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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을 위한 배출
또 당시 사회에서는 내치론內治論을 내세워 국가와 가정의 흥망을 여성의 행실과 선악에 연결시켜 흥망의 모든 책임을 여성에게 지웠다. 그런데 그 선악을 판가름하는 기준 역시 유교가 제시한 여성상과 여성규범으로 한정지었고, 여성교육은 여성 자신의 성장과 발전보다는 효와 열을 위한 순종적인 여성상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여성들은 자의 반 타의 반으로 효부와 열녀가 되기 위해 목숨까지 내놓을 지경이었고, 그 목숨은 때로 가문의 명예보다 하찮은 것이었다. 거기에 더해 며느리가 방귀로 감을 따서 인정을 받은 것처럼 여성은 경제적으로 막대한 노동력과 재량을 갖추어야만 했고 이는 현대에 와서도 여전히 요구되고 있다.
현대의 여성들 역시 결혼 이후 여전히 명절 스트레스, 독박육아 등에 시달리며 결혼에 대한 회의를 품거나 그보다도 오히려 그런 명확한 단어로 정의 내릴 수 없는 수많은 스트레스를 안고 살아간다. 남편의 살이 빠지고 찌는 것부터 집안이 일어나고 기우는 것까지 모두 다 집안의 며느리 책임이다. 그러다 보니 며느리 스스로 누군가 강요하거나 밀어낸 것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결혼과 동시에 시집의 눈치를 보며 칭찬받기 위해 애를 쓰는 경우가 생긴다. 며느리들은 병이 되도록 자신을 억누르며 집안의 모든 무거운 짐을 이고 살아가면서도 경제적인 부분까지 책임져야 한다. 맞벌이를 해도 집안일이나 육아는 여자의 몫이고, 아이나 집안에 문제가 생겼을 때 그 책임은 당연히 여성에게 전가된다. 맞벌이를 하지 않는 여성들은 육아와 집안일에 찌들어 골병이 들어도 하는 일이 뭐가 있냐는 말을 듣기 일쑤이고, 재테크 등 집안 경제를 불려야 할 책임을 지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러한 현상은 아직도 사랑하는 두 사람의 독립적인 결혼이 아닌, 남편 집안으로 시집을 가는 며느리의 위치 때문에 생기는 일이며 가부장제 안에 종속되는 며느리의 삶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많은 이들이 고부간의 갈등을 이유로 여성들이 스스로 갈등을 만든다고 하지만 실상 시어머니와 며느리는 둘 다 가부장제 안의 희생양이며 시어머니 역시 그 답습을 반복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흔히 며느리 사랑은 시아버지라는 말로 미화시켜 그 문제를 여성들 간의 문제로 축소하여 서로를 이간질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고부간의 갈등을 넘어 동서 간 또는 며느리와 시누이 간 갈등은 더 한심하다. 부모에게 효도해야 할 사람은 그 자식들임에도 불구하고 결혼 전에는 알지도 못했던 다른 집안의 며느리에게 효도를 강요하고 있으니 그에 따르는 갈등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이다.
이제 모두가 문제를 직시하고 깊은 갈등의 근원과 원인부터 고찰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이는 이야기 속 절대 권력자인 시아버지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시아버지의 한마디는 며느리가 방귀를 참아야만 하고, 뀌어도 된다는 허락을 받고, 쫓겨나고, 방귀로 인정을 받고, 다시 시집으로 들어갈 수 있는 최대의 힘이다. 시아버지의 한마디가 타당한지 아닌지 따질 겨를도 없이 그 말은 응당 따라야만 하는 절대 권력인 셈이다.
이 옛이야기에서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소통에 관한 문제이다. 이것 역시 원인은 가부장제로부터 비롯된 것이긴 하지만, 가족 간 소통의 부재가 며느리를 병들게 한 부분도 있다. 만약 남편이나 시어머니라도 며느리의 처지를 이해하고 소통하려 했다면 문제는 약화될 수 있었을 것이다. 외부에서 새롭게 편입된 며느리가 기존 가족들과 원활하게 소통을 한다는 것은 쉽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시간이 걸리는 일이다. 더구나 소통이 전무한 가족 내에서 가장 힘들 수밖에 없는 사람은 외부에서 온 며느리일 수밖에 없다. 며느리가 자신의 생각이나 의견 등을 가족들 사이에서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고, 그것이 받아들여질 수 있을 때 몸도 마음도 건강하게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을 경우 방귀가 몸속에 쌓여 독소가 되어 건강을 해치는 것처럼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병에 걸릴 가능성이 높고 가족 내 구성원으로 활착하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