남구), 우래옥(중구), 평양면옥(중구), 봉피양(송파구) 등이다.
요즘 중국냉면(中國冷麪)을 찾는 한국인들이 많아졌다. 중국냉면은 1980년대에 호텔 중식당에서 중국냉면을 팔면서 본격적으로 알려졌다. 중국냉면은 중국의 찬 비빔국수인 량몐(凉麪)에 한국식으로 찬 국물을 더해 만들어졌다. 얼음 육수에 새우와 해파리, 갑오징어 등 해물과 오이, 달걀, 당근 등 채소를 곁들이고, 땅콩 소스와 겨자장을 넣어 먹는다.
필자가 가족과 함께 즐겨 찾는 연희동 소재 전통중화요리 걸리부(傑利富)와 구가원(邱家苑)에서는 꼭 ‘가죽나물’을 냉면에 곁들이는데 가죽나물이 없으면 중국냉면을 팔지 않는다. 참죽나무의 여린 잎을 가죽나물이라고 하며, 이른 봄에 올라오는 가죽나물은 독특한 향이 있어 별미 식재료로 알려져 있다. 위장건강에 도움이 되는 가죽나물은 봄철에만 나오기 때문에 값(1kg/2만원)도 꽤 비싸다. 중국냉면은 땅콩 소스의 달콤한 맛을 즐길 수 있지만 칼로리(calorie)가 높다.
냉면은 냉면집마다 나름대로 맛을 내는 비법을 갖고 있기 때문에 맛이 다르다. 냉면의 맛을 결정하는 육수를 북한산 인근 만포면옥에서는 소(牛)의 사골을 고아 우려낸 육수에 동치미국물을 섞어 간을 맞추고 있다. 만포면옥의 메뉴는 평양식 냉면, 비빔냉면을 비롯하여 불고기와 수육, 녹두지짐 등이 있다. 우리 가족은 이 식당에서 평양식 냉면에 수육, 녹두지짐 등을 곁들여 먹곤 한다.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 진찬의궤(進饌儀軌), 부인필지(夫人必知) 등 옛 문헌에 냉면이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17세기 조선시대부터 먹은 음식으로 추측된다. ‘동국세시기’에서는 메밀국수를 무김치와 배추김치에 말고 돼지고기를 섞은 것을 냉면이라고 하면서, 음력 11월 시식(時食)으로 소개했다. 궁중의 잔치 기록인 ‘진찬의궤’에 의하면 궁중의 잔치상에는 대개 온면(溫麵)을 차렸으나, 1848년 3월 잔치(순조 비의 회갑 축하잔치)와 1874년 4월 잔치(경복궁을 재건하면서 연 잔치)에는 냉면(冷麵)을 차렸다고 한다.
조선 후기 문인ㆍ학자 홍석모(洪錫謨, 1781-1857)가 1849년에 쓴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 ‘관서(關西, 평안도와 황해도 북부 지역)의 국수가 가장 훌륭하다’고 적었다. 그는 “메밀국수를 무김치나 배추김치에 말고 돼지고기를 넣은 것을 냉면(冷麪), 국수에 여러 가지 채소와 배ㆍ밤, 쇠고기ㆍ돼지고기 편육, 기름장을 넣고 섞은 것을 골동면(骨董麪)”이라고 했다. 앞의 냉면은 ‘물냉면’, 뒤의 골동면은 ‘비빔냉면’으로 본다.
본초강목(本草綱目)에는 “메밀은 위(胃)를 실하게 하고 기운을 돋우며 정신을 맑게 하고 오장(五臟)의 찌꺼기를 훑는다”고 기록되어 있다. 메밀은 쌀이나 밀가루보다 아미노산(amino acid)이 풍부하며, 필수(必須)아미노산(트립토판ㆍ트레오닌ㆍ리신 등)이 다른 곡류보다 많다. 메밀에 함유되어 있는 루틴(rutin) 성분은 모세혈관을 튼튼하게 하므로 고혈압에 좋으며, 또한 메밀은 변통(便通)이 잘 되어 변비를 예방할 수 있다.
황해도 곡산 부사(府使)를 지낸 실학자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 1762-1836)은 한 지인에게 아래와 같은 시를 적어 줬다. “(음력) 10월 들어 관서(關西)에 한자나 눈이 쌓이면/ 겹겹이 휘장에 푹신한 담요로 손님을 붙잡아둔다네/ 벙거짓골(삿갓 모양의 전골냄비)에 저민 노루고기 붉고/ 길게 뽑은 냉면에 배추김치 푸르네.”
냉면의 고향은 평안도, 함경도, 황해도 등 북한이며, 특히 1911년에 평양면옥상조합(平壤麵屋商組合)이 생길 정도로 평안도는 ‘냉면의 나라’라는 별칭이 붙었다. ‘평양냉면’은 주로 동치미 국물을 사용하였지만 소고기ㆍ돼지고기ㆍ닭고기ㆍ꿩고기 등을 이용한 고기육수도 사용했다. 평양냉면은 툭툭 끊기는 면발과 심심한 육수가 맛의 포인트이다. 황해도 냉면은 물냉면이지만 평안도보다 면발이 굵고 돼지고기 육수를 많이 사용하여 진한 고기 맛이 나며, 간장과 설탕을 넣어 단맛이 난다.
1920년대 함경도의 대중적인 외식(外食)은 감자나 고구마로 만든 전분(澱粉)국수였다. 1930년대에 감자 전분 면발에 식초로 삭힌 가자미회를 얹고 고춧가루, 마늘 등으로 만든 양념을 한 ‘회국수’를 만들어 먹었다. ‘함흥냉면’은 쫄깃한 면발과 매콤새콤한 회가 맛의 포인트이다.
속까지 시원한 ‘평양냉면’과 얼얼하고 쫄깃쫄깃한 ‘함흥냉면’을 즐겨 먹는 북한의 음식문화가 6ㆍ25전쟁 후 남한에서도 널리 애용되어 특히 더운 여름철에 즐겨 찾는 음식이 되었다. 북한에서 남한으로 내려온 실향민(失鄕民)들은 서울 남산 일대와 남대문 주변에 정착하여 냉면집을 운영하였다.
부산의 별미로 인기를 끄는 ‘밀면’은 함경남도 흥남에서 냉면집을 운영했던 피란민이 개발한 음식이다. 당시 함흥냉면에 들어가는 감자전분은 비싸서 엄두도 못 냈고, 배급 밀가루에 고구마 전분을 조금 섞어 만든 것이 밀면이다. 밀면은 값싸고 맛있어, 가난하고 마음이 고달픈 피난민들이 냉면 대신 많이 찾았다고 한다. 북한의 6ㆍ25남침전쟁 때 피란민이 남한으로 대거 몰려와서 부산의 인구가 전쟁 이전의 두 배로 급증하여 생존을 위해 새로운 음식들이 만들어졌다.
요즘 SNS를 통해 ‘냉면 마니아’들이 추천하는 다양한 냉면 중에는 가정에서 간단히 조리할 수 있는 ‘수박 냉면’이 있으며, CJ제일제당은 다양한 냉면 신제품 출시했다. 최근 날씨가 본격적으로 더워지기 시작하면서 냉면을 찾는 소비자가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있다. 맛있고 시원한 냉면 한 그릇으로 찜통 무더위를 이겨내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