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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월 14일 수요일은 안중근 의사가 사형 판결을 받은 날이면서, 교회성당에서는 사순절이 시작되는 첫날이다. 사순절, 즉 40일은 그리스도교에서 예수 죽음 이전 기간을 가리킨다. 예수 고난과 죽음뿐 아니라 나 자신의 죽음도 묵상하는 시간으로 알려져 있다.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리라”(창세기 3,19b). 흙에서 나온 인간은 결국 흙으로 돌아간다. 라틴어 humus는 ‘흙’, humanus는 ‘인간의’ ‘인간적인’이란 뜻이다. 인간과 흙은 존재뿐 아니라 단어로도 연결되어 있다. 죽음을 묵상하는 사순절에 교회성당에서 자주 쓰이는 단어 중 하나가 “내 탓이오”다. 가톨릭 신자들은 미사 때마다 자기 가슴을 치며 “내 탓이오, 내 탓이오, 내 큰 탓입니다” 고백한다.
2009년 한국 가톨릭에서 ‘내 탓이오 운동’이 벌어졌다. 김수환 추기경이 생전에 자주 강조해온 사랑과 화해와 용서의 삶을 압축했던 한마디이기도 하다. 죄 많이 지은 사람들이 뻔뻔하게 버티는 세상에서, 자기 잘못을 정직하게 고백하는 모습은 아름답다. 그런데, 이 “내 탓이오” 용어는 자칫하면 본래 의도와 다르게 잘못 이용될 소지도 있다. 사람을 정신적으로 억압하는 통제 장치중 하나로 악용될 수 있다는 말이다. 이렇게 질문할 수도 있다. “왜 꼭 내 탓이지?”
내 죄를 만드는 세상의 악
죄와 악을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죄가 개인이 저지른 잘못을 가리킨다면, 악은 개인의 죄가 구조화된 커다란 힘에 비유할까. 세상에는 내 죄나 남의 죄만 있는 것이 아니다. 주먹 만한 내 죄와 티끌 만한 남의 죄가 모이고 커져서 마침내 눈덩이처럼 커다란 세력이 된다. 내 죄는 내가 뉘우치고 회개하여 어느 정도 고칠 수 있다고 하지만, 악은 내 회개와 반성에 관계없이 독자적인 힘으로 우리를 억누른다.
이 설명은 달걀과 닭 중에 무엇이 먼저냐 가리키는 논쟁은 아니다. 내 죄와 세상의 악을 자세히 비교해보자. 인간에게 더 많은 해악을 끼치는 것은 내 죄인가, 세상의 악인가. 무엇부터 먼저 없애야 하는가- 내 죄인가, 세상의 악인가. 내 죄를 묵상하는 데 몰두하다가, 내가 세상의 악을 모른 체해도 좋다는 말인가. 아무리 큰 내 죄도, 세상의 악에 비하면, 사소할 뿐이다. “사람을 죄짓게 하는 이 세상은 참으로 불행합니다“(마태 18,7a).
“내 탓이요” 단어에서 내 잘못을 떠올리는 사람은 많아도 세상의 악을 연상하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모든 사람이 “내 탓이오” 고백한다 해도, 모든 사람이 세상의 악을 정직하게 바라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생각하는 주제를 확 바꿔야 한다는 말이다. “내 탓이오” 그만 하고 “저들 탓이오!” 외치자는 말이다. “내 탓이요” 그만 하고 “예 할 것은 예, 아니오 할 것은 아니오”(마태 5,37) 하자는 말이다.
▲ 광야에서 유혹당하는 예수. 위키백과
세상의 악에 저항했던 예수의 40일
예수 죽음뿐 아니라 내 죽음도 묵상하는 사순절이란 단어는 과연 적절한가. 성탄절, 부활절 단어는 내용을 가리키지만, 사순절 단어는 기간을 가리킨다. 내 생각에, 그 의미로 보나 정확성으로 보나, 사순절 단어보다 저항절 단어가 더 낫다. 사순절 단어는 예수의 수동적 고난을 가리키지만, 저항절 단어는 예수의 고난뿐 아니라 적극적 저항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예수가 고난 받았다는 사실뿐 아니라 예수가 고난받은 이유를 또한 알아야 한다. 예수가 저항하지 않았다면, 예수는 고난 받지 않았을 것이고, 처형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예수는 수동적으로 고난 받은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저항했다. 예수는 불의한 세력에 저항하였기 때문에 고통 받았고, 정치범으로 십자가에서 처형되었다.
사순절 단어는 예수의 저항을 설명하기에 많이 부족한 단어다. 내 생각에, 사순절, 즉, 저항절은 예수 고난보다 예수 저항을 좀더 생각하는 시기다. 내 죄보다 세상의 악을 먼저 더 성찰하는 시기라는 뜻이다.
28살 체 게바라는 어머니에게 이런 편지를 썼다. “저는 예수와 전혀 다른 길을 걷고 있습니다… 저는 힘이 닿는 한 모든 무기를 동원하여 싸울 겁니다. 저들이 나를 십자가에 매달아두게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 십자가에 매달리는 억울한 희생자가 없게 하자는 말이다. 세상에서 어떤 악이 자행되고 있는지, 두 눈 부릅뜨고 똑바로 보자는 뜻이다. 세상의 악을 없애기 위해 싸우던 예수를 따르자는 말이다. 체 게바라는 예수의 저항을 잘 이해하였다.
▲ 이승만 전 대통령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건국전쟁’이 관객 60만명을 돌파했다. 18일 영화진흥위원회 통합전산망에 따르면 ‘건국전쟁’은 전날까지 62만6천763명의 누적 관객을 기록했다. 사진은 이날 오전 서울 시내 한 영화관에 ‘건국전쟁’ 포스터가 나오고 있다. 2024.2.18. 연합뉴스
학살 독재자 이승만 칭송? 사순절에 개신교가 할 짓인가
세상의 악에 목숨걸고 저항했던 예수의 삶과 정반대되는 해괴한 짓이 최근 한국 개신교 일부에서 일어나고 있다. 영화 <건국전쟁>을 통해 독재자 이승만을 부활시키려는 해괴한 움직임 말이다.
강인철 교수의 『종속과 자율-대한민국의 형성과 종교정치』에 따르면, 해방 직후 미군정은 일제의 종교 부동산과 재산(적산)을 대부분 개신교에 몰아주었다. 영락교회, 경동교회 등이 적산의 특혜 배분으로 자리 잡았다.
이승만은 영락교회에서 출범한 서북청년단을 앞장세워 제주 4.3 학살을 자행하지 않았는가. 이승만은 아름다운 제주 섬을 거대한 공동묘지로 만든 장본인이다. 그것 뿐인가. 이승만 때문에 목숨을 잃은 사람이 또 얼마나 많은가. 이승만의 죄악을 낱낱이 종이에 쓴다면, 대한민국 모든 종이를 모아도 부족할 것이다.
독일에서 독재자 히틀러를 찬양하는 사람은 즉시 감옥형에 처해진다. 대한민국에서 독재자 이승만을 칭송하는 사람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개신교 형제자매들께 정중하게 묻고 싶다.
출처 : 세상을 바꾸는 시민언론 민들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