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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에는 아침을 거르고 점심을 겸해서 느직히 아점을 먹는다. 그런데 꾸역꾸역 밥을 먹으려니 고역이었다. 빈 속으로 나갈수 없기에 억지로 떠넣는데 밥이 목에서 걸리는 것 같아 꺼림직했다.
수저를 팽개치듯 물한잔 마실 여유도 없이 뛰쳐나오는데 왠지 불안했다.
아니나 다를까? 차를 달리는 중에도 계속해서 더부룩하니 내려갈 생각을 안했다. 이러다가 큰 탈 나는거 아닌가 싶어 은근히 겁이나기 시작했다. 온 신경이 그 쪽으로만 쏠렸다.
오늘은 안과예약이 있어 병원을 가는 참이다. 보호자도 없이 혼자이니 환자전용 주차장을 이용해야했다. 조금 늦으면 자리가 없어 서두르게 되는 것이다.
주차비 몇 푼 아끼는 것도 그렇지만 병원 입구도 가깝고 너무 편하고 좋아서 전쟁같은 난리를 치는 것이다.
아침 공기는 맑고 신선했다. 길에 떨어져 구르는 낙엽들이 계절을 재촉하는지? . . . 집 안에서 느끼지 못했던 성큼 다가온 가을을 맞이하는 기분이 그런대로 나쁘지 않았다. 막힌듯한 속 만 아니라면 이른아침 드라이브 치고는 썩 괜찮은 기분이었다.
조금만 일찍 일어나서 준비했더라면 따끈한 커피한잔 마시고 나올 수 있었을텐데 . . . 게으름을 자책했다.
서두른 보람은 있었다. 촘촘히 서 있는 차들을 훑어 지나는데 쪼삣하게 비어있는 딱 한 자리가 눈에 들어왔다. 앗차하면 놓쳤을 아슬아슬한 행운이었다.
사실 이 주차장은 환자전용이 된지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차를 몇 대 밖에 댈수없는 아주 작은 공간이어서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그래서 거기 주차를 하는 날은 아침부터 재수 좋은 날이란 생각이 든다.
일찍 카페가 문을 열었는지 알수 없지만 따뜻한 물이라도 마셔야 할 것 같았다. 몇 발짝 걸음을 옮기고 있을 때 멀찍이 문 앞에서 누군가가 인사를 건네오며 반겨주고 있질않은가.
이건 또 무슨 훼방꾼? 통역을 맡아주실 통역사님이 왠일로 이토록 일찍이도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커피는 물건너로 갔다. 시간이 많이 이른데도 곧바로 접수를 마쳤다. 1번 대기실로 가서 기다려야 했다.
노인성 황반변성의 진단을 받고 정기적인 치료를 받아온지가 벌써 몇 년째다. 안과 분위기는 이제 내 집처럼 익숙하다.
언제나 그렇듯이 대기실엔 사람들로 북적인다. 환자가 대부분 노인들이여서 자녀들과 동반 보호자가 많아 거의 앉을 자리가 없다.
겨우 반대편 출구 쪽 끝에 자리를 잡아 앉을수가 있었다.
병원에서의 기다림은 인내심이 필요할만큼 지루하다. 자연히 통역사님들과 대화를 많이 하게 된다. 진솔하게 사람사는 이야기 나누다보니 어느새 인간적인 친분도 생겼다. 공인된 장소에서 젊은이들과 맘 놓고 대화할 수 있는 그 시간이 얼마나 좋은지 모른다. 새로운 지식과 정보도 얻으며 얼마간 젊어지고 오는 느낌마저 들기 때문이다.
충충한 대기실 안에 갑자기 커피향이 코끝에 감겨온다. 누군가가 커피를 들고 와 마시는 모양이었다. 편치않은 속을 다시 휘저어 놓았다. 커피 내음은 점점 더 가까이 짙어와 후각을 자극했다.
은연 중 고개를 들어 둘러보니 여러 사람들이 커피 잔을 들고 기분 좋게 마시고 있질 않은가.
입구쪽에 하얗게 반짝이는 금속의 물통이 눈 에 확 들어왔다.(오~라 저거였구나, 누가 가져왔을까? 마시는 이들은 또 어떤 사람들인가? . . .) 어느 양로원같은 기관에서 단체로 치료를 받으러 온 줄 알았다. (아 나도 한잔 마시고 싶다.)
나와는 상관 없는 일이니 관심 끊기로 하고 시선을 돌리는 참이었다.
누군가가 내 앞으로 다가왔다. 두 눈만 빠끔히 보이는 히잡으로 몸을 감싼 여인이었다. 의아해서 바라보는 내게 그녀가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커피 드시겠어요?”
와~너무 반가워서 소리를 지를 뻔했다. 다급하게 오케이를 연발하며 고개마저 주억거리고 있었다.
참 특별한 날이다. 이 기막힌 우연을 어찌 설명해야 할까? . . . 생면부지의 나를 챙기려는 이 여인은 어디서 온 천사?인가. 그런 생각마저 들었다. 마치 내 안타까운 속을 읽고 찾아온 전령같았다.
너무 좋아하는 내게 밀크도 넣을까 설탕은 몇 스푼? 기호까지 물었다.
정성스레 만들어 온 종이컵 모닝커피 한잔. 눈물이 날만큼 감동이었다. 옆에서 지켜보던 통역사님이 살짝 놀라는 눈치었다.
따끈한 한 모금이 목줄기를 타고 넘어가자 뭉쳤던 속이 슬금 슬금 풀려 내리는 것 같았다. 간절하게 바라던 바로 그것이었다.
어느 멋진 자리에서 고급 잔에 마시는 커피보다 대단하고 값졌다. 그건 커피가 아니라 마음을 다스려준 훌륭한 약이었다.
이른 아침 썰렁한 병원 대기실에서 긴장하고 앉아있는 노인 환자들을 위하여 마련한 그 따뜻한 위로가 너무 고마웠다.
진심으로 고맙다고 했더니 목에 걸린 명패를 보여주며 자원봉사를 나왔노라고 환하게 웃었다.
그동안 다른 병동에서 봉사를 해 왔는지는 모르겠다. 긴 세월 다닌 안과에선 처음으로 접한 일이었기에 감동이 특별했다.
빈 몸 챙겨 나오기도 바쁜 이른 시간에 물을 끓여 담고 준비해 왔을 생각을 하니 그녀의 사랑이 다시금 느껴져 왔다.
내 감동만큼이나 그녀의 마음도 기쁠 것이라는 생각을 하니 더욱 만족했다.
자원봉사는 베품의 기쁨과 보람이 함께한다는 것임을 경험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녀도 충분히 행복한 하루가 되기를 마음속으로 빌어주었다.
그 다음날 친구와 만나 점심을 같이 먹었다. 시티 어느 한 식당이었다. 항상 바쁜 시간을 젊은이들에게 양보하고 조금 늦은 시간에 식당을 찾는다. 나이 먹은 이들의 예의이고 그래야 옳은 대우도 받기 때문이다.
자리가 많이 헐렁해서 인사도 깎듯하다. 여유있게 먹고 싶은 걸 시키고 하고 싶은 말 다하며 즐겁게 시간을 보낸다.
누군가 우리보다 더 늦게 들어오는 사람이 있어 흘낏 보게 되었다. 눈이 마주친 이는 앳된청년 낯익은 얼굴이었다. 그가 먼저 나를 알아본듯 낯을 붉히며 꾸벅 인사를 해왔다.
청년은 근처 건강식품 매장에서 일하는 사람이었다. 내 단골 숍이기도 해서 자주 보게되는 젊은이다. 세월이 꽤 지났음에도 항상 처음 자세로 좋은 인상을 주는 사람이었다. 그가 조금 멀찍이 떨어져 앉아 무언가를 시켜서 먹기 시작했다.
우리의 식사는 거의 끝나고 일어나려는 순간이었다.
계산대에서 계산을 하며 저쪽 청년것까지 함께 해 달라고 조용히 말했다. 왜냐고 묻는 듯 주인이 의아하게 바라보고 있다.
동행한 친구도 그가 누구인지를 알기에 이상하게 나를 바라보았다. 아무말도 안하고 웃기만 했다. 그냥 그러고 싶었다.
어제의 감동이 아직도 내 안에 남아 있었을까?나도 누구에겐가 감동을 나누고 싶은 마음이 갑자기 생겨난 것 같았다.
감동이란 전염병처럼 저절로 전달이 되는 모양이다. 그럴 이유가 없는 사람에게 얼마 안되지만 점심 값을 지불하고 나오는데 왜 그리도 행복하던지 . . . 아마 그 친구도 누군가에게 감동을 주고 싶은 마음이 생겨날 것이다. 뜻밖의 선의에 그지없이 고마워하는 눈빛에서 그걸 느꼈다.
일 년에 한 사람 당 마시는 커피가 평균 450잔 이 넘는다고 한다. 한국인의 커피 소비량이 그래서 세계에서 두 번째로 많다는 이야기다. 새롭게 맛을 개발해 이름도 다양한 무슨 무슨 커피들. 맛은 그만두고 이름 외우기만도 쉽지 않을 것 같다.
그토록 많이 마시는 커피 중에 감동의 커피도 분명 있을 것이다. 마음 따뜻해지는 특별한 커피는 그 중에 몇 잔이나 될까? 내가 한국에 살지 않아 그럴만한 자격도 없지만 괜스레 한마디 하고 싶다.
짙은 향기보다 더 깊게 교감을 자극하는 커피의 세상. 그런 세상이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